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국선(國仙) 문노(文弩)
발행일자 : 2012-01-27 19:14:58
<글.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문노(文弩)는 어려서부터 격검(擊劍)을 잘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는 호걸이었다. 문노는 스스로 말하길 ‘가야가 외조(外祖)’라고 하였다.
화랑 사다함이 대가야와의 전쟁을 치르러 나갈 때 문노에게 함께 갈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문노는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하면서 거절하였다.
이에 낭도들이 문노를 비난하였으나 사다함은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하며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낭도들이 가야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제4세 풍월주 이화랑이 골품이 없는 문노를 귀족 출신인 사다함에게 검(劍)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임명하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의아해 하였다. 그러자 이화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자(天子)도 신하로 삼을 수 없는 선비가 있는데, 문노가 바로 그렇습니다. 선도(仙道)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1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 없습니다.”
554년, 문노 나이 17세에 무력(武力, 김유신의 할아버지) 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백제를 쳤다. 이때 문노의 공로가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노는 개의치 않았다.
555년 고구려를 치고, 557년에는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로가 있었으나, 역시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이유는 문노가 골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낭도들이 불평하자, 문노는 이렇게 위로하였다.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문노(文弩)는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文章)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듯 하였다. 그리고 청탁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따르는 낭도들이 많았으며, 죽음으로서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화랑 무사(武士)의 기풍(氣風)이 문노로부터 크게 일어나 꽃피었다.
사다함이 죽고 세종전군(世宗殿君, 진흥왕의 동생이자 미실의 남편)이 제5대 풍월주가 되었을 때, 세종전군은 친히 문노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부디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 주시오.”
왕의 동생이 골품도 없는 자기에게 이토록 절실하게 부탁하였으므로, 문노는 이에 굽혀 평생 동안 변치 않고 세종전군을 섬겼다.
세종전군은 문노를 위해 진흥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여러 번 공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 나라를 위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에 진흥왕이 문노에게 급찬(級湌)의 지위를 내렸으나, 문노는 받지 않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예를 좋아하고 협기(狹氣)가 많아, 나라 사람들이 그의 무리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 하였다. 이는 문노의 무리가 전쟁에 나가 많은 공을 쌓았으며, 호국적이고 의협심을 강하게 떨쳐 붙은 이름이었다.
한번은 문노와 그 낭도들이 전쟁에 나가 또 전공을 세웠는데, 역시 위(位)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문노는 제7대 풍월주인 설원랑(薛花郞)에게 불복하고, 스스로 일문(一門)을 세웠다. 그러므로 낭도들도 나뉘어져 마침내 계파가 둘로 갈라졌다.
풍월주 설원랑의 파는 정통(正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었다.
미실이 걱정하여 세종전군에게 두 계파를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미실은 진지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았다.
이때 설원랑의 파는 향가(鄕歌)를 잘하고 속세를 떠나 유람[淸遊]을 즐겼으므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문노파는 무사(武事)를 좋아하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으므로 ‘호국선(護國仙)’이라 하였다.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설원랑을 많이 따르고, 초야의 사람들은 문노를 많이 따랐다. 그러나 양쪽 다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는 것은 서로 같았다.
미실은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모든 화랑들에게 문노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설원랑(薛花郞)의 낭도들이 불평하였다. 그러나 설원랑은 “총주(寵主, 미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무릎을 굽혀 문노를 섬겼다. 이에 문노의 낭도들 또한 설원랑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이리하여 두 계파가 화합하는 것을 보고 미실이 기뻐하였다.
진지대왕을 패할 때 미실 원화는 남편 세종전군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 봉사화랑, 미생을 전방 봉사화랑으로 삼아 일을 거사하였다.
이때 문노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미실의 총애를 받아 진골 골품을 얻었으며, 제8대 풍월주가 되었다.
풍월주(風月主)가 된 문노는 화랑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3부(部)로 나누었으며, 조직을 찬연하게 갖추었다.
좌삼부(左三部) - 도의(道義) / 문사(文事) / 무사(武事)
우삼부(右三部) - 현묘(玄妙) / 악사(樂事) / 예사(藝事)
전삼부(前三部) - 유화(遊花) / 제사(祭事) / 공사(供事)
그리고 좌우(左右) 봉사랑(奉事郞)을 좌우(左右) 대화랑(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前方) 봉사랑(奉事郞)을 전방(前方) 대화랑(大花郞)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각기 전문 분야를 담당하여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골품이 없는 초택의 사람들이 많이 발탁되었는데, 이들은 문노를 신(神)처럼 받들었다.
국선(國仙)으로서 신라의 국풍(國風)을 크게 진작시킨 문노는 성품이 엄하였다. 미실이 동생 미생을 일찍이 사다함의 낭도로 추천을 하였을 때, 미생이 12살의 어린 나이라 말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다함은 미생이 미실의 아우인지라 내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문노가 꾸짖듯 말하였다.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일이 생기면 어디에 쓸 것인가?”
그러자 사다함이 용서를 구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미생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니, 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노는 이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문노는 오랫동안 결혼을 하지 않다가, 뒤늦게 미실의 중매로 윤궁낭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윤궁낭주는 엄격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는 문노와 미실궁주 사이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하루는 문노가 미실궁주를 못마땅하게 말하자, 이렇게 조언하였다.
“당신은 세종전군의 신하인데, 미실궁주를 반대하면 세종전군이 좋아하겠습니까? 세종전군은 궁주(미실)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당신의 부하들이 저를 비난한다면 당신은 좋겠습니까?”
“당신은 궁주와 같은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사람의 일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情)이 사사로이 행해지면, 의리(義理)가 감추어지는 법이오.”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情)은 지(志)에서 나오니, 이 3가지는 서로 반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情)은 의(義)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다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과 더불어 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情)의 순수함입니다. 낭도들이 당신께 의지하는 것도 정(情)이 섞인 것입니다.”
이에 문노는 깨닫는 바가 있었고, 사사로운 정(情)의 진실 됨도 알게 되었다. 문노가 젊었을 때는 지조가 굳고 기품이 높고 인격이 결백하여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결혼 후에는 시비를 가리기보다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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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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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님이신 윤내현 교수님의 고조선 연구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출판사는 일지사입니다.
2012-02-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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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바쁜디요 ... ^^
2012-02-0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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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문고나 교보문고에 가면 고조선 연구에 대한 다수의 연구서적이 있습니다. 이를 참고해서 고조선에 관한 글을 써주시면 감사합니다. 민족의 혼을 위하여 ! 저는 바빠서 대신 써 주세요.
2012-02-0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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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칼럼은 역사 이야기고요., 문노 이야기가 나오는 화랑세기 책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이야기는 완죤 소설감이랍니다. ㅎㅎ
2012-02-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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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문노 -소설갖기도하고 역사이야기 갖기도하고 ...
2012-02-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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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문노 -소설갖기도하고 역사이야기 갖기도하고 ...
2012-02-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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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죤 소설감이랍니다. ㅎㅎ
2012-01-3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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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을 읽는것 처럼 재미있고 .....
어떻게 이런 자료들이 이렇게 현대에 까지 전해 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2012-01-3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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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천리, 서서 만리를 내다본다 ,.,. ^^
2012-01-3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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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도님 냄새가 나는구나 ~ ㅋㅋ ^^ ㅎㄷㄷ
2012-01-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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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ㅡ우리민족의 발원은 문명의 발달과 같이 한다고 봐야죠^^민족이라기 보다 같은 문화공동체가아니였을까요?
2012-01-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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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형 선생님 반갑습니다. 항상 애정과 관심을 갖고 글을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2-01-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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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에게는 시작이 있고 계속되는 연속성이 있는 법입니다. 조선민족의 출발점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번 써 보세요. 원장님 !
2012-01-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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