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화랑들의 우정과 신의(信義)
발행일자 : 2012-03-23 19:00:13
<글.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23
신라 화랑들은 도의로서 연마하고(相磨以道義),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기며(相悅以歌樂), 산천을 찾아 노닐었는데(遊娛山水), 먼 곳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無遠不至)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맺어진 화랑들의 우애는 속세를 초월하여 지극히 고매한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갔으며, 죽음까지도 함께 하는 숭고한 것이었다.
화랑들은 의(義) 없이 사는 것은 의(義) 있게 죽는 것만 못하게 여겼으며, 위로 국가를 위할 뿐 아니라, 아래로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기도 서슴치 않았다.
1. 사다함과 무관랑
무관랑(武官郞)은 사다함(斯多含)이 나이는 적으나 의(義)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귀의하였다.
“공자(公子)는 실로 옛날의 신릉(信陵)과 맹상(孟嘗)입니다. 기꺼이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사다함은 “제가 어찌 감히 거느리겠습니까?” 말하며, 목숨을 같이 하는 벗이 되자고 약속하였다.
이렇게 사우(死友)를 약속한 사다함과 무관랑은 진흥왕 23년(561년), 대가야의 수만대병이 신라에 쳐들어왔을 때 함께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칼을 품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가야군을 대파하였고, 신라가 승리를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관랑이 죽으매, 사다함은 통곡하기 7일 만에 따라 죽으니, 이때 사다함의 나이 17세였다.
2. 죽지랑과 득오랑
죽지랑(竹旨郞)은 부원수로서 김유신 장군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김유신 장군에 가려져, 죽지랑에 대한 평가는 그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죽지랑은 성품이 착하고 인정이 많아, 낭도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하루는 늘 곁에 보이던 득오랑이 여러 날 보이지 않자, 궁금해서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자 그 어머니 하는 말이 “모량부의 관리 익선이 득오를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죽지랑은 떡과 술을 해가지고 낭도들과 함께 득오랑을 찾아갔다. 역시 득오랑은 익선의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죽지랑은 득오랑을 불러 낭도들과 함께 가져간 음식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죽지랑이 득오랑을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하자, 관리 익선이 거절하였다. 그때 마침 간진이라는 관리가 벼 30섬을 운반하다가 이 모습을 보고, 낭도를 생각하는 죽지랑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였다. 그래서 간진은 운반하던 벼 30섬을 익선에게 주면서, 죽지랑의 청을 들어주라고 하였다. 그래도 익선이 거절하자 말안장까지 얹어 주니, 그제서야 익선이 득오랑을 놓아주었다.
이토록 자기를 아껴주는 죽지랑의 뛰어난 인품에 감동받은 득오랑은 이후 더욱더 열과 성을 다하는 낭도가 되었다. 그리고 죽지랑이 죽으매, 그를 사모하는 노래〈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었다.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
눈 깜박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낭(郎)이여! 그리는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이까.(죽어서 다시 만나리.)
고매한 인품의 죽지랑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과, 행여 무심치 않다면 저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3. 임신서기석의 두 화랑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신라의 두 화랑이 학문을 힘써 닦고 실천할 것을 맹세하여 기록한 비석으로, 글자는 뾰족한 송곳 같은 것으로 다소 거칠게 새겨져 있다. 모두 5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용은 이렇다.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고 기록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행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도, 실천할 것을 맹세한다. 또 지난 신미년(辛未年)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기를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로 맹세하였었다.'
4. 기파랑과 충담사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는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사모하여 향가(鄕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었다.
헤치고 달아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어디에
새파란 시내 속에
기파랑(耆婆郞)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郎)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 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구름을 활짝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좇아 떠나니, 어디인가?
새파란 강물에
기파랑(耆婆郞)의 얼굴이 비쳐 있구나.
여울내 물가에
임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 싶구나.
아,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서
서리조차 모르실 화랑이시여!
충담사(忠談師)는 구름 속에 나타난 달과 하늘에서 기파랑(耆婆郞)의 순결한 모습을 보고 있다. 또 은하수와 잣나무에서 기파랑의 이상(理想)과 절조(節操)를 보며 찬미하는 뜻이 높은 향가이다. 화랑 기파랑(耆婆郞)의 고결하고 숭고한 행적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마음이 담겨 있다.
승려의 신분으로 화랑도에 속하였던 이는 충담사뿐만이 아니었다. 월명사(月明師) 또한 경덕왕(景德王)이 기도문을 지어달라고 하자 “저는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단지 향가(鄕歌)만 알뿐, 범성(梵聲)에는 능숙하지 못합니다.” 고 대답하였다.
진자사(眞慈師) 또한 국선 미시랑(未尸郞)을 오래 사모하여 “미시랑의 자비스런 혜택을 많이 입고, 맑은 덕화를 친히 접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혜숙(惠宿)도 호세랑(好世郞)의 낭도로 있다가, 호세랑이 국선(國仙)에서 물러나자 혜숙 역시 낭도(郎徒) 생활을 그만두고 시골에 은둔하였다.
이밖에도 화랑도에 속한 승려들은 전밀(轉密), 안상(安常), 범교(範敎), 원광법사, 원효대사, 도선국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이 더 있다.
5. 귀산과 추항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화랑은 우정이 돈독한 벗으로서 함께 원광법사에게 나아가 지켜야 할 가르침을 청하였다.
원광법사(圓光法師)는 화랑도 집안에서 태어나, 화랑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승려였다. 친할아버지가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이며, 아버지가 제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이고, 동생이 제12세 풍월주 보리공(菩利公)이고, 조카가 제20세 풍월주 예원공(禮元公), 조카의 아들이 제28세 풍월주 오기공(吳起公)이었다. 그리고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지은 김대문(金大問)은 바로 오기공(吳起公)의 아들이었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집안은 이렇게 위 아래로 5대를 내리 풍월주(風月主)를 역임한 집안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이었다. 원광법사는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법해 주었다.
1. 사군이충(事君以忠) -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2. 사친이효(事親以孝) - 부모에 효도하며
3. 교우유신(交友有信) - 벗은 신의로서 사귀고
4. 임전무퇴(臨戰無退) - 전쟁에 임해서는 후퇴함이 없어야 하며
5. 살생유택(殺生有擇) -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이 5가지 실천 덕목은 원광법사가 처음 설한 것은 아니었다.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전래하여 내려오는 소도(蘇塗) 정신이었으며, 국선(國仙)의 5대 강령(綱領)이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또한 제7세 풍월주를 역임한 설화랑(薛花郞, 572~579)이 증조부가 된다. 이런 집안의 내력으로 인하여 원효대사 또한 풍월도(風月道)를 수련하게 되는데, 이는 춘원 이광수가《종풍당 수련기》란 제목으로 작품화 한 바 있다.
6. 영랑, 술랑, 남랑, 안상
신라 당시 전국토의 인심을 풍미했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4선(仙)은 어디를 가나 늘 함께 하였다.
이 4선(仙)은 무릇 수천 년 나라의 정수(精髓)요, 정신의 중심(中心)이요, 무사(武士)의 혼(魂)이라 할 만한 영향력을 당시대 신라 사회에 끼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랑(永郞)은 우리민족 고유의 선맥(仙脈)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학(鶴)이 논 곳에 깃털이 남는다고, 4선(仙)이 노닐던 금강산과 관동팔경 동해안 일대에는 4선(仙)의 유적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속초에는 영랑호(永郞湖)가 있으며, 양양(襄陽)과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와 강릉 한송정(寒松亭) 등에는 4선비(四仙碑)와 4선정(四仙亭) 등이 남겨졌다. 그리하여 후학들에게 많은 시상(詩想)과 풍류(風流)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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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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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자리비움님 글을 뵈니 굉장히 반갑습니당 ~ ^^*
2012-04-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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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좋은글 감사합니다.모두가 선도수련해도 진도에 차이가잇듯이 인간일인지라 삼국간에도 격차가잇엇고 그것이 결국 흥망으로 이어진듯합니다. 오늘날수련인들에게도 타산지석이 아닐가요. 개인적으론 고구려가 성햇으면하는바람이지만 . 특히 연 개소문을 좋아합니다.
2012-04-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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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동시대인 현대를 살고 있는 북창 정렴의 직계 자손인 정재서 이대 교수는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단전호흡을 실천하셨는데, 이것은 옛날부터 花郞道들이 했던 비법이라고.. 물론 할머니는 남편인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계시다가 손자에게 다시 전한 것이다.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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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창 정렴의 후손인 조선시대 정두경은 .. 우리 동방은 산수가 천하에 빼어나서 단군과 기자 이래로 仙道를 수련하는 사람이 분명히 많았었다고 하였다.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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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북창 정렴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 도사가 조선에도 자기와 같은 도사가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는 三神山이 있어, 白日昇天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보는 일인데, (도사가) 무슨 귀한 일이나 되겠는가? 중국인 도사는 진시황이 죽지 않는 불사약을 구하려고 방사들을 東國의 三神山에 보낸 걸 잘 알고 있는지라, 코가 쑥 들어갔다.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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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밑에 무도인님... 이 칼럼기사의 제목을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하신다면 뭐라 대답을 해야할지... 서울대 무슨 과를 나와서 1970년대 말엽 합동통신 기자를 했던 국선도 사범 차장량이 단학, 단학인 이라는 두 권을 책을 쓰고 그 책에 나온 수련법(말하자면 국선도의 기초 수련법을 왜곡 변형시킨 )을 주 프로그램으로 하는 단학선원이라는 단체를 1985년에 만들었다가 2년 후에 천안에서 깡패하던 이승헌에게 빼앗겼는데... 설마 그 단월드에서 하는 수련법이 신라 화랑도의 수련법이겠습니까?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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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화랑이 수련한 선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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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직접 추진한 제도였으니, 강력하게 기능을 하였겠지요 ?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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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풍(國風)을 되살리는 민족국가 진흥 발전책으로서, 국가 차원에서, 왕이, 직접, 추진한, 인재양성 제도, 제도, 제도, 국가 제도 ... 왕이 직접 추진한 ... 국가 제도 ...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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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은... 고구려의 모든 제왕들이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수도를 통해 직접 그 몸으로 효과를 다 보았을 터인데.... 왜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처럼 융성하게 시행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고구려나 백제도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나, 신라는 그 두나라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게 실시되었던 것이었을까요?... 그야말로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서 화랑도로 이어진 우리 고유의 선도수련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 그때의 상황을 세세하게 밝혀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걸 아는 분이 계시다면 말입니다.....
2012-03-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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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인물 성충이 의자왕에게 말하길, 신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한 것은, 민족 고유의 선도, 풍월도를 국가적으로 다시 불러 일으킨 이후부터라고 하더군요. 삼국사기에 나와요.
2012-03-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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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범국가적인 인재 양성 제도로..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3국 중 신라가 가장 약했던 나라이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 극치적으로 작동시켰겠지요 .. ^^
2012-03-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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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배달겨레의 현묘지도의 전통은 삼국 모두에 이어졌을 터이고, 실제로 역대 고구려의 모든 제왕들이 그 현묘지도를 닦았다고 하며, 고구려 제6대 임금인 태조대왕은 100세에 왕위에서 물러나 120세까지 수도를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으며, 백제에도 마찬가지로 현묘지도가 전해져 내려 왔다고 하는데, 왜 삼국중 가장 작은 나라인 신라에서 가장 융성하게 이어졌던 것인지 참 궁금합니다.
2012-03-2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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