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하늘이 낸 파락호-양천봉

  


양천봉(梁天奉)은 조선 후기 사람인 담정(潭庭) 김려(金鑢, 1766~1821)의 시집 '사유악부(思惟樂府)'에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사유악부'는 김려가 1801년 12월 보름날에 쓴 시이다. 김려는 열 다섯 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강이천(姜彛天, 1768~1801), 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 이옥(李鈺, 1760~1812) 등과 어울렸는데, 이들과 함께 정통 고문에서 벗어나 시정의 세태를 백성들의 상말을 써서 표현하는 ‘패사소품’ 문체를 익혔다. 32살이 되던 1797년에 강이천의 유언비어 사건에 휘말려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갔다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해 다시 진해로 유배되었다. 진해에 있는 동안 부령시절의 유배생활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이 시집에는 부령에 사는 다양한 인물들을 소재로 하여 시를 썼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양천봉이다.

김려는 시 꼬리말에 양천봉에 대해 평가하는 주를 달아놨는데, “기위(騎衛)의 이름은 천봉으로, 파락호(破落戶)이다. 청나라 상인 백여 명을 허고원(虛古院) 길 위에서 때려눕혔다. 허고원은 부령(富寧) 북쪽에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파락호는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만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등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한당들이다. 따라서 양천봉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려의 시를 보자.

그대 무엇을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라네.
하늘이 낸 건달 양 기위
소년 시절에 그 집안이 굉장히 부자였네.
저포((樗蒲)놀이 한 판에 삼백 꿰미 돈 던지고
팔찌에는 날쌘 매가, 마구간에는 준마가 있었지.
명천(明川) 고을 기생의 서방 노릇도 했는데
이팔청춘에다 이마가 매미 같은 여인이었지
지금은 다 털어먹고 말 거간꾼 되었는데
주먹질 발길질 그 솜씨가 대단해라
허고원 길가에서 사람들 때려눕힌 뒤에
북쪽으로 석 달이나 발길 끊었지.

시를 보면, 양천봉은 어렸을 적엔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놀음을 좋아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김려는 양천봉이 저포놀이 즉, 윷놀이 한 판에 삼 백 꿰미의 돈을 날린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꿰미는 엽전 100전 즉 한 냥을 말한다. 한 번에 300냥의 돈을 도박비용으로 사용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그와 관련해 매와 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 매사냥을 하고 말을 키울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양천봉)

하지만 재산의 많고 적음이 사람의 품성이 고매하다거나 우매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듯이, 그도 재산은 많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인품은 지니고 있지 못했던 듯 하다. 오죽했으면 김려가 그저 파락호라 하지 않고 양천봉을 하늘이 낸 파락호라고 언급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집안에서 내 놓은 망나니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는 많은 돈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팔청춘 즉, 16살의 나이에 이마가 매미 같이 고운 명천 고을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몰락한 뒤의 일일 것이다. 명천은 함경도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어를 말하는 명태(明太)라는 이름은 명천에 사는 태(太)서방이 처음 발견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박과 여자를 가까이 하는 방탕한 생활은 양천봉의 많던 재산을 모두 소진하게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돌 봐주는 부모가 죽고 형제들이 멀리하면서 결국 말 거간꾼이 되어 밥벌이를 하며 살아갈 정도로 몰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청나라 상인 백여 명을 부령 북쪽의 허고원 길 위에서 때려눕힌 일도 그런 파락호 노릇의 하나였을 것이다. 후환이 두려워서 북쪽 어느 곳으로 3개월 정도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청의 상인 100여 명을 때려눕힐 정도로 무예에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상인들이란 많은 돈이 걸려있는 직업이므로 도적이나 산적들로부터 보호를 위해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녔을 것이고, 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호신을 할 수 있는 능력들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때려 눕혔다고 하니, 그의 솜씨는 대단했던 듯하다. 양천봉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김려도 주먹질 발길질 솜씨가 대단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시 양천봉은 하급무관직인 기위의 직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별기위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기위는 조선 후기 함경도에 설치했던 기병부대(騎兵部隊)로 숙종 10년(1684)에 국경 지대인 함경도의 변방을 지키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가 뛰어나고 및 용력(勇力)이 있는 자 600인을 선발해 친기위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병제에는 숙종 10년에 임금이 명을 내려 함경남북 양도에서 힘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가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친기위(親騎衛)를 설치하였는데, 각각 3백 60명을 두어 위급할 때에 쓰게 하였다. 그 후에 군사를 더 뽑아서 감영과 병영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모두 3천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기위병은 매년 음력 2월과 5월․8월․11월인 4중월(四仲月)에 날짜를 정해 각기 소속 영문에서 그 재주와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과목은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편추(鞭芻)의 4기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양천봉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사유악부'가 저술된 시기는 1790년에 '무예도보통지'가 편찬이 된 이후이며, 양천봉이 하급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무관직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 그 중에서도 특히 권법에도 능한 무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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