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 최고수, 무우양(武禹襄)과 양로선(楊露禪)

  

[진영섭의 태극권 이야기 1편]무씨태극권과 양씨태극권


태극권의 역사와 계보를 따져보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옵니다. 긴 역사는 둘째 치고 태극권의 종류와 인물물 계보를 보면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이는 태극권을 모르는 사람은 물론 태극권 수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무카스>에서 어렵고 지루 할 수 있는 태극권 이야기를 알기 쉽고 재밌게 알려주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밝은빛연구소 진영섭 소장이 총 10회에 걸쳐 태극권의 역사와 숨겨진 비화 그리고 태극권 고수들의 이야기 등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진영섭 밝은빛연구소 소장

무우양(武禹襄)은 하북성 영년현의 호족인 무씨 가문의 사람으로 삼형제 중의 셋째이다. 이름이 하청(河淸)이고 자(字)가 우양(禹襄)으로 1812년에 태어나 1880년에 서거하였다.

큰형인 무징청(武澄淸: 1800~1884)과 무여청(武汝淸)과 함께 무술을 매우 좋아하였고 양씨태극권의 창시자로 불리는 양로선(楊露禪 : 1799~1872)과 동향 사람으로 관계가 매우 돈독하였다.

양로선이 능히 북경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무여청의 천거에 힘입은 바 크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하여 무씨태극권과 양씨태극권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우양의 제자이자 처조카인 이역여가 쓴 《태극권소서(太極拳小序)》에 의하면 ‘무우양은 가전의 무술을 하다가 온현 진가구에서 배우고 돌아온 양로선에게 태극권을 배웠으나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여 직접 온현으로 가서 진청평에게 소가를 배우고 진씨태극권에 정통하였으며 다시 왕종악이 썼다고 하는 태극권론을 깊이 연구하여 스스로 새로운 태극권을 창시하였으니 그것이 무씨태극권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양로선과 무우양 두 사람은 태극권을 배우고 가르친 사이이지만 서로간의 경쟁심도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씨(武氏) 계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자료에 의하면 양로선과 무우양은 모두 세 번에 걸쳐 기량을 겨룬 것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이 관련된 것을 간단하게 추리면 아래와 같다.

1811年 - 양로선이 징청의 아버지 무열(武烈)에게 홍권(紅拳)을 배우다.
1822年 - 징청(澄淸)과 하청(河淸)이 양로선과 겨루어서 이기다.
1826年 - 양로선이 진장흥(陳長興)에게 태극권을 배우다
1838年 - 양로선 진장흥에게 다시 가다.
1842年 - 양로선 고향인 영년(永年)으로 돌아오다
1843年 - 양로선 공개적으로 태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1845年 - 무하청(武河淸)과 양로선(楊露禪)이 겨루어 양로선이 이기다.
1852年 - 무하청은 양로선과 겨루어 진후 진청평(陳淸萍)에게 배우다.
1854年 - 무하청 생질인 이역여,이계헌에게 진청평에게 배운 권보와 권론을 전하다.
양로선은 무여청(武汝淸)의 소개로 단왕부(段王府)에서 태극권을 가르치다.
1856年 - 무하청과 양로선이 겨루어 무하청(武河淸)이 이기다.


무우양 즉 무하청과 양로선은 당대에 이처럼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며 여러 대에 걸친 관계가 두터웠다고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양로선은 진가구에서 종살이를 할 정도로 가정이 빈한하였으며 글공부를 하지 못하여 거의 문맹에 가까웠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무씨 집안은 영년현의 호족으로 삼형제가 모두 출중한 재능을 나타내었다. 첫째인 무징청은 1834년에 진사(進士) 급제를 하였고 둘째인 무여청은 1840년에 진사 급제를 하였다.

무하청은 과거에 뜻이 없어 현시에서 수재 급제만 하였으며 무술 연구를 하는 이외에 만년에는 작은 서당을 열고 집안의 자제 및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낙을 즐겼다고 한다. 양로선은 글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평생 마음에 두고 있었고 이로 인해 둘째 아들인 양반후를 무우양의 서당에 보내어 글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양로선의 둘째 아들인 옥은 자(字)가 반후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양로선이 반후가 글공부에 자질이 있는지를 묻자 무우양은 “글공부에는 별로 총명하지 못한 것 같고 권을 수련함에는 매우 오성이 뛰어나다”고 답변하였다. 그래서 양로선은 무우양에게 권을 많이 지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런 연유로 반후의 기량은 무우양에게 배워 얻은 것이 많다고 한다.

양로선이 진씨에게서 배운 것은 노가로 자세가 크다. 양씨가 전하는 태극권에 대가와 소가의 구별이 있는 것은 반후가 무우양에게서 배운 것으로써 가식을 긴주한 까닭이라고 한다.

무우양과 양반후에 관한 일화가 영년(永年)은 물론 북경에 회자되고 있다. 무우양이 일찍이 현성의 보수를 감독한 적이 있다. 순시를 하고 있는데 양반후가 도성에서 돌아오다가 성(城)에 가까이 와서 무우양을 보고 멀리서 인사를 하였다.

무우양이 물었다. “헤어진 사이에 기량이 많이 늘었느냐? 내가 너를 칠 터이니 네가 응대를 해보거라.” 그래서 치는 세를 잡고 반후도 세를 잡아 응대를 하였다. 무우양이 보기에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 번을 시험하였는데 모두 무우양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였다.

반후가 의심하여 믿지를 않았다. 무우양이 그래서 말하기를 “내 집으로 가거라. 내가 바로 돌아가서 증험을 해보이지 않으면 네가 믿지를 않을게야.” 집에 돌아와서 반후와 시험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반후가 세 번을 공격하였는데 무우양은 (양반후를) 세 번을 처박고 나서야 왜 그러한지를 말해 주자 반후가 크게 감복하였다.

반후는 성격이 강직한데다 교만하고 급하여 남에게 한마디도 양보하는 법이 없었는데 오직 무우양의 태극권에 대해서는 평생토록 흠모하고 탄복하였다. 양반후가 무우양에게 배운 태극권은 후일 양씨태극권의 소가가 되고 다시 전우와 그 아들인 오감천에 의해 오씨태극권으로 발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내용은 당호와 고류형이 공저한 《太極拳硏究ㆍ淸 武禹襄傳》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중국무술협회 과연부의 강과무 처장(에 의해서도 고증이 된 내용이다.

진영섭 밝은빛연구소 소장 약력


학력
- 고려대학교 중국어문학과 졸업
- 대만대학교중문연구소 석사과정 졸업
- 대만문화대학교 중문연구소 박사과정 수료

경력
-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찬위원
- 전 사단법인 한국현대중국연구소 연구원
- 전 원광대학교 동서보완의학대학원 건강증진학과 겸임교수
- 현 밝은빛연구소 소장
- 현 대한우슈태극권연맹 실무 및 학술 상임이사
- 현 도서출판 밝은빛 대표

태극권 수련경력
- 웅위태극도인, 진소왕 노사 배사 입문 제자
- 양가, 진가 등 태극권 수련경력 20년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영섭 #태극권 #밝은빛 #무우양 #양로선 #칼럼 #진씨태극권 #양씨태극권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
  • 태극

    또한 당호라는 사람의 태극권 고증은 그 내용이 무당산의 무당파는 물론 태극권의 여러문파들에서 인정되지 않는 것인데, 마치 그것이 태극권계에서 검증되고 인정된 것처럼 내새운 것으로 보아, 이 글은 그 근거가 매우 박약하며, 글쓴이가 진소왕 노사 배사제자라 하시는데, 다른 문파의 창시자에 대해 이런 부족한 비난을 하는 것은 그 인격이 매우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진소왕 노사가 자신의 이름을 파는 제자가 이런 글을 미디어를 이용해 유포하는 걸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네요.

    2008-07-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태극

    아마도 양가태극권에 열등감이라도 있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태극권 역사에 길이 남는 대종사가 된 양로선 종사에 대하여, "무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자료"라는 매우 불분명한 자료를 가지고 헐뜯는데, 글의 논지가 너무 비열한 거 아닌가요?

    2008-07-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이연걸

    태극권도 무술이나? 우리나라 궁중무술이 최고지,이런기사 내보내지마마맘,

    2008-05-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