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LA 유병용

  


유병용 사범

‘태권도 경기인’ 유병용(76)은 새벽 5시가 되면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6시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LA 허리우드 근교의 종합스포츠센터 내에서 체조와 태권도 수업을 직접 주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현역인 그다. 여전히 ‘일자 찢기’가 가능할 만큼 나이를 의심케 하는 유연성이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 이는 유병용에 붙여진 수식어이다. 1960년대 중후반, 잭황(황세진)과 함께 가라테, 코리언가라테, 쿵푸 등이 모여 겨루는 전미국무술대회에 출전한 미국 1세대 대한민국 대표 경기인 유병용. 미국 LA 허리우드에서 그를 만났다.

- 태권도와의 만남은 어떻게

“5살 될 때까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일종의 소아마비였죠. 허약했습니다. 사람이 무서워서 피하고 도망쳤던 곳이 도장이었죠. 무덕관이었습니다. 가만히 옆에서 수련하는 모습만 3개월을 봤습니다. 조금씩 흉내를 내기 시작했죠. 기억나는 건 매를 많이 맞았다는 것이었어요. 소아마비였던 저는 구체적인 태권도 동작을 따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일반인들과 똑같이 저를 대해주면서 운동을 시켰고, 채벌을 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의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게 한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 서울 용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용산 철도국 근처의 무덕관을 찾았죠. 그때 처음 강명규 사범을 만났습니다. 사범 생활도 그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저의 태권도 정신과 철학을 깨우쳐 주신 분이 바로 강명규 사범입니다. 황기 관장도 가끔 보기는 했지만 감희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상황이었죠.

- 미국 도전기에 대해 말해 주시죠

“1963년도까지 3년 동안 도장 사범 생활을 했습니다. 1963년 중순경 미국에서 열리는 겨루기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 새크라멘토에 도착했습니다. 강명규 사범의 초청이었죠. 한국 대표팀으로 온 것이었죠. 그때 온 사범들이 최단규, 이종환, 김주훈, 안영화, 윤병규 사범이었습니다. 다 무덕관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서 미국을 보았죠. 아무래도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또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1964년도에 미국 UC버클리대학교 입학을 위해 미국에 왔습니다. 이것이 저의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유병용의 초창기 시범 모습

- 초창기 미국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꿈은 달콤했지만 현실은 고달팠습니다. 굉장히 서글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50달러 이상을 가져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현지에 도착해 50달러를 가지고 ‘할러데이 인’이라는 호텔을 잡았죠. 영어를 잘하지 못했던 저는 어떤 질문에도 연신 ‘Yes’만 외쳤습니다. 그런데 숙소를 들어갔는데, 침대가 두 개가 있더군요. 저는 미국사람들은 여기서 자다가 싫증나면 다른 침대에서 옮겨자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저녁이 되니 배가 고팠습니다. 전화를 걸어 먹을 거 있냐고 하니, 이것 저것 음식 종류를 얘기하는 것 같아 달라고 했습니다. 한 상 그득하게 차려오더군요. 정말 미국은 좋은 나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돈을 내야한다는 것도 모른채 다 먹어 치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53달러를 내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없었죠. 아무리 해도 3달러가 모자랐습니다. 사정을 말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호텔을 떠났습니다. 그후로 3개월을 노숙자 생활을 했습니다. 학교 입학식까지 남은 시간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에 의식을 잃었지만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에 방치된 채 3일을 쓰러졌다가 깨어났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학점을 굉장히 후하게 줘서 버클리대학에서 이런 학생은 천재이기 때문에 장학금을 주어야한다고 해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 영어 실력이 들통이 났고, 학교에서 쫓겨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최악이었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절망에 빠져야 했습니다.”

- 유병용하면 떠오르는 것이 미국 내 한국을 대표하는 경기인이다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출전한 겨루기 대회였습니다. 개척 겨루기 선수였습니다. 1969년도 1975년도까지 시합을 뛰었습니다. 한때 타이틀이 16개정도였으니까요. 금메달만 26개 정도, 챔피언 벨트는 7개 정도 획득했습니다. 우리 시합은 당시 체급이 없었습니다. 라이트급, 미들급. 헤비급이 거의 한데 모여 경기를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이런 초창기 겨루기 시합 출전이 유병용하면 경기인이라는 이미지를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연속 타격이 불가능했다. 점수 위주의 경기였다. 한 점을 획득할 때마다 경기는 중단됐다. 한국식이 아닌 미국식 경기였다. 첫 출전, 결과는 참패였다. 실전 대련을 중심으로 했던 유병용에게는 맞지 않는 룰이었다. 초반에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욕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수년간 주최 측에 항의를 했고, 결국 1968년 말부터 연속 공격이 허용되는 룰로 바뀌었다고 한다.

- 당시 시합 분위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막상 미국에 와서 시합을 해보니 딱 가라테 룰이었습니다. 뭐 해볼려고 하면 중지시키는 상황이었죠. 자유대련이라는 것 자체는 일본사람보다 한국의 당수도가 강했습니다. 상대의 손만큼 저희는 발이 총알과 같이 빨랐습니다. 스텝도 크지 않았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자, 우리를 ‘미친 말’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은 앞으로만 가는데 한국 사람들은 좌우 양옆, 앞뒤 등 자유자제로 움직임이 대단했다는 스텝의 표현이었죠. 나중에는 우리의 발놀림을 전혀 쫓아오지 못했으니까요.”


겨루기 경기 중이 유병용(오른쪽)

- 겨루기 경기에 나설 때 어떤 각오였나?

“내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저를 쓰러뜨리기 위해 싸움을 했지만, 저는 목숨을 걸었죠. 당시 잭황과 문대원과 같이 시합을 뛰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대회까지 제패한 것은 아마 제가 처음일 겁니다. 그때는 인정사정이 있을 수 없었죠. 일본의 가라테나 중국의 쿵푸를 수련한 선수들의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겨루기 3인방은 서로 누가 지기라도하면 경기장에서 통곡을 하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문대원과 잭황, 유병용 이 세 명은 시합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유병용 사범은 “문대원은 독종으로 통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 당시 어떤 기술을 주로 사용하셨나요?

“점프 공격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심판들이 공중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으며 공격을 하느냐며 점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전 이뤄지는 시범공연에서 점프 발차기 격파를 많이 보였는데요. 이런 모든 노력들이 차고차고 쌓이다 보니 경기룰 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양무술의 위대함을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태권도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일본과는 또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특유의 우월한 발기술을 미국인들에게 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시범을 보는 관중석에서 벽돌을 더 올리라고 해서 무리하게 시범을 했고, 자기의 몸이 상해가는 걸 알면서도 전혀 내색 할 수 없었다고 한다.

- 태권도장도 개관했습니까?

“새크라멘토에 도장을 처음 개관했습니다. 아마도 태권도장은 처음이었죠. 그때는 가라테를 사용해야만 도장으로 인식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코리언카라테 이름을 붙이고 도장을 개관했습니다. 시합을 뛰면서 ‘병유’라는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코리언카라테에서 병유 카라테로 바뀌었죠.

- 당신의 태권도 지도철학은?

“시합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마와 프로가 있어야하는데 지금까지 프로로 전향할 수 없게 태권도는 기형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다음 세대 후학들이 해주기를 바랍니다. 또 초단부터 4단까지 스포츠 태권도를 했다면, 5단부터는 무도로 변해야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9단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20세 초반에 운동을 그만두고 이후부터 종이로 단을 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안된다. 나는 무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무인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 내 욕심입니다. 그렇게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태권도 사범이 왜 골프를 칩니까. 태권도도 제대로 못하는 사범들이 무슨 자격으로 골프를 칩니까? 반성해야 합니다.”


유병용의 애장품

-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는가?

“마이클 콜라스라는 미국의 유명 TV인 CBS 사장입니다. 척 노리스가 그를 부탁했습니다. 스포츠 의학쪽으로 학위를 받으며 공부했던 나의 실력을 알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의 병명도 몰랐다. 그래서 난 ‘나는 왕진을 다니는 의사가 아니다. 사범이다’고 말했습니다. 어느날 리무진에서 한 할아버지가 내렸습니다. 거기서 도장까지 들어오는데 십 분이 걸렸죠. 보통은 10초면 되는데, 그래서 말했습니다. ‘당신 10분이나 걸려 지팡이 짚고 왔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이건 아니다’라고. 지팡이를 떨어트리면서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울었습니다. ‘나 죽고 싶지 않다’며 말했죠. 그는 나에게 '그런데 너는 나를 살릴 것 같다'고 말했다. 암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고 말했죠. 세 번째 보니, 의사가 6개월이나 8개월 정도 살 것이라고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처방을 내렸죠. 1주일에 3일 정도 나와서 운동 할 수 있냐고. 아주 천천히 걷고 뛰게 했습니다. 나와 운동하기를 1년여가 지났고, 2년 6개월 뒤에는 검은띠를 받았죠. 나중에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의사에게 가서 그가 ‘아이 디든 다이 옛’이라고 했다고 해요.”

-태권도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평생을 가져가야할 것이다. 이것이 짐이라면 달게 지고 가야할 선물이다.”

유병용 사범에게는 꿈이 있다. 어떻게 보면 태권도와 관련된 꿈이기도 하다. MGM의 부사장으로 또 워너브라더스에서 수석 부사장 등을 거치며 33년간 영화에 종사했다는 유병용. “태권도의 부흥에 영화와 티비가 아주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소룡은 비록 쿵푸나 절권도로 유명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그런 다가옴이 아니라, 동양의 무술이었던 것이죠. 영화는 세계인의 눈, 음악은 귀입니다”라고 운을 뗀 뒤 이렇게 자신의 꿈을 조심스럽게 꺼내보였다. “아직 태권도다운 영화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미국 #특별취재 #원정대 #원로 #미국사범 #정대길 #태권도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