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백결선생(百結先生)과 금척(金尺)
발행일자 : 2012-07-27 16:17:59
<글.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30
신라의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 414~?)은 거문고가 경지에 다달아, 일체의 희로애락을 모두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섣달그믐 세밑이 되어 남들은 다 떡방아를 찧는데, 쌀이 없어 아내가 슬퍼하자, 백결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사람의 생사(生死)는 명(命)에 있는 것이고,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린 것이오. 오는 것은 거절할 수 없고, 가는 것은 잡을 수 없는 바인데, 그대는 어찌 마음 상해 하시오? 내 그대를 위하여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주리다.”
그리고 거문고를 뜯어 방아 찧는 소리를 내니, 그 소리가 진짜 방아 찧는 소리와 똑같았다. 이에 백결선생의 거문고 소리가 세상에 전해져 ‘방아타령’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백결선생을 음악가로만 알 뿐, 모르는 사실들이 많다. 백결선생은 집안 대대로 대를 이은 연리지가(硏理之家)로서, 천웅도(天雄道, 화랑도의 근원)의 전수자 가문(家門)이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 8월, 경주 낭산(狼山, 경주 소재)에 상서로운 구름이 일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이에 왕은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선령(仙靈)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복지(福地)이다.” 말하고 그 누구도 그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실성왕 13년(414년) 에 백결선생이 태어났으니, 행정지명으로는 양산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이었다. 아버지 충렬공(忠烈公) 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추정))과 어머니 국대부인(國大夫人) 사이에서 3녀 1남 중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관설당(觀雪堂) 박제상은 신라 19대 눌지왕 때의 충신으로,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이며,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영해(寧海) 박씨(朴氏)의 시조이다.
약소국 시절 신라 17대 내물왕은 볼모를 요구하는 고구려에 조카를 보냈다. 조카는 하필이면 자기를 볼모로 보낸 내물왕에게 늘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후일 내물왕이 죽자 내물왕의 어린 아들들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니, 18대 실성왕이었다.
실성왕은 다시 볼모를 요구하는 고구려와 왜국에게 내물왕의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을 각각 보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장자(長子) 눌지를 마저 죽이려고 하였으나, 눌지가 오히려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는 삽라군(歃羅郡, 지금의 경주 양산) 태수였던 박제상의 공덕이 컸다.
왕위에 오른 19대 눌지왕(재위417~458)은 볼모로 잡혀 가 있는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였다. 왕의 동생들을 구해 올 중책을 맡을 사람은 오직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박제상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복호공(卜好公)를 무사히 구해 왔으며, 다시 또 왜국으로 미사흔공(未斯欣公)을 구출하러 갔다.
이때 고구려에서 돌아온 박제상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다시 왜국으로 출발하였다. 뒤늦게 소식을 안 부인은 남편의 얼굴을 보고자 부랴부랴 뒤쫓았으나, 모래사장이 얼마나 긴지 뛰어도 뛰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배가 떠난 것을 안 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고 우니, 그 자리가 경주 남천 벌지지(伐知旨, 두 다리를 뻗음)가 되었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모래사장의 이름은 장사(長沙)가 되었다.
한편 왜국으로 간 박제상은 미사흔을 무사히 신라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왜국에 잡힌 몸이 되었다. 발바닥 가죽을 벗기우고 베어낸 갈대 위를 걷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계림의 돼지는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왜국의 신하 되기를 끝내 거부하였다.
이에 부인이 두 딸 아기, 아경과 함께 치술령(鵄述嶺) 언덕 위에서 바다 건너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으니, 몸은 그대로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바위틈으로 숨었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그 자리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치술령 신모(神母)로 모셨다.
이때 5세의 백결선생과 둘째 누이 아영(阿榮)만 남게 되니, 눌지왕은 아영을 박세상이 왜국에서 구해낸 미사흔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때 백결선생도 누이를 따라 같이 궁으로 들어갔으나, 장성해서 조정에 아첨하는 무리가 많음을 보고는,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빈하게 살았다.
“빽빽한 숲속에 나무가 있으면 묶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고, 빽빽한 가시덤불 속에 난초가 있으면 베지 않아도 저절로 시든다.”
백결선생은 낭산(狼山) 기슭에 살았는데, 집이 가난해서 옷을 백 번이나 기워 입어 마치 메추리를 거꾸로 매단 것 같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동쪽 마을, 즉 동리(東里)에 사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고 불렀다. 낭산은 경주 동쪽에 있었다.
낙향한 백결선생은 아버지 박제상 선생이 지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인 《징심록(澄心錄)》을 연구하였다. 《징심록(澄心錄)》은 3교(敎) 15지(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제1지가 오늘날 전해 내려오고 있는 《부도지(符都誌)》이다.
세종대왕 당대 천재 지식인이었던 김시습 선생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28자를 《징심록(澄心錄)》에서 취하였으며, 박제상 선생의 후손인 영해(寧海) 박씨(朴氏) 들을 각별히 보살폈다고 하였다.
나이 5세에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천재로 인정을 받은 김시습 선생은 《징심록(澄心錄)》과《금척지(金尺誌)》를 직접 읽고 추기를 붙였다. 《금척지(金尺誌)》는 백결선생이 저술한 고대(古代) 역사(歷史) 선가서(仙家書)이다.
영해 박씨들과 김시습 선생의 인연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조상들로부터 비롯되니, 박제상 선생이 고구려에서 구해온 복호공(卜好公)은 바로 김시습 선생의 직계 조상이었다.
그리고 세종대왕께서는 영해(寧海) 박씨(朴氏)들을 두루 보살피어 서울 반궁(半宮, 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서 살게 하며 벼슬을 주었는데, 김시습 선생도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영해 박씨 종가집을 내 집같이 드나들며 한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1455년 세조가 단종의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영해 박씨들은 벼슬을 버리고 한양을 떠나 강원도 철원 복계산 금화현(金化縣)으로 들어갔는데, 김시습 선생도 세한지맹(歲寒之盟)으로 이들을 따라 같이 갔다.
이때 김시습 선생은 영해 박씨 종가집에 전해지는 《징심록(澄心錄)》과《금척지(金尺誌)》를 읽고, 고대어인 원본을 당시의 문장으로 적었다. 그리고 금척(金尺)에 관한 유래와 형상, 논평 등을 기록하여 《징심록 추기(澄心錄追記)》를 썼다.
‘금척(金尺)’은 국가 통치권의 상징으로 천부경(天符經)의 이치를 본떠 만들었는데, 그것을 금(金)으로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자[尺]로 제작한 것은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렇듯 ‘금척(金尺)’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권(王權)의 상징물로서, 단군 고조선 부루단군 때도 있었고,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 왕이 지니고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몽금척(夢金尺) 후 조선을 개국했으며, 대한제국 때의 고종 또한 가장 큰 훈장을 ‘금척대훈장’으로 삼았다.
하늘의 소명을 받아 이 금척(金尺)을 보유하고 있는 집안이 바로 백결선생의 집안이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도산(仙桃山)에 살고 있는 마령간(麻靈干, 백결선생의 자손)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으며, 고려의 현종은 거란이 침략했을 때 강감찬 장군을 보내 방책을 물었으며, 조선 세종대왕은 영해 박씨들을 궁궐 가까이 불러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폈던 것이다.
사록에 의하면 박혁거세 왕이 38개의 똑같은 무덤을 만들어 금척(金尺)을 그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니 38개 중 어느 한곳에 금척이 묻혔을 터인데, 지금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는 도로 공사로 인해 훼손된 것 말고도 30여 개의 고분이 남아 있다.
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평정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척(金尺)을 탐내어 금척리 일대를 파내고자 하였다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제1설. 조정에서 일심단결로 “공사한 사람이 죽어서 어느 무덤에 묻혔는지 모른다. 왕실의 무덤을 다 파 제낄 수는 없다.”며 소정방을 제껴 버렸다.
제2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금척을 찾으려고 금척원 지역을 파내었다. 이때 최씨라는 사람이 금척을 몰래 감춰가지고 바다 건너 가 땅 속에 묻었다가 몇 년 뒤에 다시 가지고 돌아와 그 스승에게 반환하니, 스승이 금강산 바위굴 속에 깊이 감춰버렸다.
아무튼 금척(金尺)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비(神秘)한 신기(神器)라 하였거니와, 백결선생의 시(詩) 1편을 보자.
하늘이 사람을 내었으니, 모든 것이 하늘에 매였노라.
임금을 잃고 또 얻음, 그 역시 하늘이 할 일이러다.
얻거나 잃거나가 모두, 한갓 나를 위함이 아니려니.
오거나 가거나를 탓하여 무엇 하리.
세상에 별한 낙 없나니, 한갓 내 천명(天命)을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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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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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인님 // 5회 칼럼 ,, 무도-무예-무술의 정의를 읽어 보시면 그 안에 답이 있습니다.
2012-08-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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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놀라운 것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몇 천년 전의 성인들께서 그렇게도 지혜롭고 능통하셨는데.. 최첨단 현대를 살고 있다는 우리들은.. 그분들 반도 못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참 놀라울 뿐입니다..
2012-08-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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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는 1953년 프린트본으로 처음 출간되었는데, 1986년 기린원에서 정식 출판된 것이 있구요, 최신판으로는 한문화에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징심록, 징심록 추기, 백결선생 이야기, 금척 이야기 ..
2012-08-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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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아이에게 국선도와 태권도의 차이를 가르쳐 줄 수는 없지요.
그에게서 유치원에서 배운 태권도의 관점으로, 국선도를 바라보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답니까?
하여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거지요!
우물안 개구리에게 우물밖 세상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도 스스로 찾아와서,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에게도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음을 말하는 거지요.
스스로 자족하다면, 여기 들여다 볼 이유도 없지요!
부족하니까, 여기저기 기웃기웃!
2012-08-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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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놀라운 것은, 도대체 이 구구절절한 내용을 어디서 찾아내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백결선생이 박제상의 친아들이라니... 과문한 저로선 금시초문인데, 이것이 과연 기존에 시중에 알려진 사료에 근거한 것인지 또는 완전히 새로운 출처에서 나오는 정보들인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박제상의 부도지는 들어봤지만, 징심록이나 다른 구체적인 서적명 등등 이런 세세한 기록들이 이미 다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다는 말인가요?
참 흥미롭습니다!2012-08-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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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으신 말씀입니다.
2012-07-3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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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시무술이라^그건현행법령상의 형식적분류 아닌가요..태권도는확실히창시무술이죠..단전호흡과 선도사상을 기초로하는 국선도가 과거역사의 전승을가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것 같습니다.비판하려면 내용적으로 사이비라고하는편이좋지않을까요.
2012-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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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인께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道가 단절 됐다고 보십니까?
2012-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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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 일은 우리가 알고, 그 집안 일은 그가 안다.
2012-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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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는 우리민족고유의 내외공수련법입니다.
우리민족과 역사를 함께해온 전통무예라 할 수있습니다.2012-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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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시무술인 국선도에서 옛 선인들의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을 역어나가는 것은 일반인들이 해당 무술의 본질을 왜곡 이해하기에 근거없는 설화나 역사적 인물을 내세우는것은 옳은 기고는 아니다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2012-07-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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