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대선인(大仙人) 물계자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24


물계자(勿稽子)는 신라 제10세 내해왕(奈解王) 때의 사람으로 검술과 음악을 좋아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말 없기로, 시나위(향가) 잘 부르기로, 거문고 잘 타기로, 춤(특히 칼춤) 잘 추기로 유명하였다.

물계자는 칼을 만지거나 거문고를 안고 앉는 것이 평생의 버릇이었다. 누구에게 못마땅한 말을 듣거나 세상의 걱정스러운 소문을 듣거나 하면, 으레 칼을 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칼춤을 추었다. 아니면 거문고를 끼고 시내 물가로 가 앉았다.

나라에 전쟁이 나자, 물계자는 의병(義兵)으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기록자의 미움을 받아, 그 공(功)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그대의 공이 가장 컸는데, 나라에 탄원이라도 내지 그러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물계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일은 뜻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오. 다만 뜻을 분발하고 격려하여 뒷날을 기다릴 뿐이지.”

그 후에 또 전쟁이 났고, 물계자는 또 전쟁터에 나가 승리를 거두고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그의 공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 일찍이 들으니, 신하된 도리는 위태롭게 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 몸을 잊는다고 했소. 두 번에 걸친 싸움은 진정 위태롭고도 어려운 싸움이었소. 그런데도 능히 목숨을 내놓고 몸을 잊는 것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지 못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저자거리와 조정에 나가랴?”

물계자(勿稽子)는 이후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들고 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되, 그 공을 내세워 녹을 탐내지 않고 끝내 몸을 뒤로 물리었던 것이다. 이는 무언(無言)의 실천 가운데 보여준 위대한 대선인(大仙人)의 숭고한 정신이었다.

물계자가 중년이 되자,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속속 모여 들었다. 검술, 음악, 그리고 검(神靈)을 섬기는 묘리(妙理)는 말할 것도 없고, 처세법 혹은 정치 군사를 물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자기 지망대로 수련을 쌓으며 묵기를 청하는 청년들이 날로 늘어났다.

물계자는 이를 허락하고, 오랜 세월을 두고 수련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과목 수련의 준비 과정으로 ‘정신수련’부터 먼저 시켰다.

“검술이나 음악이나 그 밖에 무엇이나 열 가지고 백 가지고 간에,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꼭 바른 도리(道理)이기만 하면 반드시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근본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것을 사람의 얼(精神)이라고 해두자. 천만 가지 도리가 다 이 얼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이 얼을 떼어놓고는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것은, 소 그림자를 붙들어다가 밭을 갈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허망한 소견이야.”

그래서 수련을 시킬 때 먼저 이런 질문을 하였다.
“너 숨을 쉴 줄 아느냐? 숨이란 만들어 쉬는 것이 아니라, 절로 쉬는 것이다. 숨을 고루는 것이 얼의 앉을 자리를 닦는 것이니, 얼의 자리가 임의롭고 난 뒤에야 무슨 수행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숨을 고른다, 얼의 자리를 닦는다, 천만 가지 일과 천만 가지 이치가 다 여기서 시작되는 법이거든.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니면 참된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설령 모르는 사람의 눈을 얼핏 속여 넘기는 수 있다 하더라도, 검님(신령님)이 그런 사람의 눈에는 그물을 덮어버리는 거야.”

이러한 방법의 수련으로 얼마를 지내고 나면, 누구나 다 대선인(大仙人)의 신통한 교육 방법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계자는 또 항상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빛깔(自己本色)이 있는 법이어서, 그것을 잃은 사람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제 빛깔을 지닌 사람만이 제 길수(自然의 妙理)를 찾게 되는 법이야. 그러나 제 빛깔이라는 것은 제 멋(自己趣向)과는 다른 것이야. 누구나 제 멋이 있어야 하지만, 제 멋대로 논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맞는 것이 아니야. 아무에게나 맞을 수 있는 제 멋은 먼저 제 빛깔을 지녀서 제 길수를 얻은 그 멋이고, 한 사람에게도 맞을 수 없는 제 멋이란 제 길수를 얻지 못한 그것이야. 말하자면 제 빛깔과 절로(自然)와가 한데 빚어서 함뿍 괴고나면 제작(天人妙合)에 이르는 법인데, 이 제작이란 검님이 사람의 마음에 태이는(和合) 것이요, 검님의 마음이 사람의 생각에 태이는 강이니, 말하자면 사람이 무엇이나 이루었다고 하면,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 제작에 이르렀다는 것이야.”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저절로 물계자(勿稽子)를 중심으로 한 풍기(風氣)가 생겼다. 그 풍기(風氣)란, 물계자 문인치고 빽빽하거나 어색하거나 설멋지거나 까불거나 설넘치거나 고리거나 비리거나 얄밉거나 젠체하거나 따분하거나 악착한 사람은 아주 없는 것이다. 물계자와 그의 문인들은 그야말로 참 멋! 참 풍류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척 대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은 물계자의 문인들을 모두 ‘참 멋쟁이(風流)’라고 말하게 되었다.

“멋, 풍류(風流)! 그야말로 하늘과 사람 사이에 통하는 것이 ‘멋’이야. 하늘에 통하지 아니한 멋은 있을 수 없어. 만일 있다면 그야말로 설멋이란 말이야. 제가 멋이나 있는 체 할 때, 벌써 하늘과 통하는 길이 막히는 법이거든. 참 멋과 제작은 마침내 한지경이니, 너희는 여기까지 아는지? 사우(調和)맞지 않는 멋은 없는 것이며, 터지지(融通透徹) 않은 멋도 없는 것이니, 사우맞지 않고 터지지 않은 제작이 있는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환희와 감격에 넘쳐서 눈물을 흘리며 절하는 제자도 있었다. 물계자는 칼을 쓸 적마다 언제든지 먼저 숨을 고루었다. 그리고는 “살려지이다.”라는 기도사를 몇 번이든지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린 다음에, 으레히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이어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칼을 쓰는 것이 언제나 변함없는 순서였기 때문에, 물계자의 문인들은 으레 대선인(大仙人)의 하는 순서대로 따랐다.

물계자는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누가 청할 것도 없이 유별나게도 큰 키에 황새 춤을 추면서, 같이 취한 사람들과 어울러져 자작곡인 <봄 술>을 불렀다. 물계자가 앞창을 대면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뒤(후렴)를 받는 것이었다. 

삼거리 주막에 나그네 오고
삼거리 주막에 나그네 가네.
나그네 가는 날 나그네 오고
나그네 오는 날 나그네 가네.

달 좋은 봄철이 몇 밤이뇨.
알뜰한 이 밤이 가단 말이
얼시구 놀잔다 벗님네여
얼시구 들시구 놀다 가세.

접동새 비렁에 꽃이 피고
접동새 비렁에 꽃이 지네.
꽃 지는 가지에 꽃이 피고
꽃 피는 가지에 꽃이 지네.


이윽고 세월이 흘러 물계자의 머리도 학처럼 희어 노선인(老仙人)이 되었을 때, 나라에 또 전쟁이 났다. 이때도 물계자는 필마단기(匹馬單騎)로 홀연히 군문(軍門)에 나타났는데, 노선인의 풍도(風度)에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감탄을 감추지 못하였다.

노선인(老仙人)은 싸운다기보다는 차라리 긴 칼을 휘두르면서 한 마리 학처럼 춤을 추었다. 그래서 몸은 가볍고 날쌔며 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학춤이 바로 칼 쓰는 묘법(妙法)인지라, 칼 빛이 번쩍이는 곳마다 적군들은 바람에 쓰러지듯 자빠져 갔다.

이렇게 쉽사리 적군을 물리치고 돌아온 물계자는 약간의 땀을 닦으면서 빙그레 웃었다.
"사람은 역시 나이 먹으면 늙는 게야. 웬 땀이 다 났어..."

대선인(大仙人) 물계자(勿稽子) 외에도 신라에 선풍(仙風)을 드날렸던 풍류인(風流人)은 옥보고(玉寶高), 백결선생(百結先生), 우륵(于勒),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4선(仙) 등이 더 있다.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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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제가 빼먹고 쓴 것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쓰여진《청학집》에 보면, 신라 효공왕(孝恭王) 때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악산(백두산)에서 물계자를 만났는데, 동안(童顔)에 눈같이 흰 살결을 하고, 병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고 합니다. 옥룡자가 연세를 여쭤보니, 물계자 말씀하시길, 800세라고 하시더라고요.^^*

    2012-05-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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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정 작가님, 김가기 신선도 한번 정리해 주시면 재밌겠네요. ^^*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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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리비움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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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김가기 선인도 멋지시지만, 물계자 선인도 정말 멋진 분, 참멋장이시지요. ^^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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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가기 신선 2

    새 깃털로 덮개를 장식하고 옥으로 만든 바퀴로 끄는 수레가 나타나고 온 하늘을 오색찬란한 깃발로 물들였으며 선인의 지팡이가 지극히 많았으며, 하늘로 승천하였다. 행렬을 이뤄 구경하던 선비와 사람들로 살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그들은 이 의식을 보고 그 신기함에 탄성을 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라의 김가기 선인은 唐 大中 13년(858년) 2월 25일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羽化登仙했다.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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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가기 신선 1


    신라의 김가기 선인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唐 大中 11년 12월에 왕에게 표를 올려 말하였다.. 臣은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들어 英文臺 侍郞이 되었습니다. 다음해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과연 2월 25일이 오자 봄이 완연하여 경치가 아름답고 꽃과 풀이 활짝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 오색구름이 일어나고, 학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큰 백조가 날며, 퉁소와 생황소리가 났다.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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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

    신라의 김가기 신선은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그곳에 남아서 계속 수도를 했는데, 하루는 중국 왕께 고하기를, 옥황상제께 선관仙官으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모월모일에 하늘나라에 올라간다고 하였다. 왕은 신하들을 임명하여 김가기 신선을 계속 지키도록 하였다. 그날이 되자, 김가기 신선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중국 신선전 책에 나온다.. 현대의 중국 도사가 한국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더라. 이렇게 유명한 한국의 신선을, 정작 한국에서는 모르고 있다고 .. 소설인가 ?
    게 대낮에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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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부정적인 사람은 눈을 떠도 부정.. 눈을 감아도 부정.. 공부좀 하세요. 역사인물 공부 .. ^^

    2012-05-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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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소설을 쓰는구만.

    2012-05-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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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맞습니다. 맞고요.. 저도 시대의 도님 말씀에 한표 ! ^^

    2012-05-0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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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도..

    맨 밑에 김주형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주장 아닐까요?..... 어차피 도인이라도 그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다면... 그 시대의 한계 내에서 궁극을 추구하는 게 맞는 듯... 즉 칼의 시대에는 칼을 이용해 그 궁극에 이르고, 만약 지금처럼 핵무기를 쓰는 시대라면 그 핵무기를 이용함에 극한을 추구하는 것이 맞을 듯... 예를 들자면 제가 볼때, 작년에 일본에서 원전사고가 난 것은 저들이 핵무기 사용의 흑심을 품고서 뭔가를 추진하다가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제가 볼 때, 일본이라는 나라는 작년 원전사고로 국가로서의 패망의 길에 접어 들었다고 봅니다. 지금도 그 사고의 진실을 숨기고 있고, 현실적으로 복구 불가능의 사태인 듯....

    2012-05-0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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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시대에는 거문고를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 하였는데, 琴樂(음악)이라 하지 않고 , 琴道(道)라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거문고가 음악적인 개념보다는 .. 道的인 개념으로 더 가깝게 쓰였습니다.

    2012-04-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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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지나가다님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

    2012-04-2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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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재밌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풍류의 어원,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2-04-2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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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선인들의 참된 풍류가 사무치게 그리운 봄날 저녁입니다...

    2012-04-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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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운

    오랫만에 옛 선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해집니다. 전생에 나도 그런 삶을 살았을 것 같은...^-^...이런 좋은 스토리를 자주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2-04-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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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현대의 신무기는 독기毒氣 입니다. 작년인가 뉴스에 난 적도 있습니다. 미국은 적국의 대통령들에게 암을 유발시켜 죽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그래서 미국 적국의 대통령들이 한명씩 한명씩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사실입니다. 저도 경험하였습니다. 제 스승님께서 남이 음해하는 말을 믿으시고 , 저를 오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독기를 쏘셨지요. 그래서 비로소 무협지의 독기를 쏘는 방법들이 사실인 것을 안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입니다. 근접거리가 아니라도, 원격으로도 가능합니다. 아마도 고난도의 기법일 것입니다.

    2012-04-2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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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

    핵무기, 화생방무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장거리 대포, 전차 등등, 물질적인 무기들은 구닥다리 구형의 무기들입니다. ㅎㅎ.

    2012-04-2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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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형

    21세기 현대전은 핵무기와 화생방무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장거리 대포, 전차, 첨단 장비로 무장한 보병과 첨단 전투기의 전쟁입니다. 고대의 신선들의 칼놀이는 어린아이 장난같이 느껴집니다.

    2012-04-2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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