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검선(劍仙)부자-김체건과 김광택 1

  

척이지사 김체건


무예도보통지 왜검조 관련 기록

김체건(金體乾)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왜검을 조선에 전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뛰어난 무인이었던 김체건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김체건에 관련한 이야기는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에 실려있다.

군교 김체건은 잘 달리는 자로 민첩하고 무예에 정교하였다.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서 검보를 얻어서 그 검술을 배워 왔다. 임금이 체건을 시험하였는데, 체건이 칼을 떨치고 발굽을 들고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걸었다(무예도보통지, 왜검).

김체건은 몸이 날래고 무예에 능했으며,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가서 검보를 얻어 왜검술을 배워왔다고 한다. 왜검을 익히기 전에 이미 다양한 무예를 습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왜검을 익히는 과정은 그의 아들의 전기인 「김광택전」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김광택)의 아버지 체건은 척이지사(斥弛之士)이다. 숙종 때에 훈국의 무예를 더욱 수련하였다. 도법(刀法)으로는 섬나라 오랑캐만 한 것이 없었다. 군졸로 하여금 (왜검을) 익히게 하려 하였으나, 왜에서 비밀로 하여서 배울 수가 없었다. 체건은 스스로 원해서 그 기법을 얻고자 왜관으로 몰래 들어가 고노(雇奴)가 되었다(문암문고 「김광택전」).

무예도보통지에는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왜검보를 얻어와서 검술을 배웠다고 한 반면에 「김광택전」에는 숙종 때 김체건이 왜관에 들어가 검술을 습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약간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모두 김체건이 왜검을 배웠음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김체건에 대해서 「김광택전」에는 척이지사라고 서술하고 있다. ‘척이’는 대개 ‘척이불기(斥弛不羈)’와 같은 용례로 많이 쓰이는데,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좋게 말하면 호탕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안하무인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후에 아들 김광택에게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 점에서 학문에도 얼마 정도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신분은 군교였다. 군교는 서예(誓隷)․나장(羅將)․사령(使令) 등으로 불린 상급아전(上級衙前)으로, 왕이나 고위관직자의 경호, 범법자의 체포와 구금, 방범순찰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 중인계급이었다. 김체건의 집안도 중인 계급이었고 그 아버지의 직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안하무인이 인물이 된 것도 중인이라는 신분으로는 학문을 통해 문관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점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덩이를 파고 왜검을 배우다


동래부사접왜도

「김광택전」을 보면, 김체건이 스스로 원해서 왜관에 들어갔다고도 하지만, 훈국 즉, 훈련도감에서 군졸들로 하여금 왜검을 익히게 하려했다는 점에서 정책적으로 그를 선발하여 왜검을 배워오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점은 숙종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숙종 8년 10월) 훈국 군병 중에 발놀림이나 몸놀림이 몹시 빠르고 날래고 힘이 있으며 무예에 능한 1인을 유혁연(柳赫然)이 재직시에 동래에 내려보내 왜인의 검술을 배우게 했고, 근래에 금위영(禁衛營)으로 소속이 옮겨진 자가 있는데, 이번의 가는 길에 데리고 가서 저쪽의 기예를 배우게 하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우의정 김석주(金錫冑, 1634~1684)가 청(淸)에 사행을 가면서 금위영 소속의 무인의 동행을 요청하고 있는 기록으로, 동래왜관(東萊倭館)에 1인을 파견하여 왜검을 학습한 사실을 알려준다. 왜검술을 배운 이와 중국의 기예를 배우도록 하는 이가 동일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유혁연이 훈련도감에 재직할 때 동래에 병사 한 명을 파견하여 왜검술을 배우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무예도보통지나 「김광택전」을 통해, 그 1인은 김체건이 확실해 보인다.

김체건이 언제 동래왜관에 파견되었는지는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유혁연이 훈련도감에 재직할 때임을 고려하면 그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유혁연이 처음 훈련대장으로 임명된 해는 현종 10년(1669) 6월이다. 그리고 숙종 6년(1680) 3월 기록에 훈련대장으로 김만기(金萬基, 1633~1687)가 임명되고 있다. 유혁연은 숙종 6년(1680) 서인들이 남인을 숙청시키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났을 때 남인이었던 그도 영해(寧海), 지금의 경북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약간의 변동사항은 있을 수 있지만, 이 시기 전까지를 유혁연이 훈련대장으로 재직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김체건은 1669년 6월부터 1680년 3월 이전의 어느 때에 동래로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그 범위를 줄일 수 있다. 「김광택전」에 숙종 때에 내려보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혁연이 훈련대장으로 재직한 숙종 시기는 숙종 즉위년(1674) 8월부터 숙종 6년(1680) 3월 이전이다. 약 5년 정도의 기간임을 말해준다. 왜관파견 시기는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기록을 통해 좀 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다.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에 모두 있는데, 일본이 가장 낫습니다. 우리나라만 홀로 전해 익히는 사람이 없어, (신의) 마음은 항상 분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1인을 동래에 내려보내 전하여 익히도록 하고자, 부사 이서우(李瑞雨)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형세를 살펴보라고 말을 보냈습니다. 지금 그 답을 받아본 바 (검술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신의 관리 하에 배울 수 있는 1인이 있으니, 이 사람을 내려보내 검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좋다.”라고 하였다.

이서우(1633~1709)는 당시 동래부사였다. 유혁연이 왜검술을 익히게 하기 위해 이서우에게 왜관의 형세를 먼저 살펴보게 한 후에 왜관에 들여보낼 수 있다는 답을 받은 후에 숙종에게 아뢰고 있으며, 숙종은 이를 허락하고 있어, 숙종 5년에 김체건이 왜관에 잠입했음을 알 수 있다.

동래왜관은 숙종 4년에 새롭게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왜관은 개항장의 설정과 변천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는데,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으로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으로 인한 국교 회복과 동시에 처음에는 제포(薺浦) 만을 개항했고, 부산포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1541년 제포에서 조선의 관병과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를 폐쇄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1544년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다시 통교가 중단되자 왜관도 폐지되었고, 다시 명종 2년(1547) 정미조약의 체결로 부산포에만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다시 폐쇄되었던 왜관은 선조 40년(1607) 국교 회복과 더불어 부산항 내 두모포(豆毛浦)에 새로 설치되었다가 숙종 4년(1678) 초량(草梁)으로 옮겼던 것이다. 왜관이 초량으로 옮기면서 많은 일손이 필요했고 동래부사였던 이서우를 통해 김체건을 고로(雇奴) 즉, 머슴으로 왜관에 잠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왜관도

김체건이 정체를 속이고 머슴으로 왜관에 들어가 배우려고 할 정도로 당시 조선 정부에서 검술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체건이 이 곳에서 왜검을 배운 과정은 「김광택전」에 잘 나타나 있다.

왜에는 신검술이 있었는데 그 또한 비밀이라 하여, 이웃나라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체건은 그 서로 겨루는 것을 엿보고, 번번이 땅속에 움을 파고 숨어 엿보고 따라하였다. 수년이 지나 드디어 왜의 기술을 다하여 더 배울 것이 없었다. 임금(숙종)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환상인 듯하여 사람들을 끝없이 놀라게 하였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훈련도감의 교사에 임명하였다. 오늘날 모든 영에서 병사들이 하는 왜도는 체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김광택전」).

당시 일본인들도 자신들의 검술을 보여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국에 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택전」을 통해, 김체건이 이런 상황에서 왜검을 배우기 위해 택한 방법은 그들의 훈련 장소에 움을 파고 몰래 엿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일을 하는 틈틈이 왜인들 모르게 몰래 엿본 기법들을 연습하였을 것이다. 왜관에는 많으면 1천명 이상이 거주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약 500~600여 이상의 인원이 거주하였고, 그 중에서 검술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왜인들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몇십 명 정도였을 것이다. 왜관 내에 거주하는 왜인들 중 무인들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련을 훔쳐보면서 왜검을 익혔을 것이다.

김체건은 그렇게 수년 동안 이어져서 그 왜검법을 터득하게 되자, 다시 김체건은 훈련도감으로 복귀하였다고 하는데, 그 기간은 길게 잡아도 숙종 5년(1679) 7월부터 일본에 통신사행이 출발하는 숙종 8년(1682) 5월 이전의 3년 여 정도로 보인다.

그는 임금인 숙종 앞에서 그가 배워온 바를 시연하였는데, 재를 뿌리고 움직이면서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고 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김체건이 몰래 훔쳐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왜관에 파견되기 이전부터 ‘조선세법’이나 ‘본국검’ 등 검술에 능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점은 '숙종실록'에서 몸놀림이 몹시 빠르고 날래고 힘이 있으며 무예에 능한 1인을 선발하여 보냈다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왜관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주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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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도마왕

    이렇게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기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조들과는 달리, 그들을 계승한답시고 그들의 이름과 명성만을 빌린체 역사를 왜곡하는 무술단체가 있습니다. 오컬트 단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오컬트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2010-01-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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