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KAS IN USA] ‘왕 주먹’ 액션스타 타이거 양

  


엄청난 주먹이었다. 취재진에게 악수를 청하며 움켜쥔 그의 손 위로 네 손가락 마디 부분의 '정권'은 무술 단련의 결과물이자 수련의 계급장이었다. ‘양성호’, 미국명 타이거 양(65)과 취재진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현재는 미국 오렌지카운티 플라톤에서 무예도 도장을 운영하며 국제무예도연맹 총재로 살고 있지만 그의 뿌리는 분명 한국의 무덕관, 그리고 태권도였다. 이소룡의 사망유희, 정무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으며 1970년대 글로벌 액션스타로의 꿈에 다가섰던 그의 인생 역정을 들어봤다.

미국 현지에서 무카스와 인터뷰 중인 타이거 양

- 타이거 양의 무술 수련기

“어릴 적 아버지는 평양 박치기로 유명했습니다. 자릿세를 걷는 불량배들을 박치기로 혼내주었던 사건이 순식간에 소문이 난 것이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안다리걸기라고 동작을 설명하며 이것이 택견이라고 알려주기도 하셨습니다. 몸을 부드럽게 움직여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술을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았던 것이죠. 이후 무술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저는 중학교 시절, 경주의 무덕관에서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겨울에 얼음을 때렸고, 넓적한 돌을 향해 피가 터질 때까지 주먹질을 했습니다. 당시 동기인 권영문 사범과 같이 무덕관 출신의 장전호(홍종수 사범의 친구) 사범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967년, 타이거 양은 맹호사단에 소속되어 베트남 전쟁에 헌병 병과로 참전했다. 군 제대 이후 우연히 접하게 된 ‘차력’이 그를 영화배우의 길로 안내했다. 6개월여 간의 수련 끝에 5톤 트럭에 사람을 싫어 나를 정도로 그의 기량은 급성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 “한번은 저의 '정권' 위를 차의 바퀴가 지나가도록 하는 차력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맡은 저의 제자가 겁이 나서 차를 아주 조심스레 천천히 움직이는 바람에 주먹 전체가 한 30cm 끌려 간 적이 있었죠. 피 범벅이었죠(웃음).”

- 영화와의 인연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에는 ‘암살자 063’에 문정숙-황해와 같이 출연했습니다. 형사반장을 맡았죠. 하지만 제대로 된 영화 출연은 1975년, 이두용 감독의 ‘뉴욕 44번지’와 홍의봉 감독의 ‘코메리칸의 낮과 밤’에 출연하면서부터 시작되었죠. 당시 액션스타 부르스 리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해외 진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죠. 홍콩의 유명 허리우드 감독인 로레이가 저를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이후 크고 작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죠.”

여기서 아픔 하나, 홍콩 영화 출연 초기 타이거 양에게 주어진 배역은 전부 악역이었다. 실컷 두드려 맞고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고는 장렬히 전사하는 ‘전문 악당’이었다. 촬영장의 많은 배우들이 그를 향해 “띠우리우람(바보)”이라고 놀려대기도 했을 정도로 설움과 괄시는 심했다.


영화 포스터 속의 타이거 양

- 한국인인 당신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발차기였죠. 당시 세계의 액션 영화의 동작은 거의 손 기술 위주였습니다.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저는 능수능란하게 발차기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홍콩의 배우들이 아침에 조깅을 하는 저를 기다렸다가 옆차기, 뒤차기 등을 배웠을 정도였으니까요. 태권도 발차기를 할 줄 아는 저는 희소성 있는 액션배우였죠. 쿵푸의 시대가 가고 무언가 새로운 대안을 필요로 하던 시기에 제가 감독의 눈에 띠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온 계기?

“1970년에 미국 워싱턴주의 CIA를 가르치는 태권도 사범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6개월간의 계약이었죠. 그런데 미국 생활이란 것이 하면 할수록 매력이 있더군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다행히도 저에게는 언어 소질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언어도 6개월 만에 회화가 가능했으니까요. 여러 조건들이 저를 미국에 잡아두었던 것 같습니다. 허리우드에 대한 꿈도 이루고 싶었구요.”

-미국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영화촬영을 위해 뭔가 미국에서 이슈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영화 출연을 준비하던 차에 꼭 필요한 것이었죠. 저는 지역 신문에 마이크 타이슨과의 공개 대결을 알렸습니다. 머리를 쓴 것이죠. 예상외로 대결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돈킹과 제 매니저와의 만남도 이뤄졌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돈킹측에서2,000만불을 걸라고 하더군요. 저에게는 진 하츠릭이라는 미국의 유명 투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저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돈킹 측에서 리안 스핑크스라는 챔피언을 추천했습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OK'를 했죠. 캘리포니아 빅배어에 훈련 캠프를 차려 놓고, 연습에 돌입했습니다. 앞서 안토니오 이노끼와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전 당시에도 알리의 훈련 코치를 잠시 맡았던 적이 있는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우선 리안은 팔이 길기 때문에, 전 들어오는 상대의 옆구리를 옆차기로 공격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뽑힐 때까지 옆차기만 찼습니다. 그런데 이거 왜 날벼락입니까. 시합 2주를 남겨놓고 리안의 아들이 총에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경기는 취소됐죠. 정말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만약 제가 리안을 이겼으면 ‘타이슨과 VS 타이거양’의 역사적 대결이 이뤄졌을텐데요. 아쉽습니다(웃음).


타이거 양의 홍콩 배우 시절 모습

- 사범이라는 직업, 미국 정착 초기 힘들지 않았나요?

“미국인들 앞에서는 발차기 100번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대로 무언가를 보여줘야했습니다. 벽돌 10개를 깨고, 직접 그들의 손과 발을 꺾고, 바벨 200 파운드를 이빨로 끌었습니다. 그들의 입을 떡벌어지게 한 것은 뭐니해도 양쪽 팔에 밧줄을 묶고 20여 명의 사람들이 각 양쪽에서 저를 끌게 하고 저는 이를 버티는 시범이었죠. 저는 쇼맨십이 아주 강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미국 최고의 진기명기 쇼였던 ‘that's incredible’에도 출연했죠. 차력과 태권도 시범으로 주가를 높인 것입니다. 때문에 주변 한국 사범들로부터 저는 항상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도장 문을 닫으라는 압력도 많이 받았습니다.”

- 당신의 교육 철학은?

“무도인들의 가치입니다. 왜 20년, 30년 태권도를 수련하고 가르치는 마스터들이 7년, 8년 공부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사람들보다 낮은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태권도와 사범들이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무술에 대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방향을 설정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의 지향점입니다.”

현재 타이거 양은 캐나다 벤쿠버와 미국 플러튼, 시카고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파키스탄 등지에 39개의 무예도 도장을 운영 중이다. 태권도의 이점을 보완해 타이거 양이 창시한 독창적 무술이다. 플러튼에 위치한 이 무예도 도장에만 현재 600여명의 제자들이 수련 중이다.

-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

“태권도를 안했으면 정치인이 됐을 것이다. 제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기 때문이죠. 아버지의 소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느덧 66살이 되었습니다. 해놓은 일을 잘 마무리 해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꼭 한 가지 말해야 한다면 이거 하나 만큼 해보고 싶다는 그였다. “저의 일생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미국의 파이브스타 프로덕션이라는 유명 제작사가 저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제작을 제의했습니다. 꼭 완성작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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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지네요

    멋있으십니다.이런 스타들이 태권도를하고살고 도장을 운영하니 미래가 밝습니다화이팅

    2010-09-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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