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기 택견의 의의

  


택견의 초대기능보유자 송덕기옹

택견은 1983년 6월 1일에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며, 송덕기는 그 택견의 초대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그의 제자인 신한승(신승)과 함께 현재의 택견으로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인물이다.

송덕기(현암)는 계사생(癸巳生)이라 하였으니,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고종 30년) 1월 19일 서울 필운동 삼거리에서 상업(잡화가게)에 종사하던 송태희(宋泰熙)의 7남7녀중 막내로 출생하여, 1987년에 타계하였다.

현암이 출생할 당시는 조선말기로, 갑오경장을 중심으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격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현암이 출생한 이듬해인 1894년(고종 31)부터 189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추진된 갑오경장은 비록 일본 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한 것이기는 했으나,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점이 될 만큼 중요한 제도개혁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학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전쟁 등 여러 가지 개혁운동으로 인하여 가장 혼란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개국기원을 사용함으로써 淸과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났고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고 종래에 명확한 구별이 없었던 재정도 분리시켰다.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혁하고, 司法權은 행정기구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켰으며, 관제개혁과 관련하여 과거제도를 폐지하였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재정을 일원화하고, 銀本位制를 채택했던 시기이다. 또 조세도 종전의 物納制를 金納制로 바꾸고,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사회면에서는 더욱 획기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門閥과 班常의 구별을 없애고 노비제도를 폐지되고, 연좌제가 폐지되기로 하였다. 특히 중요한 사건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갑오경장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함에 따라 당시 일반인들의 사정은 피폐해지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94세의 나이에 활개짓을 하고 있는 송덕기 옹

모든 면에서 격변기였던 당시에 어린 나이였던 현암은 상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덕분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인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같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많은 사람과 접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의 출생지가 필운동이고, 그 주변이 한국에서 마지막까지 택견을 행하던 장소였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큰 도움이 되어 택견을 접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필운동은 누상동, 누하동, 사직골과 함께 서울에서 마지막까지 택견이 성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택견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리라 사료된다. 또한 상업에 종사했던 가정환경으로 인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아 자연스럽게 택견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암은 자신이 택견을 수련하게 된 경위에 대해 자신의 저서인 『전통무술 택견』(1994)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택견이 어떻게 해서 발생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한말까지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택견을 했었다. 나는 12세부터 필운동에 살던 임호(林虎)라는 택견의 명인을 만나서 택견을 배우기 시작했다(송덕기, 1994).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직(社稷)공원 뒤 감투바위에서 임호(林虎)에게 4년간 택견을 배운 현암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필운동 부근인 누상동, 누하동, 사직골 등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에서 성행했던 택견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교습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정도일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즉, 환경적 영향으로 인해 마을의 택견꾼이나 선배들을 따라 택견판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임호라는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직접적으로 깊이 있게 택견을 수련하게 된다. 또 10대 후반부터는 마을의 택견꾼들과 함께 사직골, 유각골, 옥동, 애오개 등의 택견꾼들과 겨루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동작이 빠르고 정확하였다. 특히 솟구치며 쓰는 발길질이 뛰어나 동네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대부분 연습은 인왕산 황학정 옆 감투바위터에서 실시되었다.

현암이 택견을 익히던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의 사직골, 유각골, 삼청동, 애오개와 같은 곳에 태견꾼이들이 많이 있어서, 단오날이면 서로 이웃마을 택견꾼들과 수를 겨루었다(김명곤, 1995)"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환경적 영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의해 택견 수련이 금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찍부터 택견을 접한 현암은 1910년(17세)에 결혼을 한 후 군에 입대하여 3년간 조선보병대에 군생활을 한다. 그가 군에 입대할 당시에는 서양의 축구가 일본을 통해 처음으로 유입될 시기였는데, 현암은 축구를 경험하기도 한다.


후일에는 축구와 관련된 기사도 보인다. 불교축구 선수단에 선수로 발탁되어 선수 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23세 때 군을 제대하고 26세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평양 축구단과의 경기에 참가하기도 한다. 또한 군시절에는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사병들에게 뜀틀과 철봉 등의 근대식 체조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탄압이 강해지면서 민속경기의 일종인 택견 수련이나 시합이 철저히 금지를 당했고, 집안의 만류에 의해 1913년에는 국궁에 입문하여 황학정에서 국궁을 익히기도 하였다.

국궁에 관해서는 이후 명궁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으며, 생전까지 택견과 함께 국궁을 실시하여 한국인물도감에 국내에서 활을 가장 오래 쏜 인물로 오르기도 하였다. 현암의 젊은 시절은 이같이 택견뿐아니라 국궁과 서양체육인 축구와 체조를 하는등 왕성한 체육활동을 보여주었지만 무술계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 이후 현암의 무술적 경력을 인정하기 시작한 시기는 1958년을 계기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경무대에서 택견을 시연하게 된 것이 택견과 송덕기를 동시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60년대 중반이후 부터는 태권도의 유사단체가 태권도를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가는 시기와 일치하는데, 태권도와 택견의 접목을 시도하려는 현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인간문화재 지정서(자료출처 밝터)


특히 택견의 문화재를 추진하고 있던 일반인사와 문화재관리국에서 택견을 조사하면서 조승희, 이석호, 예용해, 오장환, 임동권 등이 현암에 택견에 관심을 갖게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반단체나 언론등에서 그를 무예의 고수 또는 달인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 1981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예 예술제 에서 무도대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무예계에 주목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슬하에 자녀가 없던 그는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되며, 1980년 12월 25일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노년의 세월은 더욱 힘들게 된다. 현암의 말년은 무형문화재라는 외형의 모습과는 달리 고난의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제자인 도기현은 계간지인 "mars"에 나의 사랑, 나의 스승 송덕기옹이라는 주제로 현암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생활상(1980년대 초반)을 아주 자세하고 현실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다.

당시 현암의 생활은 특별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도기현의 기사내용을 인용하지면 자신을 비롯한 수련생들이 댁(현암) 근처에 있는 전주집이라는 조그마한 밥집을 지정하여 스승님(현암)이 마음대로 식사를 하실 수 있게 하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말년을 보낸 현암은 1987년 7년 23일 서대문의 적십자병원에서 타계하게 된다.
#송덕기 #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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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를 지키는 것과

    무술가로서 열린 사고를 하는 것 사이의 중용이 중요할 듯.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각자 소신을 가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될 겁니다.

    2007-11-2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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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사

    택견이대로가다가는 큰 일

    2005-07-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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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가

    신한승옹은 1972년 가을 이후에 송덕기옹을 만났고 1980년대 초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감안하면 잘못된 기사로 보인다. 좀 더 정확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5-07-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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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가

    도기현씨의 말을 그대로 믿을수는 없다. 송덕기옹과 도기현씨의 관계는 결국 노년에 즉 90세 이후에 만나 전수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송덕기옹은 신선이 아니다. 또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박철희씨로 나와 있던데....또한 60년대 중반부터 택견을 미국에 보급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한다. 박만서씨라고....이미 택견의 보급은 미국에서 먼저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2005-07-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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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주먹


    고인이 되신
    송덕기 옹의 생전 사진을
    다시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령에도 기품이 그대로이고
    하얀 한복과 하얀 버선도 잘 어울리십니다.

    송 옹께선 말년에 어렵지만
    후학들에게 우리의 문화 우리의 유산인
    전통택견을 보급하셨으니

    우리 후학들은
    택견의 발전을 위해서
    이해관계를 버리고 필요할 때는
    언제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5-07-0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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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자데

    송덕기님의 택견을 원형 그대로 전승 및 보급해야 한다.

    2003-06-1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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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택견을 사랑하는 어린이

    택견이 문화재로 선택된게

    너무나 기쁩니다..

    2003-04-2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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