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사랑방] 프로(Pro)와 천직의식(天職意識)

  

이정규 사범의 무예 사랑방 7


이정규 사범

프로 구단에서 뛰는 야구와 축구 선수, 그리고 ‘국민여동생’, ‘국민요정’ 등의 수식어가 붙는 소위 잘나가는 ‘프로선수’들이 있다. 중소기업 사장보다 높은 연봉에 끊임없는 팬들의 사랑과 식을 줄 모르는 인기.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인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높은 연봉도 들끓는 팬들의 사랑도 인기도 없다. 번잡한 거리를 걸어보지만 누구하나 눈길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프로인가? 아니면 아마추어인가?

프로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 전문가)의 준말이다. 꼭 프로 구단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사람만을 말하진 않는다. 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기의 전문 기술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사도 프로고, 요리사도 프로고 어부도 프로고 태권도를 가르치는 나도 프로다. 이에 비해 아마추어라고 하면 여가로, 취미로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물고기 잡는 일로 비교를 해 본다면 그저 재미로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물고기를 잡아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바둑이나 컴퓨터 게임도 아마추어와 프로와는 명확한 구분이 있다. 이처럼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자신의 기술로 밥벌이를 하는지 그렇지 못한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주위에서 취미생활에 올인(All in)하는 사람들을 본다. 피곤한데도 잠을 아껴 새벽에 공 먼저 차고 출근을 한다.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욋돈이 생기면 자기 수준에 넘치는 장비들을 사들인다. 실력보단 장비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애착만큼은 프로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들은 그토록 좋아하는 일에 프로가 되진 않을까?

프로라면 그 분야에서 목숨을 걸고 피터지게 노력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피땀을 흘린 사람이다. 수 백 번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인생 전체를 걸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아마추어라면 신선한 열정으로 재미있게 즐기긴 하지만, 굳이 자신의 생활까지 포기할만한 필요나 용기는 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즐거움은 누리고 싶지만 고난까진 원치 않는 정도랄까.

그러다 보니 오랜 노력과 경험에서 나오는 프로의 전문성을 따라갈 아마추어는 많지 않다. 이런 프로의 전문성과 아마추어의 신선한 열정을 동시에 지속 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프로들은 너무 많은 고난을 겪어서인지 몸이 병들고 마음이 지쳐 시간이 흐를수록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다. 이런 기준들로 따져 보면 대충 알 것이다. 자신이 프로에 속하는지 아마추어에 속하는지를.......

나는 헤어스타일이란 것을 일찍이 포기한 사람이다. 받쳐줄만한 인물이 없으니 뚜껑 잘 덮고 다닌다고 별 달라질 것도 없어 그렇다. 오랫동안 집에서 혼자 기계를 머리에 대고 죽죽 밀어 버렸다.

그래서 사진을 보면 까까머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깍두기’ 머리만을 고집할 수 없어서 올해부턴 이발소에 다니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이발소는 통 유리창에 빨강, 파랑, 흰색 페인트로 Barber shop(이발소)이라고 달랑 적어놓은 것이 전부인 곳이다. 어두운 실내엔 달랑 이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지만 항상 한쪽은 비어있다.

이발사래야 하얗게 머리가 쉰 할아버지 한 분뿐이라 그렇다. 백 년은 되 보이는 사슴 대가리와 물고기 박제만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한 쪽 벽에 걸려 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마 미국이니까 아직도 이런 풍경이 남아 있지 않나 싶다.

오가는 손님들이라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할아버지들뿐이다. 손님들 중에 내가 제일 젊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만 오면 "Hey~, young man!” 하며 좋아하신다. 머리를 깎으며 노인들끼리 나누는 얘기를 듣다보면 군대얘기가 많이 나온다.

동서를 막론하고 예비역들은 군대 얘기를 평생 달고 사나보다. 그런데 소재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일본군들과의 전투 얘기나 한국전 참전 내용들이다. 일흔을 넘기신 우리 아버지가 월남전 출신이신데 도대체 이 분들은 연세가 얼마란 말인가?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들도 여럿 계셨다. 이발소 풍경도 1970년대인데다가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이 이발소에선 난 젖도 못 뗀 ‘애기’였다.

이발사 할아버지는 억센 남부 사투리에 허리가 곧고 손이 빠르신 분이다. 정정하셔서 60대 중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세를 여쭤 보았다. “나? 일흔 여덟!” 예? 농담이시죠? “아녀! 내가 이 동네서 이발만 55년째여. 가위 잡은 그 해에 결혼 했으니까 마누라랑도 55년째고. 운전면허증, 사업자등록증도 다 유효기간에 만기가 있는데 그 놈의 결혼증명서는 만기일이 없어서 지겹지만 그냥같이 살어!” 그러곤 껄껄껄 웃으신다.

“아니 그 연세에 은퇴도 안하시고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웬걸 난 이 일이 좋아. 그래선지 별로 힘도 안 들고. 그냥 죽기 전까지는 해 볼라고” 아침 일찍 집안 정원을 가꾸고 나와 종일 오가는 손님들 맞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돈을 벌 필요보다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단정해진 모습으로 나서는 손님들을 보는 낙으로 일하신다고 했다. 혹시 할아버지가 우리 주(州)에서 가장 연세 많으신 이발사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다른 도시에 아흔 두 살 되신 할아버지가 아직도 가위를 잡고 계신다고 했다. 천직(天職)이란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내가 지금부터 35년이 더 흘러 저 연세가 되어서도 저렇게 정정하게 수련생들 앞에 설 수 있을까? 저렇게 자기 일에 즐거워하며 사람들과 종일토록 덕담을 나누며 살아 갈 수 있을까?
중학생 조카가 방학을 맞아 미국에 왔다. 한 달간 있다가는 사이에 놀 생각 말고 영어나 좀 익혀가라는 뜻에서 매일 과제를 내주었다. 도장에서 미국 친구들과 태권도하기, 한 시간씩 동갑내기와 마주 앉아 회화 배우기. 그리고 나선 제대로 했는지 시험을 봤다.

낮게 선 주춤서기 자세에서 그날 배운 것을 다 되 뇌일 때까지 못 일어나게 했다. 더듬더듬 배운 것을 주워 내다보면 금방 다리가 저려 온다. 대충 끝내고 일어서려고 하면 눌러 앉혔다.

“우리 집 가훈이 밥값하고 밥 먹기다. 밥 값 못하면 계속 주춤서기야!” 매일 5~10분씩은 그러게 시험을 보는데 이 시간이 조카한테는 무척 고통스러웠나 보다. 모처럼 애틀랜타에 모임이 있어 구경도 시킬 겸 동행을 했다.

한 원로 관장님께서 “미국 와보니 재미있더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조카 녀석 인상이 영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신나게 놀 줄 알았는데 고모부란 사람이 맨 날 주춤서기만 시켰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관장님 왈, “뭘 5분 주춤서기 가지고 그러냐? 난 50년째 주춤서기 하고 있는데......” 그 말씀에 다 들 큰 소리로 웃었지만 조카 녀석은 아예 사색이 되고 말았다. 아마 평생 태권도는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50년째 주춤서기라.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신 말씀이었지만 이런 분이 바로 외길인생을 걸으신 프로시구나 하는 존경심이 느껴졌다. 미국에는 칠십이 넘은 연세에도 매일 도복을 입고 수련생들을 지도하시는 관장님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다. 이런 일은 정말이지 천직의식(天職意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천직을 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님이 말씀하신 지천명(知天命)일 것이다. 자신이 걷는 길을 하늘이 내리신 사명으로 알고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프로가 아닐까? 나에겐 이런 천직의식, 프로 의식이 있는가. 곱씹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라면 어떤 능력을 지녀야 하는 것일까?

유투브(youtube.com)에 떠도는 재미난 비디오 클립들 중에 ‘Slow Mo Guys'라는 아이디로 고속카메라로 물풍선이 터진다던지 날아온 축구공에 맞는 등 일상 속의 흔한 소재들을 찍어 슬로우 모션으로 올려놓은 동영상들이 있다.

그런데 고속카메라로 찍힌 세계는 정말 신기하고 다르게 보였다. 그 단순한 사건 속에 그렇게 복잡다단하고 신비로운 세상들이 들어 있다니! 프로라면 이렇게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보통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본의 검성(劍聖) 미야모도 무사시도 오륜서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견(見)하지 말고 관(觀)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견이 얕고 넓게 보는 것이라면 관이라면 깊게 꿰뚫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물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이치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 숨겨진 이치를 볼 수 있어야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진짜 힘이고 능력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물의 뒷면을 꿰뚫어 본 사람들이 바로 작가, 감독, 천재, 보스, CEO, 뛰어난 정치인들이다. 관(觀)의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사회의 리더들로서 각 분야에서 뛰어난 프로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무예에 관한한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즉 자기 분야에 독자적인 안목을 갖춘 프로들일 것이다. 무협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호(江湖)에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강호에는 지금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가? 좁디좁은 바닥에 끝없이 불어만 가는 경쟁 도장들,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적 악순환, 인력수급의 어려움, 기득권층의 횡포, 종잡을 수 없는 국가, 협회의 정책,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생겨나는 문제들과 현실에 대해 실망으로 분노를 느끼고 있는 이들도 생긴다.

난 우주의 어떤 문제에도 답은 있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다. 신이 계시다면 문제만 만들고 답은 만들지 않으셨겠는가? 어느 열쇠공이 자물쇠만 만들고 열쇠는 만들지 않겠는가? 물론 어떤 문제도 쉽게 답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참선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이 화두수련을 한다. 절대로 답이 없을 것 같은 문제를 가슴에 품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모든 생각이 다 정지해 버리고 고민하던 자신마저 잊게 된다. 결국 자신의 모든 사상과 신념마저 다 내려놓고 사라지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섬광처럼 답이 터져 나온다고 한다. 마침내 득도(得道)에 이르는 것이다. 지도무난(至道無難). 도에 이른즉 더 이상 아무 어려움이 없다! 즉, 어떠한 문제에도 답을 얻게 된다. 어떤 난관도 뚫고 갈 수 있게 된다!

비단 종교 수행자가 아니라도 누구든 문제를 직시하는 하고 그 문제를 가슴에 품고 피눈물로 삭히는 과정을 거치면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마치 모래알을 품은 진주조개처럼 말이다. 그렇게 답을 내다보면 하나씩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기 시작한다. 즉, 내공이 쌓인다. 이런 내공을 갖추게 되면 문제는 사라지고 삶은 점점 가볍고 맑아지게 되는 것이다.

득도는 비단 종교 수행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무예의 길(道)을 걷는 이들은 이미 도인이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씩 삶을 깨달아 가는 것이 바로 득도의 과정이다. 무인(武人)에게 있어서 수행과 생활은 둘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우리 무예지도자들은 지혜로운 이들이며 나보다 남을 먼저 헤아리고 돌아볼 줄 아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들이다. 우리는 먼저 깨닫고 깨달은 바를 우리를 따르는 수련생들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자신의 길이라고 믿는다면, 다시 한 번 천직의식을 다잡고 살아가야 할 때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를 상상할 수 없듯이 자신의 길에 영혼과 마음을 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프로가 될 수 있다. 바르게 자신을 닦아 나가는 프로라면 분명 하늘이 먼저 알고 도울 것이다.

한밤의 어둠보다 동트기 전 새벽미명이 더 어둡다고 했다. 깊은 어둠이 지나야 동이 트기 마련.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조금만 더 인내하고 나아가 보자 곧 터져 오르는 태양을 보게 될 것이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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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는 무인

    좋은 글에 공감하고 잘 읽고 갑니다. ^^

    2012-11-2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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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인의 길, 무예의 길...삶의 목적을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원하시는 삶 살아내시길 빕니다.

    2012-11-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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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고

    어쩜 구구절절 말씀이 ...
    고맙습니다... 저보다 어리신것 같지만 내스승으로 모시고 싶네요...
    제대로 된 스승 못만나본 쓸쓸한 ....

    2012-11-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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