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백제(百濟)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32



백제의 찬란한 사상(思想)과 문화(文化)는 일본의 고대문화를 꽃피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백제의 혜총(惠聰)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었으며,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 박사는 한학과 천자문을 전해 주었다. 미마지(味摩之)는 음악을 전해 주었으며, 하성(河成) 또한 미술을 전해주고 일본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남겼다.

그 밖에도 천문(天文) 역법(曆法) 지리(地理) 화공(畵工) 와공(瓦工) 경사(經師) 율사(律士) 의사(醫師) 들을 보내주는 등, 백제는 일본의 문화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옛날에는 승려로서 선도(仙道)를 함께 닦은 이들이 많았는데, 602년 음력 10월에 백제의 승(僧) 관륵(觀勒)이 일본에 역서(曆書) 천문(天文) 지리(地理) 둔갑(遁甲) 방술(方術)을 전해 주고, 일본의 서생(書生) 3명을 뽑아서 본격적으로 학습시켰다. 양호사(陽胡史)의 원조 옥진(玉陳)은 역법을 배우고, 대우촌주(大友村主)인 고총(高聰)은 천문 둔갑을 배우고, 산배신(山背臣)인 일입(日立)은 방술을 배워 학업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연고들로 인하여 백제가 신라와 싸우기 위해 일본에 군사를 청하니, 일본 천황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백제는 예로부터 고유(固有)의 도(道)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들어와 그 도(道)를 돌보지 않으니, 이제부터라도 그 고유의 도(道)를 부활하여 닦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 《일본서기(日本書記)》흠명천황(欽明天皇) 조(條).

또 1971년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동경면(銅鏡面)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尙方 作意眞大好 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 飢食棗壽 如金石兮. 뜻을 세우니 참으로 좋고, 위에 선인(仙人)이 있음에 늙음을 알지 못함이라. 목마를 때 옥수(玉水)를 마시고 배고플 때 대추를 먹으니, 금석과 같이 단단하다.(오래 산다.)

특히 1993년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는 삼신산(三神山)을 중첩하여 표현하였으며, 산악숭배와 불로장생(不老長生) 신선사상(神仙思想)을 표현한 대표적인 향로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백제에도 고유의 도(道) 신선도(神仙道)가 있었음이 명백하다.

고대(古代)로부터 계승된 우리민족의 태양숭배 사상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三國)에 그대로 전해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태양숭배 사상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가 그려져 있고, 신라 미추왕(味鄒王) 이사금(泥師今)의 보검에도 삼족오가 새겨져 있고, 백제 고이왕(古爾王)의 초상화에도 삼족오 문양을 새긴 관(冠)과 신발을 신고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三國)의 기와에도 고조선 치우천황의 형상이 새겨져 계승되고 전해지는 것 또한 동일하다.

그러나 고구려에 을파소가 ‘조의선인(皂衣仙人)’ 제도를 정착시키고, 신라 진흥왕대에 ‘화랑도(花郞道)’를 설치한 것처럼, 백제에는 어떤 인재양성 제도가 있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세인(世人)들의 입을 빌어 몇 가지 명칭이 오를 뿐이다. 국선도의 스승님들은 닦을 수(修), 선비 사(士), ‘수사(修士)’와 ‘박사(博士, 닦음이 완숙한 자들)’ 제도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책에는 ‘무사의 충절’을 의미하는 ‘무절(武節)’이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싸울아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이야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三國)의 고유 도(道)와 핵심 사상(思想)은 같다는 점이다.

백제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안타깝게도 역사의 잦은 외침과 내전으로 인하여, 전해 내려오는 문헌들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1. 당나라의 이적과 소정방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고구려와 백제의 국서고(國書庫)를 모조리 불질러버렸다.

2. 통일신라에 남아있던 문헌들은 고려(高麗)가 모두 없앴다.

3.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여 한국사(韓國史)를 전부 소탕하였다.

4. 송나라 사람 호종단이 고려에 거짓 귀화하여 예종·인종 시대에 고관(高官)으로 등용된 뒤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찬란한 역사를 기록한 금석물(金石物) 들을 전부 타도하였다.

5. 사대주의를 대표했던 김부식(金富軾)이 존화주의에 취하여 역사적 사실까지도 위조해 가며, 국풍파(國風派)의 사상이 담긴 사료들은 모두 고의로 누락시키고 삭제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뒤에, 일체의 고유사상을 담은 기록들을 멸종시키고, 오직 자기가 편찬한《삼국사기》1권만이 홀로 당시 사회의 유일한 역사가 되도록 하였다.

6. 유교(儒敎) 성리학을 토대로 건국한 조선조 지배 세력들에 의해 고유사상(固有思想)이 기록된 서적들은 철저히 폐기되고 왜곡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7), 예종 1년(1469), 성종 즉위년(1469), 3차례에 걸쳐서 왕명(王命)으로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명(命)하여 ‘민족고대사(民族古代史)’에 관련된 비서(秘書)들을 국가에서 회수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세조 3년 5월, 팔도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表訓)》《삼성밀기(三聖密記)》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의《삼성기(三聖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사량훈(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 왕거인(王居人) 설업(薛業) 등 3인(人) 기록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과《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銑漢都讖記)》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된다.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과 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했다.

이 밖에도 10여 년 뒤인 예종 1년(1469) 9월과 같은 해인 성종 즉위년(1469) 12월에도 민족고대사(民族古代史)에 관련된 비서(秘書)들과 천문·지리·음양에 관한 책들이 또다시 왕명(王命)으로 수집되고 세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비서(秘書)들을 바친 자에게는,

1) 양반의 경우는 2품계를 높여주고
2) 상(賞) 받기를 원하는 자나 천민들의 경우에는 면포 50필을 상으로 주고
3) 책을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하라, 는 극단적인 명령도 함께 하달되었다.

그리고 책을 숨긴 자를 고발한 자에게는 1)과 2)의 항목에 따라 상을 준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시황의 분서(焚書) 사건과도 같은 토착사상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이었다.

민족문화의 저변을 이루며 기층문화를 형성해 온 이러한 고유사상의 사유체제는, 유교(儒敎) 성리학을 토대로 조선을 건국한 조선초기의 지배세력들에 의해 이렇게 철저히 왜곡되고 폐기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대(歷代)의 비서(秘書)들이 수백년래 경복궁중에 숨어, 내외하는 처녀적 사적(史籍)이 되었다가,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 사장(死藏)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조선총독부가 한국 상고사(上古史)의 실체가 기록된 사서(史書)들을 20만 권을 수탈하여 불살라 버렸다.

역사가 이러하니, 토착 고유사상(固有思想)이 담긴 한국사(韓國史)가 씨가 마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백제인의 무사도(武士道)와 희생정신이 얼마나 강하였던지는 백제의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백제 제2대 다루왕(多婁王, 28~77) 때는 신라의 침략을 받아 와산성(蛙山城) 수비병이 끝까지 싸우다가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 가운데 단 1명도 신라에 항복한 사람이 없이 전원이 참수되었다.

이는 신라 화랑도의 ‘죽음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과 한치도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것이었다.

또한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계백(階伯) 장군이 죽음을 결심하고 자기의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전쟁터에 나간 사실을 보면, 백제 무사(武士)의 충절과 희생정신이 얼마나 강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황산벌싸움에서 계백장군은 5천 군사로서 나·당연합군의 5만 군사를 대적해서 싸워야 했다. 이때 계백장군은 군사들을 이렇게 격려하며 기세(氣勢)를 불살랐다.

“옛날 월(越)나라는 5천 군사로서 오(吳)나라의 70만 군을 격파하였으니, 저 신라의 5만 군사쯤이야, 단칼에 해치우고 승리하자!”

백제의 군사들은 계백장군이 자신의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나온 것을 아는지라, 불타는 용맹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그러한 기세로 신라군을 진격하니, 5만의 신라군이 5천의 백제군 앞에서 쩔쩔매었다.
이때 창을 비껴들고 달려든 화랑 관창을 사로잡고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낸 것만 보더라도, 백제 무사도(武士道)의 정신이 얼마나 신사적이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관창이 재차 돌진해 오매, 할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꼬리에 매달아 보낸 것이, 백제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되었다. 관창의 잘려진 목을 본 신라 군사들이 의분을 일으켜 용맹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싸움은 역전되었다. 그러나 계백장군을 비롯하여 백제 군사들은 끝까지 용맹스럽게 사비성을 사수하다가, 모두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백제는 비록 망했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계속해서 백제에 희망을 걸고 있다. 조선시대 천재학자 청한자 김시습은 백제가 민속이 강하고 사나우며, 싸움을 보면 굽힐 줄 모르고, 회복을 다짐하고 있음이 백제의 유풍이라 하였다. 그리고 백제가 뜻을 이루려면 사람들이 공부하여 강하고 굳센 민속을 다듬어 좋은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고 하였다.

**편집부의 사정으로 연재가 늦어진 점 양해 바랍니다.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백제 #국선도 #일본서기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