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 한번도 남의 땅을 침략해 본 적이 없었다”
발행일자 : 2003-06-11 00:00:00
박수용 기자
수원 華城 [처마에 빗소리 들다]
“우리는 단 한번도 남의 땅을 침략해 본 적이 없었다”
혹자는 우리의 역사를 침략의 역사라고 평하기도 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의 역사교육과정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민족 정신으로 부각시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모 CF의 카피에서처럼 수치스러운 역사로 절하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 역사의 흑백 평가를 떠나 우리나라는 외세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해왔고, 그만큼 침략에 대한 스트레스가 항상 역사의 꽁무늬를 따라다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외부의 물리적 힘을 많이 받아낸 만큼 우리 역사에서 ‘방어’의 개념은 타국의 그것보다 훨씬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술에 있어서도 공격위주의 무술과 방어위주의 무술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의 군사 정책에 있어서도 주된 관심사는 방어를 통한 호국(護國)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 가운데 궁궐이나 성곽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으며 그만큼 당시의 시설에 대한 경호는 오늘날 못지 않았을 것이다.
수원성은 수원시내를 빙 둘러싸고 있는 형상으로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 네 개의 성문이 동서남북으로 자리잡고 있다. 성문을 통해 성곽으로 오르면 수원천을 끼고 있는 수원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에는 ‘치’라고 하여 적을 공격하기 위한 구멍들이 연속적으로 위치해있다. 이 치(稚)는 원래 ‘꿩’이라는 뜻으로 본래 꿩은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기 때문에 시설의 용도와 그 뜻이 통해서 치라고 한다.
정약용 거중기로도 유명한 수원성의 축성은 그 동기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고 몇가지 추정만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는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가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발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읍을 새로 옮기고 거기에 국력을 기울여 새로운 모습의 성곽을 축조한 대역사(大役事)의 동기를 단순히 부친에 대한 효심에만 두는 것은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한데, 거기에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라는 문제에 얽힌 당시의 정치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곧 수원성은 기존의 수원읍을 새로운 장소로 옮기고 나서 이 읍을 보호하는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것이다.즉 수원을 신도시로써의 구축하고 그에 대한 상권 확보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조의 병사로 말미암아 수원성 축성의 원대한 구상과는 반대로 지방의 소도시로 머물면서 조선왕조는 몰락을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수원성의 축조에는 정조대왕의 성친에 대한 효성 외에 보다 복잡한 당시의 정치적 사정이 얽혀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최대 걸작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정조의 효성과 정치적 사정의 발로에서 축성된 성답지 않게 수원성은 군사적 목적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방어형태가 공고하다. 우선 북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 등 사방에 위치한 포루가 방어의 핵을 담당하고 있다. 포루(砲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 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하면서 내부를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을 공격하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장대(將臺)라고 하여 성 주변 사방을 조망하면서 장병들을 지휘하는 곳으로 수원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다. 이런 장대에는 뒤에 노대(弩臺)를 두어 쇠뇌를 쏘는 노수(弩手)가 머물 수 있게 하였다. 이 밖에도 공심돈(空心墩) 등의 방어제를 설치하여 외세의 침입에 대해서도 만전을 기했던 흔적을 엿 볼 수 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낙남헌(洛南軒)]
서장대 쪽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화성행궁이라는 궁이 있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행차할 때 머무르는 임시 처소의 역할을 하는데 크게 세가지의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 전란시 난을 피하기 위하여, 둘째로 지방의 능에 참배하러 갔을 때 머무는 곳, 셋째는 온천지 등에 휴양을 위하여행차하여 머무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두 번째인 능행시의 거처로 지어진 것이다. 화성행궁은 현재 공사중인 관계로 완전한 관광이 쉽지 않은 상태이다. 화성행궁의 북동쪽에는 낙남헌이란 곳이 있는데, 이 곳에서 각종 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관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무술과 관련하여 장병들을 지휘하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화성행궁에 도착하자 마침 수문장 교대의식과 함께 택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성행궁의 신풍루에서 이루어진 행사는 과거 수문장 교대의식을 재현한 것이다. 수문장 교대의식은 경복궁에서 이루어지는 교대의식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앞 서 벌어진 택견판은 결련택견계승회에서 시연하였는데 일정한 시나리오를 갖고 펼쳐지는 퍼포먼스로 임금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과거 신풍루에서 왕 입회하에 택견 시연이 이루어졌는지는 고증된 바 없으나 옛 군사집단의 거처에서 진행된 택견 시연은 화성의 문화행사로 주목할 만 했다.
화성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올 무렵 흐릿한 하늘이 결국 비를 뿌리고 말았다. 화성 처마에 빗소리가 들어 뒤돌아 올려다보니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얽혀 칼집에서 한번도 뽑지 못한 칼을 쥐고 있는 철옹성의 비운(?)이 빗소리에 잠겨 성벽만 적시고 있더라…….
빗소리 흐드러진 적막 사이로 화성이 말을 건넨다.
“우리는 한번도 남의 땅을 침략해 본 역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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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와 금사는 중국역사가 아닙니다. 거란, 여진의 역사입니다. 요즘 동북공정이다 해서 소수민족역사도 지내나라 역사라고 지껄이는데 정말 핵심적인것만은 알고 삽시다. 제발.
2005-07-1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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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민족이 인간성이 좋아서 그런건 아닐거라 생각 ㅡㅡ;;....
툭하면 한사람 다구리나 하는 민족인데 무슨....2003-10-1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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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객관적으로 씌여진 중국역사서 24사중 요사나 금사를 보십시오
특히 금사에서는 "고려가 병사 수만명을 동원하여 침략해 왔다. 여러 장수들이 나가 싸웠
으나 역부족으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라고 금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그들 앞 세대에서
있었던 윤관의 소위 "여진정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그것이 오늘날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1592년의 조선출병" 이라는 말과 다를것
이 무어 있겠습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분명 침략이었던 것인데 우리는 정벌이라고 배우
고 있지 않습니까?
국경을 어지럽히는 도적들을 소탕하는 수준의 응징 차원에서 했다고도 칩시다. 헌데 어
떤 나라가 도적무리를 소탕하는데 호왈 17만 이라는 대군을 동원한답니까? 이건 분명히
만주의 여러 부족들이 단합될 것을 우려한 고려정부의 "만주분열정책" 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을 압도적으로 많이 받은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
을 절대로 침략하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우리 민족도 국력이 강해졌을땐 이웃의 타 민족
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제국주의적 성격까지 띄게 된적도 있습니다.
적어도... 단 한번도 이웃나라를 침략한적이 없다는 표현은 옮지 않음을 말씀드리고 싶습
니다. 험준한 성곽이 온 나라안에 없는곳이 없다는 것은 적국의 침략을 막기위한 것이기
도 하겠으나 대외 침략(정벌) 을 위한 든든한 후방기지의 역할도 했다는 것입니다.2003-07-1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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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법과 공성술은 병법의 중요한 한 분야 입니다.
이 또한 시대에 따른 유행과 흐름 및 지역적 특성을 갖추고 있지요.
그리고 민족과 국가에 따른 현지 지형에 맞는 전략과 전술도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기사도 부탁드립니다.
무예 십팔기의 무예가 군사 무예였듯 현대의 총검술도 무예가 될 수 있지요.
몇 몇 무도에서는 총검 공방에 대한 호신술 및 본이 있지요.
그렇듯이 공성술에도 그에 맞는 각개 전투병들의 전투기술이 있었습니다.
성을 기어 올라가거나, 장대를 이용해 뛰어 넘거나, 여러 가지 공성 기구를 이용한
전투법과 함께 이에 대한 방어 전술과 축성 기술도 있습니다.
현대의 개인호 및 참호진지의 구축(야전축성 기술)도 이와 일맥 상통하기도 합니다.
기지화된 군사기지에 도달하면 그건 또 따른 어마어마한 기술적, 학술적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는 성공한 전투기지의 성공적인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이런 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한국에는 아직도 많은 성들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서울 근교에도 많지요.
아차산성, 남한산성, 북한산성등.......
부탁드립니다.2003-06-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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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도 몇번있을거요.
2003-06-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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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허니 훤한 모습이지만 왠지 모를 비장함이 감도는 곳이군요.
그 옛날의 비기와 비화가 서려있을 법한 그 곳에 가보고 싶다.
단청의 화려함과 어우러졌을 어느 무관의 입김이 맴돕니다 그려.
이내 客들은 와당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2003-06-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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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너무 멋져요~ 낙남헌..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2003-06-1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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