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1-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무술의 전설
김승모


이소룡. 무술사에 있어서 그리고 영화사에 있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 이름 이소룡. 강렬한 눈빛, 경쾌한 발놀림 그리고 그의 상징인 쌍절곤과 괴성으로 온 세계를 열광시켰던 바로 그 인물, 이소룡.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를 아직도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Profile
본명 이진번
생년월일 1940년 11월 27일
사망월일 1973년 7월 20일
출생지 미국 샌프란시스코
가족 Linda Lee(아내), Brandon Lee(아들), Shannon Lee(딸)
무술 절권도(Jeet Kune Do)
무술이외장기 댄스.1958년 영국식민지 "차차차" 경연대회 우승
영화데뷔 1964년 광동어 영화 "금문녀" - 아버지와 같이 출연, 6세때임
무도가로서의 제자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반, 리 마빈, 제임스 가너, 환 윌리엄스, 스타링 씨리휜트(극본가), 카램 압돌 자바(전 NBA 농구선수)
출연작 당산대형 (71년) 정무문 (71년) 맹용과강 (72년) 사망유희 (72년) 용쟁호투 (73년)
2. Life & Movie
전설의 배우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해전은 중국 광동성의 배우로서 이소룡이 태어날 당시 미국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이름 Bruce는 출생증명서를 위해서 미국식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간호사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아직 아기였을 무렵 그의 가족은 홍콩으로 건너간다 . 학교시절 이소룡은 문제가 끊기지 않는 개구쟁이였다. 부모는 걱정한 나머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켜 보았으나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댁의 아이는 지금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아버지 이해천에 대한 동료 배우들의 인사가 될 정도로 이소룡의 전학은 잦았다.
그러나 이소룡은 무예만큼은 열심히 익혔다. 이미 아버지로부터 태극권을 배운 그는 13세가 되서 쿵후를 배우기 시작했다. 쿵후를 시작한 계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이소룡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무렵 볼품없는 체격의 클라스메이트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이소룡은 도리어 상대에게 호되게 당했다. 알고보니 상대는 쿵후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소룡은 그후 정신없이 쿵후도장을 뛰어다녔다.
195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시애틀에 정착하여 워싱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그는 중국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는등 바쁜 와중에서도 결코 무술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4년 그는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던 린다 에머리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당시 학생이었던 그들은 쪼들리는 형편 때문에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오클랜드에 무예도장을 열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이소룡은 도장의 선전을 위해서 무도 토너먼트에 참가하곤 했다. 1964년도 토너먼트에 참가한 이소룡은 시합에 참가하지는 않고 절권도의 시범을 보였다. 반응은 대단했다. 그의 스피디한 몸놀림과 날카로운 솜씨는 참가자들의 시선을 끌었고 이윽고 20세기 폭스 스튜디오 무술지도 담당으로 채용됐다. 그리고 TV시리즈 그린호네트에 발탁되었다.

그의 배우로서의 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린호네트에서 그는 주목을 받게 되었다.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단련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양 무술에 많은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그는 그린호네트의 출연 덕택에 제법 이름이 알려져 헐리우드의 유명한 배우 스티브 매퀸, 리 마빈, 제임스 가너 등과 NBA 농구선수 카렘 압둘 자바와 친구사이가 되었고, 이 유명한 학생들에게 그가 창안해 낸 절권도를 가르쳤다.
1971년 이소룡은 홍콩으로 건너가 영화를 시작한다. 그가 홍콩으로 건너간 이유는 간단했다. 연기생활을 하면서 이소룡이 경험한 것은 자신이나 다른 동양인 배우들에게 비중있는 배역이 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TV는 그와 맞지 않았다. 물론 그린호네트에서도 그의 특기인 가슴차기와 쌍절곤의 위력을 실험했으나, 절권도는 손발의 움직임이 매우 크고 빨라 영화에는 어울리지만 TV의 작은 화면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절권도의 위력을 보이려면 TV로는 도저히 힘들고 옆으로 긴 시네마스코프 사이즈의 극장용 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소룡의 예상은 멋들어지게 맞아 떨어졌다. 홍콩으로 돌아와 출연한 첫번째 영화 당산대형(Big Boss)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그의 영화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스타일의 영화였다. 상대방을 절도있게 손가락으로 끊어서 가리키는 동작, 무릎을 반쯤 굽히고 손을 앞에 내세우는 싸움의 준비 자세, 이와 동시에 경망스럽게 뛰어 다니지 않고 발을 끌거나 사뿐하게 움직이는 모습,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린 뒤 보여주는 분노와 묘한 슬픔이 깃든 인상, 다양한 발차기 동작들... 그리고 수십대 일의 격투 장면, 공중 이단 옆차기등 마치 눈앞에서 싸움을 하는 듯한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그의 모습은 기존의 무협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경지였다.

당산대형(Big Boss)으로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게된 이소룡은 본격적으로 그의 신화를 쌓아간다. 가히 그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무문(Fist of Fury)은 바로 당산대형의 차기작이었다.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쌍절봉과 싸움하면서 코를 문지르는 동작, 그리고 그의 장기인 결정타를 날리고 인상쓰는 장면과 괴성등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액션을 처음 선보였다. 정무문 역시 빅히트를 기록하여 영화배우로서의 그의 명성을 한단계 높혀 주었다. 이듬해 이소룡은 맹룡과강(Way of the Dragon)으로 완전히 그의 입지를 굳혔다. 당시 홍콩 최초로 이탈리아 현지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영화는 척 노리스(전미 공수도 7년패)라는 새로운 액션영화배우를 배출하기도 했다. 1973년 이소룡는 워너브러더스의 제안을 받고 합작으로 용쟁호투를 찍는다. 용쟁호투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그를 세계적인 스타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기이한 소리를 지르며 몇 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홀홀단신으로 상대하면서 숨막히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이 배우를 보면서 세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동양이 낳은 세계최고의 슈퍼스타 이소룡은 용쟁호투 를 끝내고 사망유희(Game of Daeth) 라는 작품을 찍던 도중 돌연 의문사한다. 애석하게도 32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승천한 것이다.
미완성 한 편과 다섯 편의 영화를 남기고 떠난 이소룡.

이소룡 사후 수많은 아류작들이 고인에게 경의를 표했고 성룡이나 이연걸이 쿵후 영화의 맥을 잇기는 했지만 이소룡의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떻게보면 아직도 오직 이소룡만이 무술영화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주인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소룡의 묘비에는‘Bruce Lee, 절권도의 창시자’라고 새겨져 있다. 경극의 몸동작을 흉내내는 배우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술을 창시한 무도가로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 절권도 (서림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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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그는 나를 달라지게한 장본인..
감사합니다...
보답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절대 포기 하지 않겠습니다....
최선이 바로 노력이다...
""무술은 자기 자신의 성찰로써
상대방을 때려 눕히는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기심 공포를 때려 눕히는 것이다.""
" 가르치는 방법이 엄격하지 못하면
주먹 받드시 흐트러지며
배우려는 방법이 엄격하지 못하면
주먹 받드시 삐틀어진다.. "朴熙成"2002-07-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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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 존경 한다.
2002-02-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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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음
사실 격투 오락을 좋아하는데요.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소룡 스타일 캐릭터 입니다..
그런걸 봐오면 개발자들은 어떻게하면 이소룡을 와성할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거 같네요...^^
하나의 예술인듯..
전 별루 경험한 것이 없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한 사람이 예술이다..
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이소룡,마이클잭슨,마이클조단 등이군요. ^^
이서문에 관한 글은 없나요..? 팔극권의 고수라는.. ^^;;2001-01-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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