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고려 강감찬(姜邯贊) 장군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34


고려의 강감찬(948~1031) 장군은 우리나라 역대 도인(道人)들의 명단을 나열한 홍만종(1643~1725)의 《순오지(旬五志)》에 그 이름이 올라가 있다.

지금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落星臺)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장군이 태어나던 날 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은 전하고 있다.

부친(父親) 강궁진(姜弓珍)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삼한벽상공신으로,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알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집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을 알고는 뺏어다 길렀는데, 이 아이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었다.

송나라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장군을 보고는, 예(禮)를 다하며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문곡성(文曲星)이 중국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공(公)을 뵈오니 공께서 바로 문곡성이시군요!"

문곡성(文曲星)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4번째 별로서, 오행(五行) 중 수(水)에 속한다. 또 하늘의 저울추인 천권성(天權星)이라고도 하며, 벌성(伐星)이라고도 한다. 하늘의 이법(理法)으로 무도(無道)한 것을 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문곡성(文曲星)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장군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서 문무(文武)를 배웠다. 그리고 17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김장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양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김장길의 아들을 강궁진이 뺏어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이때를 계기로 하여 강감찬은 10여 년 간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이 시기에 도(道) 공부를 집중적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3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니, 가히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열전에는 강감찬 장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 키가 작고 못생겼으나,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였다. 마음이 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사랑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높은 인품에 처신이 신중하고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았다. 명문 출신이면서도 겸손하고 검소하여, 옷차림은 항상 중인을 넘지 않았다. -

《고려사》열전 외에도《세종실록 지리지》,《용재총화》《동국여지승람》《해동이적》《기문총화》《보한집》등에는 장군의 지혜와 도력(道力)을 나타내는 기행이적(奇行異蹟)의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개구리를 잠재우다

장군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백성들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에 장군이 돌에다 명령서를 써서 개구리 왕에게 보냈더니, 이후부터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강감찬 금와훤(禁蛙喧) 전설’이다.

호랑이 문제를 해결하다

장군이 양주 고을 목사로 부임해 가니, 호랑이가 들끓어서 그 피해가 적지 않았다. 가축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물려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운 센 장수가 부임해 와서 호랑이를 없애 주기를 바랬는데, 키도 작달막하고 못생긴 사람이 온 것을 보고는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은 장정들에게 마을 주변의 숲을 모두 베도록 하여 허허벌판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활 잘 쏘는 사냥꾼들을 모아 덫과 함정을 만들어 놓고, 나타나는 호랑이를 모두 잡아 죽였다.

그리고 허허벌판은 모두 땅을 일궈서 농사를 짓도록 하니, 호랑이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곡식의 수확도 몇 갑절 더 늘었다. 그제사 사람들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강감찬’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마마신을 부리다

강감찬 장군이 원래는 훤칠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잘생긴 얼굴로는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추남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마신 곧 시두(時痘, 천연두) 손님은 천자(天子)의 출현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막강한 신(神)으로서, 마마신을 수하처럼 부렸다는 것은 곧 장군의 도력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였다.

장인을 골탕 먹이다

강감찬 장군은 또 장난기도 많았다고 한다. 처가집에 갈 적마다 장인에게 큰절을 올리는 게 번거로와, 하루는 머리가 장인의 코끝에 닿을 정도로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장인어른 깜짝 놀라 뒤로 빠지며 하시는 말씀.

"강서방, 무슨 절을 그렇게 하나? 내 콧등이 다칠 뻔 했잖어? 다음부턴 멀찌감치 떨어져서 하게나."

그런 일이 있은 후 장군은 처가에 가서도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장인어른 왈.
"이보게 강서방, 왜 절을 안하나?"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 하라시길래,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왔습니다."

이렇듯 여러 설화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강감찬 장군의 도력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명장으로서, 거란의 침략을 3차례나 막아냈다.

993년(성종12년) 강감찬 장군 나이 46세에 거란의 소손녕이 1차 침략해 들어왔다. 이때 강감찬 장군의 전술에 따라 서희(徐熙) 장군이 뛰어난 외교를 발휘하여 거란군을 물러나게하고, 압록강 동쪽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1010년(현종1년) 강감찬 장군 나이 63세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2차 침략해 들어왔다.

이때 강조가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았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왕에게 항복하기를 권하였으나, 강감찬 장군은 끝내 반대하였다. 그리고 왕을 나주로 피신시킨 다음, 양규(楊規)로 하여금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게 하였다. 그리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군을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니, 거란은 별 소득 없이 철수하였다.

1018년(현종9년) 거란은 또다시 10만 군사로 3차 침략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소손녕의 형인 소배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에 강감찬 장군은 70세 노장의 몸으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군사를 손수 이끌고 홍화진으로 진군하여 거란군을 물리쳤다.

홍화진의 동쪽에는 삽교천이 있었는데, 강감찬 장군은 수백 장의 쇠가죽을 밧줄로 꿰어 강의 상류를 막았다. 그리고 적군이 삽교천을 건널 때 막았던 강물을 갑자기 터놓으니, 쏟아져 내려오는 거센 물살에 거란병은 휩쓸려 내려갔다.

게다가 강 양쪽에서는 고려군이 화살을 쏘아대니, 거란병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에 고려군이 큰 승리를 거두고,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이듬해 자기 나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은 소배압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귀주에 진을 치고 후퇴하는 소배압의 군사를 가로막았다.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하여 귀주 벌판에서 또 한차례 힘차게 적을 무찔렀으니,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이었다. 이후 거란은 두 번 다시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대첩에 속하며, 이 세 분 장군은 모두 선도(仙道)를 닦으셨던 분들이다.

72세의 강감찬 장군이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고려의 임금인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그리고 장군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대환영을 하였다.

이후 강감찬 장군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조용히 살다가 84세로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현재 강감찬 장군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국사봉 아래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이름이 국사리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는 곧잘 이곳으로 전교생이 걸어서 소풍을 갔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는 강감찬 장군의 묘가 있는 국사봉 인근에 살았고, 30대에는 지리산 국사봉 아래 있는 국선도 선원에서 살았고, 지금 현재 살고 있는 국선도 계룡수련원은 계룡산 국사봉 아래에 있다.

지리산 국선도 선원은 행정구역상 경남 하동군 청암면에 위치해 있었는데, 필자는 산중수행을 위해 이곳에 들어가다가 혼자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필자가 타고 있던 차가 마침 하동(河東)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들이 옥산슈퍼, 옥산쌀가게, 옥산세탁소... 등이었다.

‘아, 이곳이었던가!’

필자의 본관(本貫)이 하동(河東)인데, 직감적으로 뿌리를 향한 추리력이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더 알아보니, 인근에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의 산도 있었다.

옥산(玉山)은 또 여신(女神)들의 우두머리인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산이기도 하다. 곤륜산(崑崙山)을 옥(玉)이 많다 하여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필자의 조상님은 경남 하동에서 충북 청원으로 이동하여, 고향의 산(山) 이름인 옥산(玉山)을 마을 이름으로 짓고, 씨족을 퍼뜨린 것이다.

필자가 태어난 마을 이름은 옥산(玉山) 덕촌(德村)인데, 보통은 반곡(半曲) 또는 반월(半月)이라고들 불렀다.

공자님이 태어나신 마을 이름이 바로 곡부(曲阜, 둥근언덕)인데, 지금 필자가 사는 계룡수련원이 있는 곳도 바로 삼태미 형상의 곡부요, 반곡이요, 반월이다.

이웃 교주님 말씀이, 앞으로 이곳 삼태미 안에서 깨달은 사람이 3사람 나온다고 하시자, 우리 회원님께서 재미있게 유머를 하셨다.

“한 분은 이미 나왔고요, 이제 두 사람만 더 나오면 되네요.”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선도 #정현축 #강감찬 #홍만종 #순오지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
  • FBI_즨즤

    허허허허헣
    숙제할려고 잠깐봣는데 답은없군
    허허허허허허허헣 아깝군,,,

    2013-05-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FBI_즨즤

    허허허허헣
    숙제할려고 잠깐봣는데 답은없군
    허허허허허허허헣 아깝군,,,

    2013-05-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사실^^

    우찌 알았을까잉 ~ ^^

    2012-11-2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ㅋㅋㅋ

    이젠 삼국시대 끝나고 고려로 넘어가는구나. 조만간 조선시대 나오면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 국선도 배웠다고 하겠지 ㅋ 안중근, 김구도 국선도 수련했다는 말도 나올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2-11-2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ㅎㅎ

    유머는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ㅎㅎ

    2012-10-1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임신선

    재미 있습니다. 이 칼럼 기다려 집니다.
    깨달은 자가 한분 있다는데 누구일까요. 아마 제 짐작이 맞을것 입니다.
    두분도 국선도에서 나옸음 좋겠네요.

    2012-10-1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