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치밀한 준비, 성실한 태도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져온다!


  

[박호진 변호사의 미국 진출 바로알기 9] 치밀한 영주권 준비와 정착준비로 미국에 안착한 사범 이야기

국내 태권도 전공생과 지도자들이 큰 관심을 갖는 미국 태권도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미국 내에서 여러 태권도 사범들의 취업비자와 영주권 업무를 담당해온 박호진 변호사를 통해 현실감 있는 ‘미국 태권도 사범 바로알기’를 연재 합니다. 미국 내에 다양한 사례의 태권도 사범의 정착기와 실패담 그리고 미국 진출에 반드시 알아야할 이슈를 앞으로 매주 목요일 소개 합니다. [편집자 주]

 

박호진 변호사

강 사범은 한때 대한민국 주니어 국가대표 선수를 지낸 촉망받는 태권도 선수였다. 하지만 시니어가 되면서 이렇다 할 성적이 없었다.

 

태권도 주특기로 군 복무를 마친 강 사범은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 고등학교 시절 태권도부 감독님의 권유로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잠시 맡게 됐다.

 

모든 면이 낙후된 나라였기 때문에 코치직 수락을 망설였으나, 옛 은사님의 권유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5개월 계약을 맺고 떠나게 됐다.

 

국가대표팀 코치로 부임한 직후 해당 국가 협회와 국기원이 협력해 최초 전국 규모 승단심사대회를 추진했다. 우연한 기회로 강 사범은 승단심사대회 운영위원장 겸 승단심사위원을 맡게 됐다.

 

코치로 부임한 지 5개월 후, 동남아시아대회에서 금메달 1개를 포함한 총 7개 메달을 획득하면서 종합 5위를 차지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서울에 도장을 열었다. 도장 근처에 살고 있던 한국 국가대표팀 겨루기 선수는 태릉선수촌에 입소하지 않을 때면 가끔 강 사범의 도장에서 개인 훈련을 하기도 했다. 

 

도장은 월세가 밀리지 않을 정도로만 운영 됐다. 늘 외향적인 강 사범은 도장을 더 키우기보다 대학 시절 은사님 소개로 인연을 맺게 된 서울시태권도협회 업무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서울시협회 활동을 하는 동안 총 4개 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는데 특히, 심판위원회 위원이던 기간 중에는 서울시협회 심판자격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약 4년. 강 사범은 부인의 권유도 있었고, 본인도 한국 생활이 답답하다고 여기던 차에, 영어권 국가로 진출을 모색하게 됐다. 가장 먼저 떠올렸던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과거 미국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됐던 경험이 있어서 편하진 않았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던 중 대학 동기의 어릴 적 사범님이 캐나다에서 꽤 성공적으로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함께 일할 사범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캐나다 도장 관장님고 전화통화 후 강 사범은 캐나다 행을 결심하게 된다. 

 

캐나다는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고 자연환경이 너무나 아름다운 살기 좋은 나라였다. 강 사범이 정착한 퀘벡 주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어서 강 사범의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어 이외 두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캐나다 도장에는 태권도에 강한 열정을 보이는 성인 수련생이 많아서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다. 열성적인 관원들을 인솔하여 캐나다 전국선수권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캐나다 시장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땅이 넓은 대신 인구는 남한 인구보다 적었다. 혼잡한 한국에서 살다가 널찍널찍하고 여유로운 생활이 처음에는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료하고 적적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염려되는 부분은 아이들의 장래였다. 교육 자체의 질은 별 불만이 없었다. 문제는 일자리가 많지 않고 개인 사업을 하기에도 시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캐나다 사람들 중에도 캐나다에서 대학을 나오고 나서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등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강 사범 은 ‘아무래도 결국은 미국으로 가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강 사범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온 것은 1순위 영주권 승인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전화상담 후 강 사범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1순위 영주권 승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승인가능성을 최고로 높인 후 영주권 신청을 원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1년 아니 2년이 걸려도 좋다고 했다. 

 

필자는 강 사범의 영주권 필승 플랜을 짰다. 

 

국가대표팀 코치 경력은 있으나 그 나라가 태권도 강국이 아니고 유명한 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라 최초의 국기원 승단심사대회를 개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 특히 승단심사 심사위원을 한 경력은 1순위 영주권 승인에 큰 도움이 되는 경력이었다. 그리고 비록 태권도 약체 국가지만 어찌됐든 강 사범은 그 나라 국가대표팀의 코치였기 때문에 국가대표코치협의회라는 단체의 정회원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가지 경력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자료 준비를 했다. 

 

또한, 강 사범의 한국 도장에서 개인훈련을 하던 국가대표 선수가 강 사범과 함께 훈련한 덕분에 슬럼프를 탈출하고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내용을 추천서로 써 주었다. 의외로 얻게 된 훌륭한 응원군이었다. 

 

캐나다에서 강 사범이 지도했던 관원들이 전국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도 매우 좋은 포인트였다.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딴 관원들의 사진들을 모으고 그 관원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았다.

 

서울시협회는 아무리 큰 협회더라도 결국 ‘지역 단위’ 협회이기 때문에 1순위 영주권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 협회에서 여러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는 점, 특히 심판자격심사위원 경력은 중요하다고 판단해 그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분으로부터 추천서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2%가 부족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태권도 지도자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언론기사가 전무한 상태였다. 언론기사가 1순위 영주권 승인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강 사범에게 알려 주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태권도 전문 언론에 강 사범이 집필한 칼럼 세 편이 일주일 단위로 연재됐다. 

 

필자는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강 사범의 영주권 준비를 처음 시작한 지 1년 8개월이 지난 후였다.

 

강 사범이 여전히 캐나다에 머무는 상황에서 미국 이민국에 이민청원을 제출했다. 강 사범은 오래 기다리는 것이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급행서비스를 신청했다. 15일 내에 결판이 날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8일 만에 이민국으로부터 필자에게로 이메일이 왔다.

 

승인이었다! 

 

강 사범이 뉴저지에 있는 필자의 사무실을 직접 찾아 온 것은 이민청원 승인 소식을 전하고 나서 약 두 달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강 사범이 미국을 방문한 목적은 도장을 열 곳도 알아보고 미국에서 성공한 도장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강 사범은 뉴욕과 뉴저지 지역을 살펴 본 후 노스캐롤라이나를 거쳐 애틀란타로 갔고, 다시 서부지역의 유명한 도장들을 둘러 보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강 사범과 그 가족들은 몬트리얼 미국 총영사관으로부터 무사히 이민비자를 받았다. 이민비자를 받고 나서 처음 미국에 입국하면, 입국이 됨과 동시에 미국 영주권자가 된다. 

 

그 직후에 강 사범은 다시 미국을 방문했고, 이번에는 줄곧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면서 대학 선배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분과 동업으로 그 분 도장의 두번째 도장을 내는 문제를 의논하고 추진했다. 

 

운영할 도장과 그 도장의 훈련 프로그램이 모두 정해지고 가족들과 함께 살 아파트까지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강 사범과 강 사범의 가족들이 함께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이민청원이 승인된 날로부터 약 9개월이 지났고, 몬트리얼 미국 총영사관으로부터 이민비자를 받은 지 약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돌아보면 강 사범은 참 현명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매년 수많은 태권도인들의 비자와 영주권 케이스를 다루지만 한 케이스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스를 맞게 되면 어떤 때는 그 케이스의 당사자인 고객보다도 필자가 더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필자의 고객들 중에는 간혹 필자에게 자신의 케이스를 맡겨 놓고 나서는 자신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신청자료 준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심지어는 변호사를 마법사 정도로 생각해서 자신이 크게 기여하지 않더라도 '변호사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하는 태도를 보이는 분들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강 사범은 이미 스스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성실하게 준비과정에 임하는 고객이었기 때문에 담당 변호사인 필자 입장에서는 준비가 수월했던 경우였다. 

 

그렇게 노스캐롤라이나에 정착했던 강 사범은 그곳 도장을 잘 운영했고, 100% 자신 소유의 도장을 텍사스 주에 세우면서 텍사스 주로 옮겨 갔다. 지금은 텍사스에서 규모가 상당히 있는 도장 세 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필자에게는 기억에 꽤 오래 남는 고객이다.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박호진 변호사는 성균관대 법과대학과 비즐리 로스쿨 출신의 뉴욕주 변호사로 현재 뉴저지 포트리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 중이다. 뉴저지로 옮기기 전에는 맨하탄 소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위치한 로펌에서 이민법 변호사로 활동했다. 미주 최대 웹커뮤니티 헤이코리안 닷컴을 통해 10년 가까이 무료 법률상담을 제공해 오고 있다. 현재는 태권도 사범의 미국 진출을 위한 토탈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콘 컨설팅의 고문변호사로도 활동 중이다.


[글 = 박호진 변호사ㅣ lawyer@beaconi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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