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44


정여창(1450∼1504, 세종32∼연산군10)은 본관이 하동(河東)으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함양(咸陽)에서 태어났다.

삼국시대 하동의 호족으로서, 대대로 하동에서 살던 정여창의 집안이 함양으로 이주한 것은 그의 증조부 정지의 대였다. 하루는 정지의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동북으로 이사하면 자손이 번창하고 집안이 크게 떨치게 될 것이다.”라는 현몽을 꾸고 하동에서 함양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함양에서 만석꾼이 되었으며, 정여창이 조선조 동방 5현과 동국 18현 가운데 속하게 되었으니, 가히 맞는 현몽이었다.

함양은 또한 고운 최치원이 태수를 지냈고 점필재 김종직이 군수를 지냈던 곳이기도 한데, 이때 정여창은 23세의 나이로 처음 김종직을 찾아가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지시로 3년 간 하동 쪽 지리산 악양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깊이 공부를 하였다. 이때 그는 체(體)와 용(用)이 그 근원은 같으나 나뉨이 다름을 알았고, 선악(善惡)의 본성은 같으나 그 기(氣)가 다름을 알았으며, 유불도는 같으나 그 행적이 다름을 알았다고 한다.

27세에는 다시 서울에서 재임하고 있던 김종직을 따라 올라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로부터 ‘참선을 하느라고 잠을 안잔다.’고 놀림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효온(1455~1492)의 《추강집》〈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나와 있다.

남효온은 또 ‘그의 사람됨은 성품이 단아하고 중후하였는데,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마늘처럼 냄새나는 채소도 먹지 않았으며, 소고기와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얘기를 했으나, 안으로는 마음이 또렷이 깨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모친의 명에 의해서였고, 소고기를 먹지 않은 것도 역시 모친이 소를 보고 놀라셨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 김일손(1464~1498)은 ‘정여창은 도(道)가 하늘과 사람에 통하고, 학문이 체와 용을 갖추었으며, 성정이 고요하고 기질은 단정하며, 몸가짐은 깨끗하고 고난에도 안주하며, 사물을 어질게 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37세에 모친이 별세하자 3년 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정여창은 그 길로 처자식을 이끌고 아예 지리산 악양으로 다시 들어가 은둔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악양정(岳陽亭)이다.

모친은 아들이 살림에 전혀 상관 안하는 것을 걱정하여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쓸 수 있도록 살아생전에 정여창 몫의 쌀가마를 광에 따로 저축하여 놓았다고 한다. 이를 안 정여창은 모친상에 그것을 몽땅 풀어서 썼다. 그리고 모친이 남긴 소작농들에게 빚을 빌려준 치부책 역시 그 자리에서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여창의 호가 참 재미있다. 좀 두(蠹)자를 써서 ‘한 마리 좀벌레’라고 호를 지었으니, 그의 겸손함이 호에 잘 나타나 있다.

18세에 그의 부친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다가 순국하자, 나라에서 그 아들 정여창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면서 받지 않았다.

또 고관대작이었던 서거정(徐巨正, 1420~1488)이 그를 경전(經典)의 1인자로 보고 임금께 강론하는 직무에 추천했으나, 그는 학문이 부족하여 감당하지 못한다며 역시 사양하였다.

41세 되던 해에는 ‘어진 사람이 초야에 묻혀 있으면 정치에서 이보다 큰 손실은 없으며,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해야 한다.’는 주위의 추천에 의해 성종임금이 소격서 참봉 벼슬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은 사양의 글을 올렸다.

‘제가 효자에 합당한 사실이 하나도 없는데도 임금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제 자신이 편치 못하고, 또한 무턱대고 나아가는 폐단이 생길까도 염려됩니다. 제가 어머니 상중에 안으로는 심히 슬퍼하는 정성이 적었는데도 밖으로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효자로 여기게 하였으니, 이는 주위 사람들을 속인 것입니다. 또한 임금께 돌려 알리고 곧 포상의 직위를 받게 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속인 것이 되었습니다. 실상은 없는 모습으로 저의 마음에 감추고 위에 밝히지 못하고 임금님으로 하여금 효자라 믿게 한다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터이니, 저의 죄는 죽어도 용서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임금님께서는 실정이 허위임을 통찰하시어서 그 내리신 명령을 거두어 주신다면, 위로는 헛되이 상 주는 잘못이 없어지고, 아래로는 속이려는 폐습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그 사양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어차피 나가야 한다면 떳떳이 나가는 게 좋겠다며, 그해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리하여 41세라는 늦은 나이로 관직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두만강 근처의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관노생활을 하다가 55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임종하였으며, 그해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두만강 근처 함경도 종성에서 음력 4월 1일 별세한 그를 그의 문인들이 2달에 걸쳐 시신을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하였는데, 그해 9월 다시 갑자사화를 맞아 부관참시까지 당하였으니, 가히 피바람이 몰아쳤던 것이다.

이때 그가 지은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主客問答)》《진수잡저(進修雜著)》등의 논저들도 모두 불태워 없어졌다.

그러나 사후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조선조 동방 5현과 동국 18현 가운데 한 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제향(祭享)되고 있다.

필자가 계룡산 자락에 국선도 수련원을 개원한 초기, 연로하신 한 유학자께서 방문하셔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본관이 어디인가요?”
“하동입니다.”
“하! 일두 선생님 가문이로구먼! 하동 정씨는 대단히 훌륭한 가문이라오. 대한민국 유학자라면 일두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오. 이 나라에서 성균관에서 제사 받는 다섯 분 중 한 분이니, 그건 가문의 영광이라오!”

필자는 그동안 그리 빠지는 가문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대단한 가문인 줄은 처음 알았다. 유학자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 유학자라면 일두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송을 하셨다.

청한자 김시습이나 점필재 김종직 또한 대개의 모든 분들이 유학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기실은 선도(仙道) 수행자였다. 필자는 일두 정여창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고 있는데, 그 연유는 이렇다.

1.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일찌감치 갈파하셨듯이 선도(仙道)는 유·불·도 3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선도 수행자들은 특히 유·불·도 3교에 모두 박식하였다.

2.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정여창이 스승의 선도 사상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3. 정여창은 일찍이 선도(仙道)의 이상향 청학동으로 알려진 하동 악양에 들어가 3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깊은 공부를 하였으며, 나중에는 아예 처자식까지 이끌고 들어가 은둔하였다. 그가 살았던 악양정(岳陽亭)은 지금까지도 남아, 후학들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4. 선도를 수행했던 남명 조식의 남다른 존경을 받았으며, 남명 조식은 일두 정여창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5. 정여창은 평소 ‘학문에는 정성으로 하고, 몸가짐에는 공경으로 하는 것이다.’라며 성(誠)과 경(敬)을 학문과 생활의 중심에 놓았다. (《一蠹集續集》권1,〈答朴馨伯〉, 惟以向學以誠 律身以敬) 그런데 그가 중시한 성(誠)과 경(敬)의 정신이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에게로 이어졌다. 화담 서경덕은 “자연 진실한 것을 일러 성(誠)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남명 조식은 “경(敬)이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정리하였다.

6. 이 밖에도 신고당(信古堂) 노우명(盧友明, 1471~1541)이 일두 정여창의 문인이었는데, 그 둘째아들 옥계 노진(盧禛, 1518~1578)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남명 조식과 함께 일두의 학문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였다.

7. 남명 조식은 김굉필의 문하생이었던 이장곤(李長坤, 1474~?)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김굉필이 일찍이 뜻을 같이 하는 벗과 함께 지내면서 첫닭이 울면 함께 앉아 콧숨을 헤아리는 호흡법을 행하셨다.’고 《남명집》에 기록하였다. 그런데 정여창과 김굉필은 같은 동향, 같은 동문으로서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었다.

8. 후손인 필자가 바로 선도 수행자이다.
 
필자는 평소에 조상들께서 어떤 연유로 경상남도 하동에서 충북 청원군 옥산으로 이동을 하셨을까, 궁금하였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에 역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고, 갑자사화에 부관참시를 당하였다면, 그 식솔들이 고향을 뜨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일두 정여창이 태어난 경상남도 함양에는 지금까지도 ‘하동 정씨 고택’이 유명하다. 고택 소슬대문에는 가문의 영예를 보여 주는 정려가 걸려 있으니, 충신 1분 효자 4분이다.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대단한 영광인데, 5개씩이나 걸려 있으니 가히 그 가문의 내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4개가 효자로서 받은 정려로서, 하동 정씨 가문이 무엇보다도 효를 가문의 정신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효 정신은 사랑채에 크게 써 있는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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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일두 #정여창 #정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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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카스는

    댓글이 이렇게 많은디 왜 논쟁기사 안올려 주능겨 ??

    2013-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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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채도사

    아무래도 쇼 같은디 .. 정작가님 열 받게 해서 .. 이이도 쓰라고 .. ㅎㄷㄱ

    2013-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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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한마디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다른 사상을 이단시하고 배척하였음. 그러나 그렇다고 고대로부터 있어온 선도가 하루아침에 단절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므로 주로 사림의 선비들이 겉으로는 유학을 하면서 안으로는 선도를 많이 닦았음.

    2013-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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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

    ㅄ은 .. 과잉 흥분하는 것으로 보아 .. 컴플렉스 대단함.

    2013-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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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와따 ~ 맴부터 가라앉히쇼잉 ~ 뭣땜시 저케 펄펄 뛰는지 수상쿠만.. 그케 억울허면 니가 작가 하쇼잉 ~ 그럼 될것잉게 ..

    2013-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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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손인 필자가 선도 수행자이다.- 병신 지랄하고 자빠졌네.. 국선도 하는 애들이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지 몰랐다. 사림이 뭔지 훈구파가 뭔지도 모르면서 역사 얘기만 하고 있어.. 니들 논리가 하나도 안 맞는건 니들만 뺴고 다 알아!!! 꼬라지 보니 나중에 이이 나올 것 같은데 그 때 이이의 기자실기는 어떻게 설명할 지 두고 보자!!!!

    2013-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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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 ^^

    위 내용에 나오는 유학자 선생님께서 필자를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정도령이 활동을 시작하셨다는데, 어디 계신지 모르겠네...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유학자들께서도 정도령에 대한 관심이 있으시구나.. 생각했다.

    2013-07-2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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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제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 있었고, 또 여러 군데에도 많이 나옵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문집, 단행본, 박사논문 등등. 특히 단행본으로는 《정여창》(성균관 대학교 출판부), 《정여창 연구》(집문당), 《종가집 제례음식- 하동정씨》(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남의 밥의 콩이 커 보인다고, 저는 그동안 안동 권씨를 대단히 권위있는 가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출판한 《종가집 제례음식》을 보니, 안동 권씨와 하동 정씨 두 가문을 다루었는데, 하동 정씨를 앞부분에 3분의 2 분량으로, 안동 권씨를 뒷부분에 3분의1 분량으로, 하동 정씨를 더 비중있게 다루었더라고요.. 그제서야 저는 제가 제 가문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2013-07-2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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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신선

    호기심과 재미가 함께 발동하는 글입니다. 그 많은 자료들이 어디에 묻혀 있다 나오는지 신기 합니다. 일몰년대, 이름,호, 행적등,문집명칭등...

    2013-07-2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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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 ^^

    필자가 2005년 원광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가보니, 중국 도교 원서를 돌아가며 읽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일하면서 하는 공부이다보니.. 일일이 옥편을 찾아가면서 수업준비를 하기란 시간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내게 한문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 계셨으면.. 생각하니 바로 위 내용에 나오는 유학자 선생님께서 스스로 찾아와 주신 것이지요. 그 선생님께서는 제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셨고, 저는 매주 수업 준비를 잘 해서 학교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 제게 靜谷이라는 호도 지어 주시고, 지금은 자유세계로 돌아가셨습니다.

    2013-07-1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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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험자

    인간의 오감을 벗어난 다차원의 경지와 존재들이 있는데, 문외한들에겐 전혀 알길이 없으니, 그들 문외한들의 입에서 소설 이라는 소리 나오는 것은 양반이며, 광인의 허언이라는 비아냥이 오히려.자연스럽다. 그러나 오늘 이 글은 그런 다차원 이야기는 없고 그저 역사적 문헌에 근거한 아홉의 사실과 그에 근거한 하나의 추측인데, 지금까지 40회가 넘게 연재되는 글에 끊임없는 관심를 가지고 주시하면서도 그저 소설이라는 소리 하나로 초지일관하는 자들을 그저 문외한이라 부르기엔 뭔가 부족하다. 소설이라 폄하하면서 왜 이리 지독한 관심을 가지고 이 칼럼을 주시하는가? 나는 다차원 세계와 한 줄의 실로 희미하게 연결된 체험자라서, 과연 다차원의 존재들에 대한 궁금함에 여기를 찾는데,

    2013-07-1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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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칼럼이구마 ... 그냥 그대로

    2013-07-1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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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다

    푸훗 ! ^^

    2013-07-1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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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

    일관성 있게 소설 쓰는 것.

    2013-07-1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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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다

    무슨 일관성요 .. ? ^^

    2013-07-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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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

    다른 것은 몰라도 글쓴이의 일관성 하나만큼은 마음에 든다.

    2013-07-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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