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진정한 태권도인 박철희 선생을 보내고

  


박철희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던 2010년 4월이었다. <태권도타임즈>에서 마련한 박철희 선생 세미나 자리를 통해서였다. 박철희 선생이 누구인가? 바로 태권도 9대도장의 하나인 강덕원의 창설자가 아닌가? 그 박철희 선생으로부터 직접 태권도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취재를 넘어, 직접 선생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워보고 싶어졌다.

인천의 <태권도타임즈> 부설 태권도장에서 있었던 그 세미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세미나 이후에도 박철희 선생의 수업은 매주 토요일 같은 장소에서 있었고, 나는 그날 이후, 지방 출장이 있지 않은 때면 항상 박철희 선생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1년 여의 시간 동안 박철희 선생을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 사진 : 2010년 4월 박철희 선생의 세미나 를 마치고. 품새세계대회 챔피언, 국기원 연구원, 태권도 기자 등과 미국, 태국, 몽골의 태권도인들이 박철희 선생을 중심으로 서있다.)

박철희 선생은 내가 만났을 때 이미 80이 가까운 연로한 나이였다. 귀가 특히 좋지 않았고, 무릎도 불편하셨다. 그 나이의 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지도할 때는 눈빛부터가 달라지셨다. 발차기는 무릎 이상을 차실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지만, 동작을 설명할 때는 발차기도 빼놓지 않으셨었고, 특히 손동작을 시연하실 때는, '젊었을 때의 박철희'가 어떠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매서웠다.

팔순이 다된 나이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태권도를 직접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나는 박철희 선생 말고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실기 수업을 마치고, 식사나 차를 마시면서 태권도의 이론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또 한번 놀라곤 했다.

태권도인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태권도인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깊이 있는 이야기 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만을 통해서가 아닌, 책을 통해 쌓은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선생은 일본어가 편했고, 그 무렵에도 일본문화원을 찾아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계셨었다.

박철희 선생의 제자 중에 소위 '명문대학 출신', '인텔리' 등 배운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박철희 선생이 태권도 기술로도 당대 최고 중 하나였지만, 본인 자체가 학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대표작 <파사권법>이 나온 것이 선생의 20대 때의 일이다.

이렇게 태권도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깊이가 있고 배울 것이 많은 분이었지만,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박철희 선생은 '반면교사'를 보여주는 분이었다.

태권도인 스승, 선배로서는 그 누구보다 존경을 받는 분이었지만, 생활인으로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고인의 누가 되겠기에 자세히 말할 것은 아니지만, 고인은 종종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생활고를 타개할 생각을 하셨고, 그 생각들은 비현실적이었기에 실현될 수 없었다.

선생의 불우한 말년을 나는 제자로서 가까이서 뵈었지만, 도와드릴 수가 없어 안타까워하기만 할 뿐이었다. 국기원의 원로위원회의 한 분으로 들어가실 수 있도록 알아보기도 했지만, 선생은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셨고, 국기원을 비롯한 주류 태권도계와는 거리를 두고 계셨기 때문에 주류 태권도계에서는 박철희 선생을 배척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선생이 택견, 공수도 등 다른 무술들에도 열린 자세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는 점도 배타적인 태권도인들이 박철희 선생을 배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말년의 어려운 박철희 선생을 끝까지 신경을 썼던 분으로 내가 아는 것은 LA 도산체육관의 창설자 김용길 관장, 태권도타임즈 홍상용 대표, 한동대 지승원 박사 등이다. 가족보다 더 선생을 챙겼던 분들이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인천의 병원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다. 산소호흡기가 선생의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곧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선생이 돌아가셨다. 선생의 장례는 선생의 어려웠던 노년에 비하면 외롭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선생의 돌아가시기 전 모습을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을 화장하고 난 유골을 나는 오래 보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게 하얀 뼈로 남은 것은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의 유골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나는 선생의 유골을 오래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망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태권도만이 아니었다. 나는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고작 가벼운 식사 몇 번만을 대접했을 뿐이다. 그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다. 주저리 주저리 선생을 생각하면 이야기들이 자꾸 많아지니, 선생님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고 보내드려야겠다.

"박철희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요"

[글 = 박성진 편집장 | 인사이드 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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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선

    박기자님 기사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현대 태권도사의 주요한 축을 이루셨던 박철희노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6-04-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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