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 이소룡, 사망유희 그리고 영화

  

지한재 6편


사망유희에서 이소룡과 격투하는 장명


합기도를 하면서 영화와도 인연을 맺었다.‘천관녀’ ‘사망유희’ ‘피스트 오브 유니콘 팜(Fist of Unicorn Palm)’ ‘합기도’ 그리고 김창숙 씨의 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작품 등 총 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천관녀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김유신의 젊은 시절 사랑했던 천관녀의 사랑을 그린 안현철 감독의 첫 작품이다. 그 때 합기도 하는 관원들과 함께 찍었던 기억이 있다. 사망유희는 1969년도 작품으로 이소룡의 유작으로 이소룡과 대련하는 장면을 찍었다. 미국 교환교관으로 갔을 때, 이준구(준리) 씨는 인터내셔날 가라데 챔피언쉽을 개최했다. 나는 합기도 시연을 보여줬고, 이준구 씨는 이소룡을 소개시켜줬다. 나는 앤드류 공항에서 이소룡에게 합기도 기술을 몇 개 가르쳐 줬다. 그 일로 이소룡과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이소룡이 나를 찾아왔다. 홍콩에가서 무술 씬 한 컷만 찍자는 제안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영화를 모르던 때라 말 그대로 찰칵하고 한 컷만 찍는 줄 알았었는데 둘의 무술 장면을 3개월을 찍었다. 8분 분량을 찍었는데, 영화에서는 5분을 삭제했더라. 아들 브랜든 리(이국호)에게도 합기도를 가르쳤다.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야 사망소식을 들었다. 내가 서른 다섯 살이었고, 이소룡은 서른두 살 이었다. 그게 사망유희라는 작품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소룡은 무술가라기보다는 좋은 영화배우였다고 본다.


여자태권군영화포스터에 지한재의 이름이 보인다.

피스트 오브 유니콘 팜(Fist of Unicorn Palm)은 1973년에 이소룡의 친구인 소기린(小麒麟)하고 찍었던 작품이다. 그 다음에는 이대엽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이었고 김창숙 씨의 아버지 역할로 나온 영화다. 그리고 안젤라 마오(모영 茅瑛)와 찍은 합기도라는 작품이 있다. 합기도영화에 출연한 당시 박종규 씨가 힘을 써서 빌린 서대문 중소기업 은행 뒤 창고는 비만 안 새는 집일뿐이었고 도장을 할 곳은 아니었다. 그 뒤에 황풍(黃楓)이라는 홍콩 영화 감독이 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 실내장식을 해주는 바람에 근사한 도장이 되었다. 안제라 마오가 앉아 돌려차기 하는 장면이 서대문 도장이었다. 그 때 감독이 모영, 홍금보, 황가달 등 중국 배우들을 인솔해 와서 3년 동안 들며 나며 나한테 운동을 배웠다.

어느 날 갑자기 나보고 홍콩으로 가자고 해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영화를 찍었다.(정리자 주 : 안현철 감독의 천관녀는 1963년도 작품으로 김진규, 도금봉, 박노식 등이 주연한 작품이다. 이소룡의 어릴 적 친구인 소기린과 찍은 작품은 1973년 작품 기린장(麒麟掌)이다. 김창숙 씨의 아버지로 역할로 나왔던 영화는 국내 자료를 살펴보면, 1974년에 이대엽, 우연정, 김창숙 등이 주연을 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위험한 영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홍콩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했으며, 주인공은 전준, 황가달, 김창숙 그리고 원제는 여자태권군영회(女子跆拳群英會)이다. 감독은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으로 유명한 오우삼 감독이 맡았다. 합기도는 원제가 흑연비수(黑燕飛手)로 이 작품 또한 홍콩 골든하베스트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합기도인이자 영화배우인 황인식이 대사형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합기도 덕분에 영화배우로 활동 했었던 것에 대해서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합기도 협회의 통합과 분열


마르스 잡지 2002년 9월호 인터뷰

기도회와 결별을 하고 1961년 대한합기도협회를 창립하였다. 합기도라는 명칭으로 지도를 쭉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르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행사가 있으면 최용술 선생을 초대하기도 했는데, 한 번 부르면 손해가 10가지였다. 초대를 하기가 거북해서 될 수 있으면 초청을 하지 않았다.

1975년 8월에 대한민국합기도협회가 창설되었다. 청와대 경호실에 있었으므로 합기도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 해 8월에 1기 사범, 12월에 2기 사범 연수를 했다. 박종규 씨가 김운용 씨에게는 태권도를, 최대훈 씨에게는 합기도를 맡겼다. 최대훈 씨는 5·16군사혁명 날 때 중령으로 기합술을 하던 사람이었다. 유리를 씹어먹거나 작두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형욱 중앙정보장의 경호실장에서 그가 밀려나자, 박종규 씨에게 붙었다. 후에 올림푸스 사장을 하던 유화열 씨와 친분으로 잠시 내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최대훈 씨가 다시 돈을 받고 대우그룹 김우중 씨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 받은 돈으로 미국에 가서 교회를 열어 목사를 했는데, 뇌출혈로 사망했다. 최대훈 씨는 월남에 합기도 시범을 갔었을 때도 시연보다는 이권사업에 치중하기도 했다.

김우중 씨가 합기도 회장이 된다고 하기에 나는 조건을 걸었다. 합기도 회관 건립과 합기도 유단자에 대우를 잘 해주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했지만, 리비아 공사 수주 등 자기사업과 관련된 것을 다 이루고 난 다음에는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마 1979년 혹은 1980년도 정도에 유창희라는 사람이 회장, 전영철이라는 사람이 사무국장으로 있었다. 회장 유고시에는 부회장인 내가 대의원총회를 주최해야 했고, 사무국장이라는 사람이 총회를 개최했다. 그래서 전영철 씨를 불러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이에 김우중 씨는 욕을 하면서 합기도 하는 사람들을 싸움이나 한다고 다 좇아내라고 했다(국민생활체육전국합기도연합회 노영철 회장에 의하면, 합기도인들이 너무 돈을 달라고 해서 김우중 씨가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

그 후 1980년 1월에 내가 사비를 들여 합기도 통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기도회 배점만, 김무홍, 명재남 씨 등에게 각각 그 때 500만원씩을 줬다. 나는 대한민국합기도회로 통합을 시키고 회장을 맡았다. 김우중 씨 등 외부인에게 당했는데, 우리 힘으로 통합을 하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10달 동안 형무소에 들어갔다가 1983년 초에 출소했다. 다들 자기단체를 빼가 버리고 결국 통합협회는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형무소에서 나와 보니 1982년경에 새마을합기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정리자 주 : 1980년 12월 29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12월 28일에 하이야트 호텔에서 전국합기도인 통합대회를 열고 통합을 결의했다고 한다. 당시 광고를 보면, 대한민국합기도협회, 대한기도회, 궁중무술, 국기도, 호신도, 한풀, 심도, 야와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합기도통합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지한재, 부위원장에 이계영, 위원에 김무홍, 명재남, 서인혁, 배점만, 표시찬, 진종문, 이성칠, 임장환, 이희석 등이었다). 전경환 씨가 총재로 있었고, 이 단체에 대해서는 관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정을 모른다.

[편집 = 김현길 기자 / press03@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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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KD man

    황인식씨가 한국인이 아니고 중국인 아니 홍콩인이였드라면 이소령보다 더 유명 했을겁니다. 그만큼 실력이 튀어 낫다는 얘기죠. 이건 황인식씨와 함께 70년대에 수련해본 경험이죠. 각설하고 나도 1980년합기도 통합대회에서 뷔페를 먹으며 지선생과 대화를 잠깐 나눈적이 있었는데 그 많은 참석자중에 일부에서는 지선생이 연설할때마다 코 웃음을 치며 비꼬는 이도 있었습니다

    2010-06-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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