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김가기(金可紀) 선인(仙人)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27


김가기(金可紀, ?~ 859) 선인(仙人)은 통일신라 때 사람으로, 득도비승(得道飛昇)한 내용의 기사(記事)가 중국의<속선전(續仙傳)>에 기록된 도인이다.

<속선전(續仙傳)>은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에 쓰여진 책으로, 이른바 비승(飛昇) 은화(隱化) 한 진선(眞仙)들의 전기(傳記)를 모은 책이다.

작가는 중국 오대(五代) 남당(南唐) 사람인 심분(沈汾)이라는 사람인데, 자신이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속선전(續仙傳)>을 펴냈다.

<속선전(續仙傳)>에 나오는 비승(飛昇) 선인(仙人)이 총 16명인데, 그 중에서도 신라의 김가기 선인이 백일승천(白日昇天) 하는 장면이 가장 화려하면서도 완성도가 높다.

이로 보아서 김가기 선인의 도력(道力)이 당시 중국에서 얼마나 대단하게 인정을 받았으며, 그 소문 또한 얼마나 거창하였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심분(沈汾)의<속선전(續仙傳)>외에도 북송(北宋) 이방(李昉)의<태평광기(太平廣記)>, 북송 장군방(張君房)의<운급칠점(雲級七籤)>, 원대(元代) 조도일(趙道一)의 <역세진선체도통감(歷世眞仙體道通鑒)>등에도 김가기 선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책에는 한무외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과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나오는데, 이들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당나라 개원(開元) 현종대(玄宗代, 713~741)에 신라 사람 김가기(金可紀)와 최승우(崔承祐), 승(僧) 자혜(慈惠, 의상대사) 3사람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었다.

김가기는 먼저 빈공과(賓貢科)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화주참군(華州參軍)을 거쳐 장안위(長安尉)로 전보(轉補)되었고, 최승우도 또한 진사에 합격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가 되었다.

김가기는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도(道)를 좋아하였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복기(服氣) 연형(煉形) 하여 스스로 즐거울 줄 알았다. 용모는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언행에 깊은 멋이 풍겼다. 또한 박학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을 지으면 청려(淸麗)했다.

김가기(金可紀)는 어느 날 최승우(崔承祐)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에 있는 광법사(廣法寺)에 놀러 갔다가, 마침 그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라 사람 자혜스님(의상대사)을 만났다.

자혜스님은 그 절의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와 절친한 사이여서, 두 사람도 자혜스님과 함께 자주 찾아다니며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 깊은 산길에 눈이 쌓여서 두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 절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마침 정양진인(正陽眞人) 종리장군(鍾離將軍)이 그 절을 방문하였다.

정양진인 종리권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무인(武人)으로 관직에 올라 장수가 되었다. 한번은 토번과의 전쟁에서 패해 적군에게 쫓기다가 마침 동화진인을 만나 선도(仙道)를 배웠다.

정양진인 종리권은 중국 8선(仙) 중의 1명이기도 하다. 정양진인 종리권을 비롯하여 당나라의 여동빈, 장과로, 한상자, 하선고, 수나라의 이철괴, 송나라의 조국구를 중국 8선(仙)으로 친다.

종리장군은 뺨에 구렛나룻이 나고, 배를 불쑥 내놓은 채 띠도 안 띠고 신도 안 신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
“어디서 오신 손님들인가?”
“모두 신라 사람들입니다.”
신원지가 대답하며, 이어 말했다.
“제가 보건데 이 세 사람은 모두 신선(神仙)의 골격을 갖추고 있으니, 가르칠 만하지 않겠습니까? 도형(道兄)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내가 세 사람을 보고 이미 다 알았소. 그대들이 신선의 도(道)를 배우고자 하면, 내가 마땅히 지도하여 주리다.”

신원지는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세 사람을 석실(石室) 안에 두고 내단(內丹)을 수련시켰다.
이에 김가기(金可紀)와 최승우(崔承祐)는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연단수련(煉丹修練)에 들어가고, 신원지가 몸소 물자를 공급하니, 무릇 3년 만에 단(丹)이 이루어졌다.

단(丹)을 이룬 후에 김가기 선인은 본국 신라로 귀국하였다. 이때 당나라의 문인 장효표(章孝標)가〈신라로 돌아가는 김가기를 보내며(送金可記歸新羅)〉라는 송별시를 지었다.

登唐科第語唐音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 말을 하나望日初生憶故林 해가 뜨는 곳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네.鮫室夜眠陰火冷 교실에서 밤을 자는데 음화가 썰렁하고蜃樓朝泊曉霞深 아침에는 신기루가 머물며 저녁엔 안개가 자욱하네.風高一葉飛漁背 높은 바람과 일엽편주는 물고기의 등위로 날아가고,湖淨三山出海心 호수는 고요한데 삼신산이 바다 복판에서 떠오르네.想把文章合夷樂 생각건대 문장을 동이의 음악에 맞추면서蟠桃花裏醉人蔘 반도 꽃 속에서 인삼에 취하겠지.

그러나 김가기 선인은 어찌된 일인지 신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당나라로 되돌아갔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두고 김가기 선인이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의 한계에 부딪쳐 다시 당나라로 되돌아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후일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 또한 조국 신라에서 뜻을 펴고자 했으나, 골품제도의 한계에 부딪쳐 뜻이 좌절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당나라로 되돌아간 김가기 선인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들어가 띠풀로 엮은 집을 마련하여 은거하고, 도사복장을 하기 시작했다.

기이한 꽃과 나무를 손수 심고 가꾸었으며, 늘 향을 피우고 조용하게 앉아 명상에 잠기기를 즐겼다. 그리고 노자의<도덕경(道德經)>과 여러 선서(仙書) 들을 외우고 익히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몰래 음덕(陰德)을 행하기에 힘썼다. 남들이 청하는 것이 있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정려 근면하게 일을 해서 남들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들과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던 김가기 선인은 당(唐) 대중(大中) 11년(857) 12월에 홀연히 황제에게 표를 올렸다.

신(臣)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들어 영문대(英文臺)의 시랑(侍郞)이 되었습니다.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당(唐)의 선종(宣宗)은 신기하게 여겨 김가기 선인을 궁중에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여 달라고 해도, 다른 신선이 관장하며,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당(唐) 선종(宣宗)은 마침내 향·약·금(香·藥·金)과 함께 중사(中使) 2명과 궁녀 4명을 보내 김가기 선인을 모시고 시중들게 했다. 그러나 김가기 선인은 홀로 조용한 방에 거하며, 궁녀나 중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매일 밤 방안에서는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사가 몰래 엿보니, 선관(仙官)과 선녀(仙女)가 각각 용(龍)과 봉황(鳳凰) 위에 앉아 단정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윽고 2월 25일이 되었다. 봄이 완연하여 곱디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과연 오색구름이 일어나고, 학이 우는 소리가 들리며, 큰 백조가 날고 퉁소와 생황소리가 났다.

그런 가운데 새 깃털 덮개에 경옥 바퀴를 단 수레가 온갖 깃발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깃발이 하늘에 가득 차고, 신선의 의장대가 지극히 많은 가운데, 수많은 무리의 호위를 받으며 김가기 선인은 하늘로 우화등선(羽化登仙) 하였다. 당(唐) 대중(大中) 13년(858년) 2월 25일이었다.

조정의 백관뿐 아니라 선비 서민 할 것 없이 수많은 구경꾼들이 산골짜기에 가득했는데, 그 신기함에 감탄을 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국 도사(道士)들은 김가기 선인께서 우화등선 하신 자리에 ‘금선관(金仙觀)’이라는 도관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부녀자나 어린 아이라도 김가기 선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1987년에는 중국인 이지근(李之勤) 교수에 의해서 ‘신라인 김가기 마애비’가 처음 발견되었다. 중국 협서성 서안시 장안현 자오진 남자오협 북쪽입구 안쪽 3킬로 지점에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시냇가 산벽 경사면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곳에 〈신라인 김가기 마애비〉라고 음각한 한문이 있었다. 전문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대략 북송(北宋) 시기의 유물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김가기(金可紀) 선인(仙人)과 함께 중국에서 공부를 했던 최승우(崔承祐)와 승(僧) 자혜(慈惠, 의상대사)는 각종 선서(仙書)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는데, 이 두 사람에 의해서 고대에 중국으로 수출됐던 우리의 선도법(仙道法)이 재수입된 것이다.

중국 진(秦) 나라 사람인 갈홍(葛洪, 283~343)은 그의 저서<포박자(抱朴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황제(黃帝)가 있었는데, 동(東)으로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서 자부선인(紫府仙人)에게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 - 昔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황제(黃帝)는 우리의 14대 환웅이신 치우천황과 ‘탁록의 전투’를 벌였던 인물이다. 중국인 서량지(徐亮之)도 <중국사전사화>에서 ‘황제족(黃帝族)이 동이(東夷)문화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선도문화(仙道文化)가 중국으로 건너갔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라 말기 최승우(崔承祐)와 승(僧) 자혜(慈惠, 의상대사)에 의해서 재수입 되었고, 재수입된 선도(仙道)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기존 토속의 고유(固有) 선도(仙道)가 ‘국선도(國仙道)’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선도 #정현축 #김가기 #선인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
  • ㅎㅎ

    재밌다. ㅎㅎ

    2012-07-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우물안 개구리

    우물안 개구리는 자기가 쳐다보는 동그란 하늘이 존재하는 모든 하늘이라고 확신하고 살지요. 그런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우물 밖을 아는 이가 그에 대해 말해주어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지요.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우물안이 존재하는 우주 전부이기에...

    2012-07-0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지나가다.

    하여튼 허풍들은 대단하다.

    2012-06-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자리비움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2012-06-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그건

    도종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거예요. ^^*

    2012-06-2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김세현

    중국으로부터 재수입된 선도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우리 고유의 선도를 국선도라 하였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ㅎㅎㅎ...재밌는 일화 감사해요...

    2012-06-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수도자

    3년만에 丹을 이뤘다니,, 부럽네여,,

    201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그냥 그대로 보슈, 왜곡하지 말고.

    201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나그네

    서로 띄워주기로 약속했나보쥬?? ㅎㅎ.

    201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필자

    임신선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늘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신선님. *^^*

    201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임신선

    항상 기다려 집니다. 신비롭고 재미있습니다.
    이 방대한 자료를 섭렵힌 정현축 현사님 존경합니다.

    201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