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太極拳), 그 창시자가 궁금하다

  

[진영섭의 태극권 이야기 2편]태극권의 유래


진왕정과 장발. 뒤에 큰칼을 들고 서있는 것이 장발이라고 한다(진소왕태극권 발췌)


“이제는 되었느냐?” 장삼봉 진인이 장무기에게 묻는다.
“아직 칠할이 기억납니다”
잠시 후 “이제는 어떠하냐?” 장진인이 묻자 장무기가 답한다. “이제 절반을 잊었습니다” 또 잠시가 지난 후에 장삼봉이 또 묻자 장무기는 “아직 삼할이 남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청익복왕 위일소 등은 근심이 태산이다. 강적이 눈앞에 있는데 장삼봉 진인은 중상을 입었고 교주 장무기는 금방 적이 뻔히 바라보는 앞에서 배운 태극권과 태극검을 배운 것도 모자라 이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잊어먹고 있다고 하니 원의 군주 조민과 그 수하의 절대고수 현명이로를 필두로 하는 일류고수 수십인에 이르는 강적을 어찌 대적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조민 등은 가소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삼봉과 장무기의 대화는 한 술 더 뜬다. 장무기가 돌연 외친다. “이제는 완전히 잊었습니다!” 장삼봉이 화답한다. “좋다! 아주 좋아! 이제는 무당의 태극권으로 적을 물리치거라!”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 의하면 태극권은 무당파의 장삼봉 진인이 만년에 창시한 걸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무협 독자들도 이 영향을 받아 태극권은 무당파의 장삼봉 진인이 창시한 걸로 아는 분들이 적지 않다.

태극권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김용의 소설대로 정말 장삼봉 진인이 태극권을 창시한 것이 맞을까? 장삼봉 진인이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은 언제 어떻게 출현하였을까? 무당산 도인 장삼봉은 과연 실존 인물일까 가공의 인물일까?

장삼봉 도인이 실존 인물인 점은 맞는 걸로 보인다. 명사 방기전에 “당시의 황제인 영락제가 장삼봉 진인을 현자의 예우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숨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연령이 120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정사(正史)에 나오는 유일한 기록이다. 장삼봉이 무술을 하였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무당산지등을 통틀어 보아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장삼봉을 무술과 최초로 연결시킨 사람은 명말청초의 대학자인 황종희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아들 황백가의 무술 스승인 왕정남을 위해 쓴 묘지명에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하였다. 즉 소림과 무당을 대비하여 외래의 불교 사상에 기반한 수입무술과 국산인 전통 도가사상에 기반한 전통무술로 구분하여 각각 외가권과 내가권으로 구분하였다.

대학자의 붓은 역시 무게감이 다른가보다. 별로 길지도 않은 몇 줄의 글로 소림파와 무당파, 외가권과 내가권을 적시하여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말이다. 아들인 황백가는 또 《왕정남선생전》을 저술하여 명말청초에 현재의 절강성 지역에서 성행하던 내가권의 원리 구결과 사승계보 등을 밝히었다. 이들 부자가 말하는 내가권의 창시자인 무당산 도인 장삼봉은 명사에 나오는 장삼봉과 공통점이 있으니 황제가 특별히 불렀는데 응하지 않고 숨었다는 것이다.


내가권을 창시하였다는 장삼봉은 북송의 휘종(徽宗 : 재위기간 1110∼1125) 황제가 불렀으며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이 있는 장삼봉은 명의 성조 영락제(永樂帝 : 재위기간 1402∼1424)가 불렀다고 한다.

북송 장삼봉의 권술은 백년 후에 섬서성 사람 왕종이 가장 뛰어났고 온주 사람 진주동이 왕종에게 배웠다고 한다. 진주동은 명(明) 홍치(弘治 : 1488~1505) 연간의 사람으로 《왕종선생전》을 지었다고도 하는데 동문으로 장발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또 명 가정(嘉靖: 1522∼1566) 연간에는 장송계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여기부터 내가권의 계보를 단선으로만 살펴보면 장송계 -- 엽계미 -- 단사남-- 왕정남(王征南) -- 황백가로 이어진다. 황종희가 왕정남묘지명을 쓴 연대가 청의 강희(康熙 : 1662∼1722) 연간 초반부라고 한다. 이 시기는 태극권의 창시자로 알려진 진가구의 구세조 진왕정이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무술과 장삼봉을 처음 연결한 사람이 황종희라면 태극권과 장삼봉을 처음 연결한 사람은 무우양의 큰 제자이며 처조카인 이역여이다. 이역여는 내가권의 왕종과 《태극권론》의 저자로 알려진 왕종악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자신이 쓴 《태극권소서》에서 태극권을 장삼봉이 창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가 당시에 건재해 있던 양로선과 무우양의 질의를 받고 자신이 생각해도 근거가 없다고 여겨서인지 《태극권소서》 최종 원고에서는 “태극권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태극권의 장삼봉 창시설을 가장 먼저 주장하였다가 스스로 철회한 셈이다.

또 한 사람, 태극권을 진가구에 전해 주었다고 하는 왕종의 제자인 장발이 문제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장발이 진왕정에게 전해주었다는 설과 14대인 진장흥에게 전해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시대적으로 약 200년에서 300년 정도의 시간차가 나는 문제가 있다.

진가구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진왕정과 동 시대 사람으로 인근 마을 사람인 장파십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장발이라는 설도 있으나 알 수 없다. 다만 장파십은 무예의 공부가 무척 출중하여 말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진왕정보다 상수라고 하기도 한다.

장삼봉이 태극권을 창시하였다고 하는 설에서 명나라의 왕종(王宗) 즉 내가권의 왕종과 태극권론의 저자로 알려진 왕종악을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왕종은 명 홍치(弘治 : 1488~1505) 연간보다 이전의 사람이고 왕종악은 청 건륭(乾隆 : 1736~1795) 연간 후반의 사람이니 역시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장발이 왕종악의 제자라는 것 역시 시대의 선후가 뒤바뀌었다.


온현 조보진에서 주장하는 사승계보는 아래와 같다.

양씨태극권 창시자 양로선

장삼봉의 공부를 이은 왕종악이 장발에게 전수하여 조보태극권의 제1대가 되고 이하 순서대로 2대 형희회, 3대 장초신, 4대 진경백과 왕백청, 5대 장종우, 6대 장언, 7대 진청평으로 전승되어 다시 화조원이 8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보태극권 쪽에서는 태극권의 창작권을 호북성 무당산에 넘기려 한 괘씸죄가 적용되어 하남성 온현 정부에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여 거의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겨우 화식태극권이란 명칭으로 명맥만 근근히 잇고 있는 중이다. 독자 여러분이 하남성의 성장 혹은 온현의 현장이라도 태극권의 창작권을 다른 성에 넘겨준다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현재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국가체육위원회 산하의 중국무술협회는 하남성 온현 진가구를 태극권의 발상지로 공식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산에는 신선 도사가 있어서 도술을 부리고 무술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다. 중국 사람도 아마 이런 것을 좋아한 것 같으며 태극권 같은 무술을 이런 신선 도인이 창시하였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혹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여러분이라면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과학적 학문적으로 입증된 설만 믿겠는가? 아니면 신선 도사의 낭만에 젖겠는가?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이 선택은 진정한 태극권을 할 것인가 혹은 대충 건강태극권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는 별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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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장삼봉과 진가구 사이에서 마구 헷갈렸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9-01-1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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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당파야

    무당산에서 내려와서 태극권 배워간거 맞단다...아가야...

    2008-10-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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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당파

    무당산에 무당파가 엄연히 현존하며, 또한 무당산의 태극권도 여전히 전해오거늘, 이는 무당산이 태극권의 본산지라는 점을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근거이다.

    설마하니, 무당산에서 진가구로 내려와 태극권을 배워갔다는 얘기를 하지는 않겠지......

    2008-07-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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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소룡만만세

    무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무술의 유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지 않나요?
    아닌가용? ㅎ;;
    자기가 매일마다 하는 무술이 처음엔 어디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만약 자기가 맨날마다 땀흘려하는 그 무술의 유래가 안궁금하다면 그게 더 비정상일거 같은데요? 그런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호기심일것 같은데 ㅇ0ㅇ

    2008-06-1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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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중양

    또 소림권 조차도 달마대사와는 상관없고 군사용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지만 소림권의 단련법 중에는 근육의 쓰임이 하타요가와 매우 유사한점도 많은게 사실이다. 물론 몸을 준비하는 단련에서 비슷하단 소리다. 그러므로 너무 전설이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무조건 무시하는 경향도 잘못된것이라 생각된다.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면 어떤것이 옳은것이다라고 한가지를 정하는것보다는 모르면 그냥 이런저런 학설이 있음을 인정하고 해당 무술 연마나 열심이 하는게 더 유익하다.

    2008-06-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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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중양

    요즘은 너무 전설이나 설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시대를 명.청으로 단정 지어버린다. 그렇게 하면 꾀나 과학적인 척 할수있다. 하지만 그것도 옳다고 증명 할 수단은 없다. 그냥 이런 학설도 있고 저런 학설도 있으니 태극권을 열심이 연마하자 이런 취지로 끝났으면 한다.

    2008-06-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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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호무술

    글쎄, 고증과 사료에 대한 자료와 이해가 부족하여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술의 창시자를 찾고 고증하는 과정은 중국무술의 특징 중 하나 인것 같다. 정체성을 먼저 찾고 정통성을 이어 찾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 있다. 경호무술은 창시자 장명진선생이 직접 정형화된 무술을 책으로 집대성하여 체계화 하였는데 이러한 문헌이 차후 수십년 수백년 후에 고증 될 수 있는 명확한 자료로 보존 되고 그 원형도 보존 되어 후세에 남겨 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8-06-0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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