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故 노병직 원로의 태권도 발자취

  

현존하는 태권도 1세대 노병직 원로 9월 9일 미국 자택서 타계, 향년 97세


현존하는 '태권도 1세대' 노병직(盧秉直) 태권도 원로가 9월 9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그는 지난해 9월 4일 태권도원 개원식에서 태권도 진흥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의 삶과 태권도 발자취는 어떠했을까? 태권도 전문기자 서성원 기자가 故 노병직 원로의 지난 발자취를 전한다 [편집자 주]

스무술 일본 유학시절 까까머리의 노병직 원로가
가라테 도복을 입고 기백있게 서 있다.

노병직은 1919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36년 12월, 일본 가라테의 본산인 송도관(松濤館)에 입관해 1944년 귀향할 때까지 가라테를 수련했다.

그는 1939년 일본에서 가라테를 수련할 당시의 빛바랜 사진을 2007년 태권도신문사에 보내 왔다. 그는 이 사진에 대해서 “6.25 동란과 1.4 후퇴 때 피란을 가면서 이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다가 몹시 구겨졌는데, 천만다행으로 가장자리만 구겨져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병직은 청도관 개관자 이원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 일본 유학시절부터 이원국과 알고 지냈던 노병직은 송무관과 청도관 개관 시기를 놓고 인식이 달랐다.

노병직의 증언.

"1955년 청도관 고문 겸 명예관장으로 영입된 최홍희 장군은 고위 장성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을 청도관 고문 또는 이사들로 끌어들여 청도관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국씨가 최 장군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의) 말을 할 수 있느냐 (…) 이원국씨가 1950년 6월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말은 6.25때 북괴의 부역을 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비굴한 잔꾀이다. 이원국씨는 46년부터 50년 6.25동란까지 4년간 당수도계에 있었을 뿐이다. 그 후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국내 태권도계와 관계를 맺지 못했고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과거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언행은 무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마치 협잡꾼이나 일삼는 작태라고 생각한다."

노병직은 1944년 3월 개성 동흥동에 송무관을 개관했다. 송무관이라 이름붙인 이유는, 소나무(松)는 상록수로 사계절 언제나 푸르고 젊음과 삶의 생기 및 약동을 뜻했고,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 유학시절 가라테를 전수받았던 송도관(松濤館)의 ‘송(松)’자를 차용했다.

이원국도 노병직처럼 일본 유학시절 후나코시 기친의 송도관(松濤館)에서 가라테를 배웠다. 청도관의 ‘도(濤)’는 송도관 ‘도(濤)’의 영향을 받았다.

노병직은 기자가 1998년 8월부터 9월까지 <태권도신문>에 연재한 ‘태권도 현대사 산증인 인물전 - 이원국 편’을 읽고 자신과 이원국과의 관계, 송무관 개관을 둘러싼 비화 등을 편지로 밝혀왔다. 다음은 주요 내용.

"나는 일본 유학을 목적으로 1936년 3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동경에서 유학을 하면서 일본 공수도의 시조 송도관(松濤館)에 입관, 후나코시 기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학교방학이 되면 고향인 개성에 와서 일제에 억눌려서 힘을 잃고 기를 펴지 못하며 살고 있는 내 친구와 후배들에게 공수도를 가르쳐주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1944년 2월에 완전히 고향에 돌아온 나는 친구들과 후배들이 찾아와 도장을 차리고 공수도를 가르쳐 달라는 간청에 용기를 내고 도장을 차릴만한 장소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 개성시 중앙부에 있는 자남동 소재 관덕정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아 그 곳에 도장을 차리기로 했다.

그 후 관할청을 찾아가 아래와 같은 내용의 허가원(許可願)을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 1944년 3월 20일 송무관을 창설했다. 허가원의 내용은 ▷단체명=공수도 송무관 ▷장소=개성시 자남동 관덕정 구(舊) 정자건물 ▷지도사범=노병직 ▷교습명=일본 공수도(가라테) ▷교습시간=매일 아침 6시부터 2시간이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치열해짐에 따라 일제의 법은 한국인 5인 이상이 집합을 하게 되면 반드시 경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되는 삼엄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일본 가라테를 가르치겠다고 하니까 관할경찰당국은 허가는 무난히 해 주었다.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관덕정에서 가라테를 가르칠 때는 10여 명 정도의 개인교습 규모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하자 일제는 우리 청장년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공수도를 배우러 나오는 사람은 점점 없어지게 됐다."

노병직은 1944년 3월 송무관을 창설하고 교습을 중단했다가 1946년 5월 송무관을 재발족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에는 창립 1주년 창립대회를 송도대강당에서 개최한다고 되어 있어 대외적인 송무관의 공식적인 개관은 1947년 11월 경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허인욱(2008). 관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 한국학술정보(주). 57쪽.]


[▲ 사진설명 = 1963년 대한태수도협회 시절, 한국 대표선수들이 일본 공수도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하러 가지 전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뒷줄 왼쪽 두 번째가 당시 감독이었던 노병직 원로. 앞줄 첫번째에 앉아 있는 이승완 현재 대한태권도협회 상임고문이 이채롭다. 사진=조점선]

송무관은 해방 이후 재개관을 하면서 명칭을 ‘공수도’에서 ‘당수도 송무관’으로 바꾸었다. 송무관의 관훈은 예의존중‧극기겸양‧부단노력‧최웅만부‧문성겸전 등이라고 되어 있으나 관훈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당시 송무관과 청도관은 무술 교류가 활발했다.

노병직의 후일담.

"(해방 후) 내가 개성에 도장을 차리겠다고 해서 이원국씨가 제자인 손덕성씨와 남태희씨와 같이 개성을 방문했고, 개관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송무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이원국씨의 말은 거짓말이다. 당시 그들이 개성을 방문한 것은 송무관과 청도관간의 교류 시범 차 왔던 것이다. 그 이전에도 현종명, 민운식, 최기용, 한인숙, 유응준 등 여러 청도관원들이 제각각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성에 와서 나에게 당수도 기술을 배워가곤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원국씨는 개성에 다녀간 제자들, 즉 청도관 관원들을 나무랐다고 한다. 또한 송무관은 44년 3월 일제시대 때 이미 사용한 이름이기 때문에 해방 후 이원국씨가 지어줬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개성이 북한 영토로 편입되면서 송무관은 서울과 인천을 근거지로 지관을 확장해 나갔다. 그 시기 노병직은 이원국이 일본으로 도피해 청도관을 청도관 출신들과 힘을 합쳐 재건하는데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

"서울로 환도한 후 어느 날 청도관 현종명, 민운식 등 관원들이 나를 찾아와 시천교당에서 그 전과 같이 당수도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해 나는 시천교당 관리인 김기성씨를 만나 이야기를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6.25때 김기성씨가 이원국씨로부터 받은 피해와 감정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김기성씨가 이미 다른 단체들과 임대차 계약을 맺어 계약한 단체에서 시천교당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종로경찰서에서는 6.25 남침 때 시천교당은 ‘빨갱이 소굴’이라며 감시의 눈초리가 따가웠었다. 나는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어서) 시천교당을 사용하고 있는 단체들과 타협을 하는 한편 관리인 김기성씨에게 애원도 하고 종로경찰서에 가서 언쟁을 하는 등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은 끝에 간신히 시천교당을 사용할 수 있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53년 11월 중순경 청도관을 재건하고 틈틈이 관원들을 지도해 줬다. 또 관의 체계를 세워준 다음 손덕성, 현종명, 민운식씨 등에게 청도관을 운영하도록 지시하고 54년 11월 청도관을 물러났다. 그 때 엄운규와 남태희씨는 육군에 복무 중이었다. 내가 만약 청도관을 재건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청도관이 발전하는데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노병직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엄운규(청도관 3대 관장)은 "대부분 사실과 맞지 않는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엄운규는 지난 7월 "노병직 관장이 이원국 관장의 부탁으로 청도관 관원들에게 무술을 지도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가끔 동작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했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며 "이원국 관장보다 나이가 적었던 노병직 관장은 취직을 하지 못해 청도관에 가끔 와서 조교 노릇을 했지만 그에게 대련과 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나보다 1년 선배였던 손덕성 관장은 노병직 관장과 연배가 비슷해 평소 “야, 병직아”라고 부르는 등 우습게 대하곤 했다. 그런 손덕성 관장이 노병직 관장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1950년대 중반 대한공수도협회와 1960년대 초 대한태수도협회 창립에 참여한 노병직은 1963년 12월, 한국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본 공수도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하러 일본을 방문할 때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1966년 최홍희의 뒤를 이어 1년 동안 제4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수했했다. 그 때 제1회 대통령하사기 태권도대회를 창설했다.

그 후 국제태권도연맹(ITF) 부총재로 활동했다. ITF 총재였던 최홍희는 그를 ‘개성 깍쟁이’라며 이렇게 조롱했다.

"내가 그를 한국 태권도계의 일인자로 내세우는데도 누구도 그에게 관심조차 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음식 먹는법 등 외국 생활 양식이나 에티켓까지도 새로 배워야 했으니 자연 대인접촉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장내는 한 시간 이상이나 그(노병직)를 찾느라고 떠들썩했다. 다행이 최 사범이 와서 노 관장을 찾았다는 보고를 해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최 사범은 “노 관장님이 혼자 화장실에 앉아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 관장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너무도 무지한 나 자신을 한탄해서 일세’라고 합니다." [최홍희(1998). 태권도와 나2. 도서출판 다움. 165∼166쪽.]

198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주로 이민을 간 노병직은 1992년 12월 제자 강원식의 요청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주최한 제1회 태권도한마당 개회식에서 고수(高手) 품새 시연을 했다.





[글. 무카스미디어 객원 칼럼리스트 = 서성원 기자 | 태권저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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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어떻게 노병직 원로를 폄하하는 글입니까? 고인의 주장과 증언을 충분히 글에 반영했고, 이에 대한 엄운규 원로의 주장을 덧붙인 것입니다. 고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현대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엄 원로를 편들고 바른 원로라고 두둔하지도 않았습니다. 글의 맥락을 제대로 읽고 비판하세요. 서성원

    2015-09-1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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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도인

    서기자님께서 엄운규 원로님의 의견을 수렴하여 글을 쓴건 알고 있습니다만, 한쪽의 의견만으로 이렇게 비하하는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엄원로님만 바른 어른이 아닐거라는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비판을 하고자 하신다면 미국으로 가셔서 인터뷰를 하고 오시는게 맞지 않을까요? 또한 두분다 연세가 있으신데 무슨말을 하던 말로는 확인이 힘듭니다. 참고가 될뿐이지요. 이러한 글은 고인에게 실례입니다. 이종우 원로님 돌아가셨을때도 이러한 글을 쓰신적 있으신지? 태권도 언론 전부 복사라도 한듯이 찬양일색이던데요.

    게다가 장례방법도 그렇습니다. 누구는 기관과 정부에서 나서서 진행을 하고 누구는 기사 한 줄 쓰면서 아무런 논의도 없는 것을 보면 언론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2015-09-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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