김운용과 태권도
발행일자 : 2001-12-03 00:00:00
이경명 태권도문화연구소 소장, 용인대 겸임 교수


1971년 1월 17일 김운용은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에 취임, 태권도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 보좌관에서 학술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 이종우 등 태권도인들의 권유로 태권도계에 투신하게 된다.
협회장을 맡은 김운용 회장(이하 생략)은 취임 초부터 의욕적인 사업을 펼치다. 태권도계의 통합과 내실을 기할 수 있는 태권도센터(현 국기원) 건립과 태권도기관지 발행 등이다.
그는 IOC 수석부위원장시절 자전적 에세이를 저술,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1995)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많은 세계 사람들과 함께 많은 일들을 해 왔다. 전쟁을 당한 조국을 위해 최전방에서 싸웠고,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했으며, 태권도협회를 스포츠 경기의 최고 영예인 올림픽 정식종목에 올려놓았다."
계간 태권도지 발간은 당시 130만 태권도인에게 기술적인 측면의 이론화와 교재 발간의 밑거름이 되었고 국내외 활동상황을 홍보함으로써 단결과 발전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태권도교본인 『태권도교본(품새편)』(1971)을 펴내기도 하였다. 또한 국기원 건립은 난립되고 있던 태권도 10개관의 통합과 승단 업무의 행정 일원화, 세계태권도연맹(1973년) 창설 등 세계화를 이루기 위한 기초를 다져 나갔다.
불행하게도 태권도지는 계간에서 월간지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2000년 9월 제142호로 발간이 중단됐다.
외교관 출신인 김운용은 국기원을 세우고 태권도의 국기화 작업으로 1971. 3. 20.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기 태권도 휘호를 받게 되었고 태권도의 국제화, 세계화 작업에특기의 순발력을 보였다.
그는 태권도를 국제스포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화 작업으로 조직을 강화하며 1975년 10월 GAISF(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에 가입,1980년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승인 등 눈부신 발전을 기했다.
뭐니 해도 김운용의 공적은 1994. 9. 4 파리에서 개최된 제103차 IOC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게 한 역사적 위업이다.
김운용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당시 태권도는 진흙 속의 진주처럼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대기(大器)가 혼돈 속에 있었다고나 할까. 더욱 지난 몇 년 동안 태권도협회가 방향성을 잃고 있었고, 3대 회장을 맡았던 최홍희가 친북 성향인 ITF를 창설함으로써 대내적으로 매우 혼란한 지경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고 회고하고 있다.
김운용은 자신의 명석한 두뇌와 노력으로 솔선, 태권도를 통해 국제스포츠인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리다.
태권도 발판 IOC위원에
김운용은 1986년 10월 제91차 로잔총회에서 IOC위원에 선출됐다. 한국에선 여섯번째로 위원이 됐는데,당시 88올림픽을 앞두고 박종규 위원이 세상을 떠나자 5공정부의 많은 인사를 제치고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정부로부터 추천으로 집행위원회를 거쳐 총회에서 선출됐다.
IOC위원이 된 김운용은 며칠 뒤 GAISF회장으로 당선돼 세계 스포츠무대에서 막강한 파워를 지니게 됐다. 그리고 IOC위원으로 선출된 지 1년 11개 월 만인 88년 9월 집행위원이 된 데 이어 92년 7월 바르셀로나총회에서 일본의 이가야 위원을 표결 끝에 54-28로 누르고 부위원장에 피선되는 등 IOC실력자로 급부상 된다.
순풍에 돛단 듯 93년 제31대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뽑혀 88서울올림픽 개최이후 국제체육행사를 유치, 국내스포츠무대에 한국의 영향력을 강화해 갔다. 93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총회, 95년 GAISF총회, 97년 부산동아시안게임과 무주동계 유니버시아드, 98년 IOC집행위원회, 99년 강원동계아시안게임과 IOC총회,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등이다.
해외사범 세계화 밑거름
태권도는 이제 세계스포츠로서 발전, 한국인만의 무도·스포츠가 아니라 세계인의 스포츠이다.
올림픽종목으로 채택,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김운용의 탁월한 스포츠 외교력은 물론 그 밑거름으로써 특히 해외로 진출한 사범들의 태권도 보급이 큰 힘이 되었다.
60, 70년대 해외로 진출한 사범들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세계시장을 개척했다. 동구권을 비롯한 아프리카, 지구촌 오지에도 태권도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외에서 태권도를 천직으로 생각하며 보급하고 있는 사범들이 수 천명에 달한다.
초창기 해외에서 피땀 흘리며 태권도를 보급했던 사범들 가운데 이제 운명을 달리한 사범의 숫자가 점차 늘어간다. 이러한 현상을 단지 세월의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서글프다. 사범들이 밤낮으로 땀흘리며 밑으로부터의 태권도 보급과 김운용의 위로부터의 스포츠 외교가 오늘날 태권도가 국제스포츠로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김운용은 "태권도발전은 뿌리부터 차근차근 됐다기보다는 위로부터 급속히 이뤄졌다"고 말한다.
천운(天運)이 따라야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황색인종으로서 대권에 도전한 김운용 회장에게 천운은 비켜갔다. 세계 모든 태권도인들은 그의 당선을 가슴 조이며 염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표 대결이란 언제나 그렇듯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는 교훈을 실감케 했다.
7월 16일 제8대 IOC위원장 선거가 있는 모스크바 제112차 총회에 태권도인의 시선이 집중됐다. 국내외 매스컴에 의한 김운용 후보의 만만치 않은 인기에 흐뭇해 한 모든 태권도인들은 내심 기대가 대단했다. 1차 투표에 이어 2차 투표의 결과는 23-59표로 벨기에의 자크 로게에게패했다.
우리는 그날의 비통한 장면을잊을 수 없을 거다. 국내 TV에 비친 우리의 태권도 지도자가 보여준 비례(非禮)한 모습을!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하고 있다.
한국의 스포츠발전을 위해, 국제무대에서 한국스포츠의 위상을 위해, IOC위원과 GAISF회장으로서 그가 해야할 일들이 많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도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국 스포츠 발전 위해 더욱 매진"이라는 서한을 김운용 총재 IOC 선거 낙선 후 김 대통령에게 보내다.
그 글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하기에 충분한 대목을 여기에 옮겨 보자.
"남북한 체육 교류도 그 어느 때보다 협조체제나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며, 많은 종목을 통하여 전반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한 동안태권도의 세계화와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등으로 내부조직 관리에 신경쓸 겨를이 적었으나, 태권도의 국내의 조직정비 및 제도개선 그리고 후진 양성을 도모하여 국제사회 속에서 태권도의 자리 매김에 더욱 힘쓸 것입니다."
4. 16. 학생운동 정신이
2001. 4. 16. 태권도학생운동 정신이 정말 무색해져 가고 있는 걸까.
국가대표 선발전 시비로 지난 4월 큰 홍역을 치렀던 태권도계가 또다시 내홍(內訌)을 자초(自招)하고 있다.
「뒤로 차는 태권도」보도( 조선일보 9/21)를 인용해 보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김운용)이 지난 4월 대표 선발전 판정 부정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임윤택 전 대한태권도협회 전무를 연맹 사무차장에 임명하자, 태권도 학과 교수 및 학생들이 김운용 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중략)
김운용 회장이 대표 선발전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임씨를 다시 기용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인사 조치라며…, 양진방 교수는 세계연맹이 사무차장이던송상근 씨를연맹 정관에도 없는 사무부총장에 임명한 것은 임씨를 복권시키기 위한 위인설관(爲人設官)에 불과하다"며 김 회장의 독단적인 협회운영을 더 이상 좌시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계연맹 이금홍 사무총장이 이번 인사에 반발해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또 대한태권도협회는 대표 선발전 파행 사태로 새로 구성한 이사진 명단을 이중으로 작성해 태권도계의 불신을 사고 있다고 태권도계 학과 교수들은 말했다. 협회는 언론사 및 시·도 협회엔 파행 책임자인 임윤택 전무이사를 제외한 이사진 명단을 보냈으나, 대한체육회엔 임씨가 포함된 이사 명단을 발송했다.
이에 대해 협회 관계자는 "이중 명단이 작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원본을 잃어버려 회장이 두 번 모두 서명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운용은 뒤로 차는 태권도를 왜 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파행적인 인사행정, 비리와 도덕성 문제 등 여론의 비등(沸騰)은 그가 말한 조직 정비 및 제도 개선과는 거리가 멀고 한낱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다.
30년간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국기원연수원, 그리고 WTF 등 태권도의 무소불위와 절대권력의 수장(首長)인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미덕(美德)이란 없는 걸까.
특히 시드니 올림픽 이후 모순과 부정의 의혹이 많은 인사정책으로 태권도 개혁과 발전에 역행하는 처사를 보여주고 있어, 그 주변 핵심 원로(?)들의 무용론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태권도는 결코 어느 소수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씨를 안고있는 태권도계의 혼란과 내홍에서 지도자가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이란 무엇이며 온갖 의혹과 악성루머가 난무하고 있는 태권도계의 심각한 병폐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이를 두고옛 성인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표현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치(理致)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마지막까지 살아 봐야 참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분도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 달랐다. 과연 그가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아무런 조명 없이 묵묵히 혼자의 힘으로 세계 무대에 한국의 혼을 심으며 마침내 신화적인 인물이 된 IOC위원 김운용, 그가 들려주는 세계 이야기 그리고 삶의 이야기, 그의 자전적 에세이를나는 형이상학적인 이 가을에! 다시 읽으며 현실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태권도계의 비리와 비도덕적 행위 등 한계에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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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없는 연구와 연설은 무의미한것 같군요.
한마디 아니 백마디의 말보다도 한번의 보여줄수있는
개혁이 좋지 않을까요....2002-04-1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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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저는 충청대 스포츠외교과 학회장 민수 입니다.저의대학에 계시다 군대갔다 제대하여 복학 했는데 교수님께서 용인대 겸임교수고 가셨군요.축하 드리니다.전 교수님께서 정년퇴임 하신줄 알았는데 오노균교수님께 여쭈어 봤더니,용인대에 계시다고 말씀듣고,또한 태권넷에 연구발표도 왕성하게 하신다는 말씀듣고 교수님 글 찿았어요.연세도 높으신데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시는 교수님 고맙습니다.애들과 다음주 스키가는데 교수님도 오시면 좋겠어요(홍천 리조트)건강하세요 교수님.꾸벅.한번더ㅂ2ㅂ/제자 민수올림
2001-12-0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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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정보는 세계에 근무하는 국제사범 들에게
좋은 정보로 또 태권도의 밑거름이 될겁니다
항상 공정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정도를 지키며
글을 써 주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태권도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많이 실어주세요
감사합니다2001-12-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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