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영화속에 나타난 무도정신 읽어보기
발행일자 : 2005-09-08 00:00:00
구 희 성 (서남대학교 사회체육과 교수)


무술영화 상업성을 노린 흥행과 재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희성 교수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로서 영상문화가 갖는 위치와 그 기능은 해가 바뀔수록 그 속도감만큼이나 우리를 압도해 가고 있다. 대중문화로서 영상문화는 현대인의 여가생활뿐만 아니라 문화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또한 사회적, 교육적으로 큰 영향을 초래하고 있어 이에 대한 영향과 파괴력은 심히 크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영상문화는우리나라에서도 무술을 소재로 한 영화 ‘돌려차기’ ‘클레멘타인’ ‘바람의 파이터’ ‘역도산’ 등이 이미 상영되었으며 ‘거칠 마루’, ‘무림고수’ 등의 무술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무술영화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아슬아슬한 격투 장면의 등장으로 많은 관객을 동원시키고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가 무술영화 속에서 눈여겨 볼 것은 대중에게 전달되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작자는 근래 상영 되었던 영화 바람의 파이터 무술영화 속에서 무도정신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한다. 따라서 무술영화에 대한 이해와 무도인에 대한 인식, 그리고 현대스포츠로서 무도가 갖는 기능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무술 영화가 상업성을 노린 흥행과 재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함유가 영화의 작품성이나 흥행 성을 살릴 수 있으며, 진정한 사회성을 담은 메시지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각인시켜줄 것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正義)란 명제는 옛날부터 무수한 논쟁을 낳았는데, 동양의 노자나 장자, 서양의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이 영화는 은연중 민족적 우월성과 열등성, 정의와 힘의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범수는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여기에서 범수가 최배달에게 말한 힘없는 정의는 민족적 고통을 받는 아픈 현실 속에서 강자에 의한 논리가 얼마만큼 폭력을 수반하여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폭력 앞에 무능한 현실을 개탄하는 말이다. 따라서 힘이 있다고 그것을 남용하는 자는 폭력배일 뿐이며, 실행하지 못하고 정의만을 부르짖는 자는 겁쟁이일 뿐이다. 이 두 가지를 떨쳐버리고 武의 길만을 걷는 자, 그것이 진정한 무인이다. 정의 없는 힘, 또는 권력은 하나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무도인에 있어 무도란 단순한 힘 또는 권력이 아닌 정의까지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도정신은 곧 정의를 실현하는 사상이다. 무도는 상대방을 공명정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 머슴 범수가 최배달에게 태껸을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주먹을 쥐고서는 친구도 이 땅도 하늘도 가질 수 없습니다. 두 주먹을 쫙 펴는 순간 도련님은 온 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먹을 쥔다는 것은 포용을 거부하며 폭력을 의미하며, 땅도 하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은정의롭지 못한 자, 즉 덕(德)이 없는 이기주의자를 말한다. 주먹을 쫙 펴서 온 세상을 취하는 것은 폭력을 넘어선 포용과 관용의 덕을 가진 정의로운 사람을 의미한다. 온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비워야 한다. 몸과 마음을 비우면 살아온 관념(觀念)과 관습(慣習)을 버린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이기심이 버려지며 ‘나’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게 된다. 개체의 작은 틀과 관념의 껍질을 깨고 주위와 더 나아가 ‘우리 모두’를 위해 사는 것, 그리하여 더불어 사는 상생(相生)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삶이란 “두 주먹을 짝 펴서 ”포용과 관용의 덕을 갖추고 상생하는 철학적 의미의 삶이 진정한 삶이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
이 영화에서 주인공 최배달은 입산수련의 과정에서 산을 내려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세웠던 목표를 포기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쪽 눈썹이 다 자라면 나머지 한쪽을 밀고, 나머지 한쪽이 다시 자라면 다른 한쪽 눈썹을 밀었다. 창피해서라도 산에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완전히 고립시켰던 것이다. 최후의 강자가 되기 위해서 처절한 수련을 통해 자기 극기를 수행한 것이다. 극기란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남을 이기기는 쉽다. 하지만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인내와 도전이 뒤따른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노자는 도덕경에서 “승인자유력 자승자강”(勝人者有力 自勝自强)이라 하며 “남을 이기는 자는 그 자보다 다소 힘이 있는 자일뿐이다.” 라고 하였다. 진정한 승자는 곧 자기를 극복한 자를 이른 말이다. 최배달이 수련을 끝내고 산을 내려와 강자를 찾아 도전장을 내는 장면의 대화를 통해 그 같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최배달 : 이곳 전통 깊은 훌륭한 도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겨룰 기회를 주십시오.
사타니다 : 도장 방침으로 외부인과의 시합은 금하고 있다.
최배달 : 부탁드리는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최배달의 죽어도 좋다는 말은 생사를 건 자기극복의 도전장이다. 도장 깨기 결투 세계에서 강한 적수를 만나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 시기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으로 죽음을 간단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미화되고 있다. 목숨을 건 대결에서 이겨서 자신의 무술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 이전에 자기 자신의 극복을 통해 승화하고자 한 무인의 사생관(死生觀)이다. 이러한 욕망은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 무술의 경지를 실험하고자 강자를 찾아 나서는 무인의 욕망이며, 이 욕망은 곧,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즉 한 욕망이 채워지자마자 다른 욕망이 서둘러서 다시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구멍 난 물통처럼 계속해서 채우는데도 여전히 비어 있는 물통과 같이 욕망은 끝이 없다. 이러한 욕망에 대해 스피노자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이성의 통제로서 절제가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제와 욕망사이를 넘나들기 마련이다. 무도인은 무도의 수련을 통해 화(和)룰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인 폭력적 욕망을 이성적 행위로 승화시키는 문화와 철학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이 영화에서처럼 무술도장을 운영하는 고수(高手)에게 도전장이 오고 간다. 한 사례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쿵푸도장인 정무문(精武問)이 있다. 무림 고수 홍가권의 대가인 필서신(畢庶信)이라는 관장이다. 황비홍(黃飛鴻)→임세영→장극치→필서신으로 이어지는 황비홍의 4代 제자인 필관장은 유일한 화교 출신의 현역 무술 지도자이다. 그가 말한 예를 살펴보기로 한다.
“저녁 무렵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다른 도장의 사범들이 찾아와 정식 대련을 신청하는 경우가 잦았죠. 도장운영을 계속하려면 내키지 않아도 도전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사생결단은 아이더라도 제법 위협을 느낄 만한 결투가 벌어졌습니다. 대결에서 지면 자존심 때문에 공생하기가 어려워 패자는 다음날 도장 현판을 들고 찾아와 「내 도장을 인수하라」는 말을 남긴 뒤 조용히 떠나갑니다.”
이처럼 이기되 천박하게 승리를 얻지 아니하며 패하더라도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무도인의 무도정신이다. 이러한 승화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무도인은 수련과 도전이라는 자기 한계의 극복과 과제가 끝없는 욕망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스포츠가 갖는 목표와도 일치되는 부분이기도하다. 결국 이러한 승화(昇華)의 과정은 혹독한 수련과 도전을 통해 극복되고 있으며, 진정한 정의와 힘은 용서를 통해 和로 이어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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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를 어떻게 되찾나요?
2005-11-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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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란 일본의 사무라이들의 정신성인 무사도의 일부이며 일제시대에 이땅에 뿌리박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제의 잔재이며 독재를 옹립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사용하던것이다 이제는 무도를 버리고 우리의 무예를 되찾아야한다 일본은 무술을 무도로 승화했으나 우리는 무술을 예술로 승화했다 무술동작이 글려내는 아름다운 선과 역동성은 충분히 예술적이다 이제 일제잔재인 무도를 버리고 무예를 되찾자
2005-09-0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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