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설인귀, 천자를 구한 고구려인?

  

설인귀에 활약에 의해 지명전설이 전해져


2006년 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설인귀전기의 포스터


신전을 쏘아 연개소문의 비도를 막고 이세민을 구한 설인귀(薛仁貴, 614~683)는 <신당서>나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山西) 하진(河津)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는 그의 이름이 ‘예(禮)’였으며, ‘인귀’는 자(字)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남북조시대의 무장이었던 설안도(薛安都)의 6대 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 설인귀 열전을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하여 농사로 생업을 삼았다. 선조의 산소를 옮기려고 할 때, 그의 부인 유(柳)씨는 “나리께서는 세상을 덮을 재주를 가지고 계시지만 때를 만나야 비로소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천자(당 태종)께서는 친히 요동을 정벌하려고 맹장을 구한답니다. 기회입니다. 나리께서는 어찌 공명을 도모함으로써 스스로 명성을 얻지 않으시렵니까? 금의환향한 다음에 이장해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설인귀는 장사귀(張士貴)를 찾아가 군졸에 응모하였다고 한다.

또한 설인귀와 관련된 이야기는 감악산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지역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적성현(積城縣)……감악(紺嶽)이 있다. 신라 이래로 소사(小祀)로 되어 있다. 산마루에 사당이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 왕이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를 지낸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신라 사람들이 당(唐)의 장수 설인귀를 모셔서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설인귀가 감악산의 산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1813년에 간행된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식산선생별집(息山先生別集)>에는 감안산에 돌로 쌓은 단 위에 산비(山碑)가 있으며, 곁에는 설인귀 사당이 있다고 하고 있다. 산비는 문자가 없는 몰자비(沒字碑)인데, 지역사람들은 ‘비똘대왕비’, ‘빗돌대왕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설인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분명 설인귀와 적성면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려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지역의 지명 전설에서도 그러한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를 끈다. <파주군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볼 수 있다.

* 마지리(馬智里)……당의 장수 설인귀가 주월리(舟月里)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용마와 갑옷, 투구, 칼을 얻은 후 적성 일대에서 훈련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발굽이 이곳 마지리를 가장 많이 지나갔다고 하여 마제리(馬蹄里)라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마지리가 되었다고 한다.……말굽두리 설인귀가 주월리에서 이곳으로 말을 타고 달릴 때 말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 무건리(武建里)……옛날 설인귀가 이곳 산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 한다.

* 설마리(雪馬里)……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설마치(薛馬馳)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하여 설마리라 했다.


마지리, 무건리, 설마리에 설인귀의 출생과 무예 연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의 사정이 반영된 <적성현읍지(積城縣邑誌)> 고적(古蹟)조에는 한배미라고도 하는 주월리에 위치한 육계토성(六溪土城)에서 설인귀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도 하다.

지명이외의 또 다른 전설


설인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감악산비


이 밖에도 설인귀와 관련된 전설들이 존재한다. 경기도에서 펴낸 <전설지>를 보면, 설인귀는 적성면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루는 상산 김씨 집안에서 묘를 쓰는데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동리 사람에게 캐도록 했다. 이때 설인귀가 자청하여 캐기를 원하였다. 그는 계속 빈둥거리다가 묘 쓰는 날이 되자, 술 세 항아리와 돼지 한 마리를 먹고는 단숨에 나무를 뽑아 버렸다. 그 후 설인귀가 율포리 강 석벽에 서 있을 때, 석벽이 갈라지며 용마가 나왔다. 그는 이 말을 잡아타고 백운리에서 나온 궤 속에 든 갑옷, 투구, 칼 등을 착용하고 적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무예 훈련을 했다고 한다.

<경기민속지>에 실린 다른 전설에도 흡사한 이야기가 전한다.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설인귀는 어려서부터 한 말이나 되는 밥을 먹었다. 집에서 이조차 견디기 어렵게 되자, 감악산 객현리의 외가로 보냈다. 하지만 커갈수록 점점 많이 먹게 되자, 외가에서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외삼촌이 호랑이한테 물려죽게 하려고 설인귀에게 쟁기를 지고 가서 밭을 갈게 하였다. 설인귀는 백호가 나타나자, 잡기 위해 따라갔다가 각담 속에서 갑옷과 투구, 신발 등이 들어 있는 궤짝을 발견하였다. 또 고개를 넘어가다가 칼바위에서 칼을 얻었으며, 솔말에서는 백마를 잡아타게 되었다. 이후 감악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설인귀굴’에서 무예 훈련을 했다고 한다(‘설인귀굴’은 임꺽정이 숨어 지냈다고 해서 ‘임꺽정굴’이라고도 한다).

설인귀가 주월리에서 태어났으며, 적성 지역에서 무예훈련을 했다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기록은 출생과 성장과정 등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적성 지역에 전하는 이야기들에서는 그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중국측 자료를 좀 더 살펴보면, 설인귀와 관련된 서술이 645년 안시성 공격 이후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인귀와 관련된 전설들은 중국 봉천성(奉天省) 지역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먼저 연개소문으로부터 당 태종의 어가를 구해줘서 어니(淤泥)에서 어니(御泥)로 바꾼 심양의 서쪽에 위치한 어니하, 설인귀(설예)가 돌을 사용하여 말고삐를 죄었다는 요양현의 예가대촌(倪家臺村), 요동 전투 시 고구려 기병에 몰리자 설인귀가 군사를 감추었다고 하는 개평현의 장군동(將軍洞), 요동 정벌시 그가 쌓았다는 고려성(高麗城) 등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구전들도 고구려와의 전투 이후의 이야기이지,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농업에 종사했다거나, 부인 유씨와의 일화가 <신당서>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면도 존재한다. 그런데 <신당서>에 대해, 중국 송(宋)나라 사람인 주변(朱辯)은 ‘기록된 양이 <구당서>에 비해 배 정도이기는 하지만, 모두 소설에서 취한 것들’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설안도의 6대 손이라든가, 강주 용문현 사람이라는 것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 그러면서 설인귀가 고구려인이었고 무예에 능하였지만,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자 당에 들어가 장수가 되어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설인귀에 대한 확실하지 않은 고증들


경극 득목관의 대본 표지(오른쪽은 연개소문, 왼쪽 창을 들고 있는 인물이 설인귀)


청시기인 1682년에 편찬된 <산서통지(山西通志)> 하진현(河津縣)조를 보면, 백호강(白虎岡)이 설인귀의 옛 마을이다. 또한 백호강의 아래 백저촌(百抵村)에 위치한 홍삼탄(紅蔘灘)은 설인귀가 기러기를 쏜 곳이기 때문에 사안탄(射雁灘)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허나 중국에도 설인귀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함부로 단정하기 어려운 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설인귀는 당 태종이 그에게 “짐은 요동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대를 얻은 것을 기뻐한다”는 말이 <구당서> 등의 역사서에 전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더불어 <연개소문>편에 언급했듯이, 송 혹은 원시기부터 민간문학과 <독문관>, <어니하>, <분하만>, <살사문> 등 적어도 4종류 이상의 경극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탄생에 대한 전설이나 성장기에 대한 기록이 의외로 적다는 데에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다.

앞서 설안도의 후손으로 서술되어 있는 <자치통감>의 기록도 완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 6대조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기록은 아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6대조보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가 더 알기 쉽다. 그러나 6대나 떨어진 설안도가 선조라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후대에 누군가가 설인귀의 내력을 거짓으로 꾸며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러한 의아함은 설인귀가 안시성을 공격할 때 기이한 옷[奇服]을 입고 활약을 해서 유격장군을 제수받았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동족이라고 한다면, 기이한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인귀가 한족(漢族)과는 다른 민족일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다산시문집>에서 설인귀는 삭방(朔方)에서 출생하였으므로, 북적(北狄) 사람이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1770년 간행된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청천집(靑泉集)>, <감악산기(紺岳山記)>에는 설인귀가 본래 동인(東人) 즉, 고구려인으로 아버지를 감악에 장사지냈고 스스로 안동도호가 되어 자주 와서 살펴봤다는 말이 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 파주조를 보면, 적성 부근에서 태어난 설인귀가 감악산에서 무술을 익혔으며, 당에 가서 모국(母國)인 고구려를 쳤고, 후에 이를 자책해 죽은 뒤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국내에 전하는 이야기들도 설인귀가 살았던 시대의 기록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편에서 언급했지만, <구당서> 설인귀열전을 보면, 그는 662년 천산에서 화살 세발로 적을 물리쳐 ‘장군삼전정천산(將軍三箭定天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화살의 명수였다. 한 해 앞선 661년에도 당에 적대적인 위구르족의 회홀(回鶻)을 치기 위해 설인귀가 출전하게 되었다. 전날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졌다. 이때 당 고종은 설인귀에게 다섯 겹의 갑옷에 활쏘기를 명령하였는데, 곧바로 다섯 겹의 갑옷을 뚫어 고종을 기쁘게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당나라의 활쏘기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연개소문의 손자 연헌성과 관련해 <책부원귀(冊府元龜)>에 전한다. 690년 측천무후는 금과 은 등의 보화를 내걸고 재상 및 남,북아문의 문무 관원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가려내어 시합을 시켰다. 뽑힌 5인 중 내사인 장광보(張光輔)가 먼저 헌성에게 1등을 양보했다. 헌성은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돌마지(薛咄摩之)에게 양보하였다. 설돌마지가 다시 헌성에게 양보하여, 이에 헌성은 “폐하께서 활을 잘 쏘는 5인을 뽑으라고 하셔서 뽑힌 사람은 대부분 당 관리 출신이 아닙니다. 신은 이 뒤로 당 관리들이 활을 잘 쏜다는 명예가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번의 활쏘기는 그만 두옵소서”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연헌성의 활솜씨가 독보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헌성은 연씨 집안에 내려오는 활쏘기를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설인귀와 관련해 눈길이 가는 점은 활쏘기에 능한 자들이 대부분 비한족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출생과 성장에 대해 의문이 많으며, 오히려 중국보다는 경기도 파주 적성 지역에 전설이 많은 설인귀의 출자와 관련해, 그의 뛰어난 활솜씨가 묘하게 겹쳐지는 것이다. 과연 지나친 상상일까?

* 허인욱의 무인이야기는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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