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발행일자 : 2013-06-21 13:38:56
<글.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43
추강 남효온(1455~1492)은 홍유손, 정희량과 마찬가지로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며 동시에 청한자 김시습의 제자이기도 하다.
아무런 벼슬도 하지 않았던 청한자 김시습은 낡은 옷에 패랭이를 쓰고 14세 위인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타고 가는 가마에 거침없이 다가가 호를 부르며 “강중(剛中)은 편안한가?” 하고 물었다. 또 40세나 위인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와도 허물없는 친구로 지냈다.
이러한 김시습이 20세 아래인 남효온에게는 ‘추강 선생’이라며 언제나 깍듯이 존중하고 아꼈다. 점필재 김종직 또한 항상 ‘우리 추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청한자 김시습은 또한 남효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문을 닫아걸고 공연히 속인들과 만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신(心神)을 길러 그로써 천년(天年)을 보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강 남효온은 김시습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의 반열에 올랐으며, 점필재 김종직이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듯이, 남효온은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필자는 처음에 청한자 김시습이 그토록 아끼던 남효온에게 왜 선도(仙道)를 전수하지 않았을까, 의아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점필재 김종직에게 양보한 것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추강 남효온은 점필재 김종직의 선도를 전수받은 인물이다.
추강 남효온이 점필재 김종직이나 청한자 김시습에게 그토록 아낌과 사랑을 받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한마디로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남효온은 25세의 백면서생으로서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호)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그 용기와 절의(節義)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세조의 왕위찬탈과 함께 단종이 폐위되며 소릉의 능호도 함께 박탈되었으므로, 소릉 복위를 주장함은 곧 세조를 비판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일을 겨우 25세의 백면서생이 나선 것이다.
이러한 남효온은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푸른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어머니의 소원으로 27세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었으므로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효온도 김시습처럼 술을 몹시 좋아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술을 끊도록 당부하자, 곧 술 마시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처럼 충효를 몸으로 실천하는 그는 한번 하고자 한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외고집이었다고 한다.
‘아, 때를 만나지 못한 나의 삶이여!’
이렇게 노래하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포기한 남효온은 홍유손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청담파(淸談派)로 살았다. 모두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문장가들이었으나, 세상을 등지고 시(詩)와 술로서 풍류세월을 보냈다. 남효온은 스스로를 《황정경(黃庭經)》을 잘못 읽어 하늘에서 귀양 온 신하라고 하였다.
二千里外謫南人 이천리 밖 남쪽으로 귀양 온 사람은
四十年前寵辱身 40년 전에 총욕을 받은 몸
坐見歲年閱江浪 해마다 앉아 강 물결만 바라보는데
金鷄何日召@臣 금계는 어느 날에나 귀양 보낸 신하를 다시 부를까.
《황정경(黃庭經)》을 청한자 김시습에게 처음 전해준 인물도 바로 남효온이었다. 남효온은 아마도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김시습은 평소 《황정경(黃庭經)》을 애지중지 독송하였다.
재주와 능력이 있음에도 숨어살며, 자취를 남기지 않는 이인(異人)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남효온의 《추강집》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실려 있다.
남효온과 알고 지내던 한학이(韓學而)라는 사람이 산중 절에서 과거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색 옷을 입은 한 늙은이가 걸식을 하러 왔다가 “선비님은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으십니까?” 묻더니 스스로 답하기를 “저는 평생을 걸식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시를 한 수 써 주고 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더라는 것이다.
게을리 사창에 의지할 땐 봄날이 더디더니
벌써 청춘홍안이 꽃 지듯 헛되이 늙었구나.
세상 모든 일이 다 이와 같은데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 부른들 누가 알아주랴?
꽃 지듯 허망한 인생, 명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충고였다며, 남효온은 이런 이인(異人)들이 우리나라 초야에 얼마나 되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청색 옷은 선도(仙道)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이렇듯 성품이 담백하고 물욕이 없으며 영욕을 초탈한 남효온은 1485년(성종16년) 32세에 금강산과 송도 유람을 시작으로 전국 국토순례에 나섰다. 금강산과 송도는 신라 4선(仙)을 비롯하여 화랑들의 유적이 특히 많은 곳이다.
33세 성종 17년(1486, 병오년) 12월 31일에는 충청도 공주 국선암(國仙庵)에서 섣달 그믐날을 보내며 설을 쇠었다.
公山除日夜生寒 공산의 섣달 그믐날 밤 한기 생기는데
倦聽比丘梵唄聲 비구들의 범패 소리 물리도록 듣노라
從我冠童皆睡着 따라온 어른 아이 모두 잠에 빠져들고
獨隨禪衲守天明 나 홀로 선승 따라 밝은 새벽 지키노라
위 시로 보건데 당시의 공주(公州) 국선암(國仙庵)의 규모는 제법 큰 듯하다. 섣달 그믐날 비구들이 범패를 부르고, 신도들도 많이 와 있으며, 선승과 남효온은 그믐밤을 꼬박 밝히며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다음해 34세에는 공주(公州) 국선암(國仙庵)에서 발길을 옮겨 지리산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전국을 유람한 남효온은 〈유금강산기〉를 비롯하여 〈지리산일과〉〈천왕봉유산기〉〈가수굴유람기〉등의 기행문과 《추강집》《추강냉화》《사우명행록》《귀신론》《사육신전》등의 저서를 남겼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평양에서 지은 〈단군묘 알현〉이다.
檀君生我靑丘衆 단군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강산에 사람이 많지 않나
敎我彛倫浿水邊 패수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치시고
採藥呵斯今萬世 약초를 찾고 형벌을 내린 지 만세가 되어도
至今人記戊辰年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진년을 기억한다네
무진년(戊辰年)은 바로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기원전 2333년이다. 단군에 대한 찬미와 함께 남효온은 관서지방의 고조선, 고구려, 고려 등의 유적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시로서 나타내었다.
또한 강원도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의 사선정(四仙亭)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물새와 여러 돌들, 해당화의 다양성을 글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삼일포(三日浦)는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4선(仙)이 3일 동안 머물렀다 하여 이름이 삼일포(三日浦)이며, 그들이 앉아 노닐던 자리가 바로 사선정(四仙亭)이었다.
또한 추강 남효온이 32세에 쓴 〈수향기(睡鄕記)〉를 보면, 그는 수면공(睡眠功)을 연마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곳은 진실로 아름다우며 화락하고 평이하여 사람이 그 경지에 들어가면 혼혼(昏昏)하고 황홀하여 끝과 언덕을 알 수 없으며, 냉냉(冷冷)하고 양양(洋洋)하여 갖가지 생각을 모두 잊으며, 천연스럽고 자유로움이 발로되어 달인(達人)도 그 경지에 들어가면 허심탄회한 마음이 크게 깨우쳐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마음이 홍몽 이전의 세계에서 노닐게 되며, 혼탁한 세계를 벗어나고 시비를 하는 사물이 없으니, 마음은 절로 밝아진다.’
남효온은 이렇게 ‘수향(睡鄕)’ 속에서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 자기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여 황제 헌원, 장자(莊子), 진박 등 여러 선인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그중에서도 진박은 ‘수면공(睡眠功)’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한번 수면공에 들어가면 여러 달씩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남효온 역시 ‘수향(睡鄕)’을 즐겼다. 그의 인생은 천상에서 온 귀양살이였므로, 그는 귀양살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죽음은 죄가 사면되어 귀양살이를 끝내고,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 영생(永生)을 누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인가? 그는 스스로를 애도하는 시 〈자만(自輓)〉을 써놓고, 39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무양(巫陽)이 나의 충성을 천거하고
상제(上帝)는 나의 재주를 총애하고
용백(龍伯)은 문리(文理)를 타고
우사(雨師)는 티끌을 열고
뇌공(雷公)은 도로를 맑게 하고
나를 맞으러 화양으로 오는데
조서는 붉은 진흙으로 봉하여 추강 언덕에 비추네.
- 중략 -
나를 연화대에 세워
환하게 빛나는 붉은 뜨락에서
차례차례 구빈(九賓)이 맞이하겠지.
소상강나루에선 진명(塵鳴)을 노래하고
필비는 남해곡을 타고
퉁소는 희이와 혼합되고
붉은색 구름은 금술잔에 서리네.
염라대왕 뜨락엔 동궁을 베풀고
광주리를 받들고 현패를 받아 돌아올 것이다.
옥황상제께서는 나를 보고 웃고
신선들은 옆에서 돌아다닐 것이다.
승은이 일조(一朝)에 명성이 팔방으로 떨치리니
명복이 나와 같을 자 누구인가
나를 위해 재물을 쓰지 마라.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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