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요새 남한산성(南漢山城)

  


남한산성 성벽. 총안들이 늘어서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의 개성, 남의 수원, 서의 강화, 동의 광주. 이러한 4대 요새 중 동쪽의 수비를 담당하던 요새가 있었는데, 병자호란의 상흔이 아직도 역력한 남한산성이 바로 그 곳이다. 15만9,859평의 남한산성은 오늘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서울의 동녘을 방어하던 비운의 요새는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처를 지워내려는 듯 계곡으로 흘려보내는 소리가 애처롭다.천험(天險)의 요새지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후 신라 문무왕 12년(AD672)에 토성으로 축성하고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였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주변부가 높고 협약한데 비해 성의 중심부가 낮고 평평한 평지를 이루어 수비가 용이하고 성내의 주거가 평안하여 산성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에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한 것을 이괄의 난을 치르고 후금의 위험이 증가하므로 인조 2년(1624) 수어사이서에게 명하여 수축케 하였는데 벽암각성대사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팔도승군을 동원하여 축성공역에 임하였으며 2년만인 인조 4년(1626)에 준공되었다. 그후 숙종때 외성을 축조하는 등 성의 시설물이나 성내의 조영(造營)은 조선말 순조때까지 계속되었다.

악연(惡緣),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무망루.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음.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을 겪은 지도 40여년. 나라엔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명나라를 제패할 계략을 세운 후금 태조는 조선을 복속시켜 힘을 얻을 속셈으로 조선과 화친정책을 썼으나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후금은 인조 5년(1627) 1월 13일 3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해와 형제의 맹약을 받아내고야 만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은 만주와 내몽고 전역을 정복하려는 야심에 불탔고, 그 전쟁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나라로 또다시 조선을 넘봤다. 태종은 조선에게 형제지맹을 군신지맹으로 고칠 것을 제의하고 황금과 백금 1만냥, 전마(戰馬) 3천필 등 막대한 양의 세폐(歲幣)를 요구하고, 병력 3만까지 요청하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후금과의 국교단절론이 강력히 대두될 수 밖에……. 인조 14년(1636) 4월 국호를 청(淸)이라 바꾸고 왕을 황제라 고쳐 부른 태종은 그해 12월 2일 만주족·몽고족·한족으로 구성된 연합군 10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연합군의 침공을 피하려던 왕의 행차도 한발 늦었다. 세자와 백관을 대동했던 인조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길을 막고 있던 청군 진영에 들어가 주육(酒肉)을 먹이며 시간을 끄는 사이, 강화도 피신길을 남한산성으로 선회했다. 인조의 씻지 못할 역사적 오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청나라의 군사를 따돌리기 위해서는 강화로 피신을 했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친 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남한산성안에 비축된 양식으로는 50일 밖에 지탱할 수 없었고, 혹한까지 더해 청군에 포위된 아군은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군 내부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의 논쟁이 벌어졌으나 대세는 주화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三田渡)까지 내려가고 만다. “천은이 망극하오이다”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인조 15년(1637) 1월 30일의 일이었다. 청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받고도 성이 덜 찼던지 삼학사와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아갔다. 임진왜란 45년만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단 50일을 못버티고 이토록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참고 서적: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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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守禦將臺)>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어장대.

남한산성에 오르면 멀리 서울시내와 성남시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오늘날은 산성의 정상부까지 산책로로 잘 정돈되어 있어 시민들의 등산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산성의 정상부에는 일명 서장대(西將臺)라 불리는 수어장대가 있다. 수어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조 때 동서남북에 세운 4개 장대 중 으뜸가는 건축물이다. 성곽의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워진 목조건물 2층집이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40일간 머물면서 직접 군사를 지휘·격려하며 항전을 했던 곳이다.


<남문(南門)과 서문(西門)>

남한산성 남문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 남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칭하였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서문은 행궁터를 중심으로 서문은 오른쪽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으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경사가 급해 물자가 드나들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을 처음 쌓을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연무관(演武館)>
이곳은 군졸들이 무예를 닦던 곳으로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숙종 때에 와서 개수를 하고 연무당 연병관 이라 불러 오던 것을 연무관이라고 편액하였다. 예전에 이 건물을 중심으로 무술을 닦고 무재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한양으로 보냈다 한다.

연무관.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



원기둥에는 4개의 주련을 걸어 놓았는데 주련은 통나무 속을 둥근 기둥에 맞게 파내어 만들었다.내용은 다음과 같다

玉壘金城萬 山風雲龍虎生奇力 角羽宮商動界林 密傳忽本空三本

“옥과 같이 단단한 진터와 철벽과 같이 견고한 성곽이 높은 산 위에 축조되어 잇고 풍운을 탄 용호가 기이한 힘을 내는 도다. 궁상각치우 오음육율이 경내에 진동하여 삼민(신밀, 구밀, 의밀)을 홀본에 전하니 삼본(덕본 공본, 능본)이 공허하도다.”


<침괘정(枕戈亭)>
남한산성에서 이 건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인조2년(1624년)에 남한산성을 축조한 완풍부원군 이서라 한다. 이서가 축성에 착수하였을 때 이지점 숲속에 오래되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 데 몇 백년이 되었는지 알수가 없었으나 주초석이 견고하고 방의 온돌이 잘 보존되어 잇고 높이가 수척이 되어 시험삼아 불을 아궁이에 지펴보니 웃목부터 더워지고 차차 아랫목이 더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백제온조왕의 왕궁지라는 전설이 생기게 된 것 같다.

무기제작 사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침괘정.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중수하고 침괘정이라 이름한 것이고 남한지에는 이 건물 오른쪽에 군기고를 세웠더니 명나라 사신이 총융무고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것으로 침괘정은 무기제작 사무를 관장한 곳인 듯 하다.

이 밖에도 산성 내에는 승병들의 활약을 엿볼 수 있는 장경사, 국청사 등의 사절이 있고,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정보와 유물들을 살필 수 있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있다. 행궁지는 터만 남아 있었으나 현재 복원 사업중에 있다.

하산 길……


저기압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오후라 그다지 험난한 길이 아니었음에도 땀이 비오듯 흘렀다. 땀도 식힐 겸 하산 길에 들른 주막에서 도토리묵과 동동주 한 동이는 비운의 요새를여운의 요새로 포장하고 있었다. 아, 어리구나. 후세인(後世人)이여…….
취기가 오를 쯤에는 일장산(日長山, 남한산성은 낮이 가장 길다고 해서 일장산이라 했다)의 해거름도 之자로 저물고 있었다.

#호국의 현장 #성곽 #남한산성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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