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돌을 베다-김유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김유신의 무예와 검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仇衡)왕의 증손자이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을 도와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무력은 진흥왕이 한강 하류 서해안 일대를 통치하기 위해 553년 새로 설치한 주의 군주가 된다. 무력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 또한 여러 전쟁에서 큰 업적을 거둬 금관가야 왕족이 신라에서 명문가로 자리를 잡는데 한몫을 한 대장군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에서 태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 때 김유신이 태어났다. <삼국유사>에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별, 즉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개의 별 무늬가 있었고,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천에 있는 태령산은 김유신의 태를 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무예 수련과 관련해서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의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복종하였으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일컬었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공의 나이 17세 때였다.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며 슬퍼하고 한탄하여 침략해 오는 적을 평정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혼자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늘에 고하며 맹세했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이리 그리고 범이 되어 우리 강역을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켜 편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나는 한낱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뜻을 재앙과 어지러움 소탕에 두고 있으니, 하늘은 아래를 굽어보시고 저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

4일 째 되던 날, 문득 한 노인이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이 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니 웬일인가?”라고 하였다.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노인은 “나는 일정한 주소가 없이 인연을 따라 행동을 하는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고 한다네”라고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거듭 절하며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노인은 잠잠하여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여 6,7차까지 마지않으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아직 어린데 3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라며 비법을 전하면서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며 2리쯤 갔다가 다시 쫓아가 바라보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직 산 위에 5색과 같은 찬란한 빛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건복 29년(612)에 이웃한 적병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이르니, 공은 더욱 비장한 마음을 격동하여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한다.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에서 맹세하듯 빌었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리어 보검에 신령스러운 기운을 주었다. 3일 되는 밤에는 허숙(虛宿), 각숙(角宿) 두 별의 뻗친 빛이 환하게 내려 닿으매 공의 검이 동요하는 것 같았다.


김유신은 17세에 중악에 들어가 난승이라는 이인에게 방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화랑세기>는 “중악에 들어가 노인에게서 비결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검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은 무예보다는 신이한 능력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김유신 장군의 영정(왼쪽)과 최근 선덕여왕에서 김유신 장군역을 맡은 엄태웅


하지만 현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삼국사기>의 기재된 김유신 관련 기록은 김유신의 현손인 김장청(金長淸)이 지은 <행록(行錄)> 10권을 바탕으로 하여 서술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조차도 만들어 넣은 말이 많다고 할 정도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한병철·한병기는 1997년 출간한 <독행도>에서 김유신이 ‘신검주(神劍呪)’ 주문수도를 했다는 구술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들이 기록한 신검주는 이렇다.

상기천검 이기 천지진동(上氣天劍 理氣 天地振動)
지기천검 이실 상천진동(地氣天劍 理失 上天振動)
천검상이 천상 천변만화(天劍相異 天上 千變萬化)


이 신검주를 5백 회 이상 주송하면 심신이 진동하고 천지의 진동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급처럼 검증되지 않은 것이므로 신빙할 수는 없다. 김유신의 신이한 검술 수련은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보인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공 유신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습니다.

허균은 김유신이 명주(溟州) 대령산(大嶺山), 즉 지금의 강릉 대관령에서 검술을 수련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자료이므로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다만,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그가 이전에 배워 알고 있던 무예들을 17~18세 때 산 속에 들어가 집중 수련했다는 정도로 보면 좋을 듯하다.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이인을 만나 좀 더 나은 기법을 익혔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18세가 되는 임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이 풍월주의 위에 오르는 날 낭도들과 병장기를 만들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단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무예수련을 한 사실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김유신의 검술 수련과 관련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기록도 참고가 된다.

단석산(斷石山) :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을 구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 하였다”라고 한다. ……. 인박산(咽薄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김유신이 보검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고 병법을 기도하던 곳이다”라고 한다.

김유신이 신검을 구해서 단석산과 인박산에 들어가 검술 수련을 하였다고 한다. 단석산은 경주에서 약 40리 떨어진 건천읍에 있는 산으로 경주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김유신이 석굴 속에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였는데, 돌을 베어 그 벤 돌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다고 한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시문집인 <이계집(耳溪集)>의 ‘대각간(김유신)의 묘에서 비 내리기를 기원하는 글[大角干墓祈雨文]’에도 “돌을 자르며 검을 훈련하다[斬石試劒]”라는 글귀가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 또한 그렇게 믿을 만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다만, 돌을 잘랐다는 전설은 그의 검술이 힘을 위주로 한 검술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정도는 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점은김유신이 술을 먹고 잠이 든 사이에 말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천관녀로 알려진 창기의 집으로 가자 말을 참(斬)하고 안장을 버리고 돌아왔다는 <파한집(破閑集)>의 기록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참(斬)’은 ‘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관헌들은 참형(斬刑)을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있다는 즉 분리되었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신수이처(身首異處)’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유신이 말을 참했다는 것은 그의 검술이 상당한 힘이 수반되는 검술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중.일에서 모두 김유신과 비슷한 사례 전해져


아규 세키슈사이

재미있는 점은 야규신가게류[柳生新陰流]로 유명한 일본의 야규[柳生]가의 유조(流祖)인 야규 세끼슈사이 무네요시[柳生石舟齊宗嚴, 1529~1606]가 큰 돌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 소주 호구산(虎丘山)에도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 삼아 잘랐다는 전설이 담긴 시검석(試劒石)이 존재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검과 관련한 한·중·일 삼국 간의 유사성을 볼 수 있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야규 세끼슈사이가 익힌 신카게류[新陰流]는 가미 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쓰나[上泉伊勢守信綱, 1508~1577(추정)]가 창안한 것이다.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愛洲移香齋久忠, 1452~1538]의 카게류[陰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가 우토[鵜戶] 신궁에서 수련을 하던 중 꿈에 원숭이 모양의 신이 나타나 검의 비법을 전했기 때문에 엔삐카게류[猿飛陰流]라고도 한다. 카게류는 강하고 직선적인 정면 공격이 주특기였는데, 상대를 벨 때는 뛰어오르며 자신의 몸을 검과 하나로 하여 내던지듯 베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야규의 신카게류도 원래 이러한 형식을 바탕에 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명의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신유년 즉, 1561년 진중에서 얻은 영류지목록(影流之目錄)이 <기효신서>에 실려 있는데, 원비(猿飛)·원회(猿回) 등의 명칭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이스 이코오사이 히사타다의 카게류인 것으로 보인다. 이 카게류는 <기효신서>의 장도(長刀)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에서 편찬된 <무예제보(1598)>의 장도, <무예도보통지(1790)>의 쌍수도(雙手刀)로 이어진다. 즉, 한·중·일 3국의 검술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사진출처 : 네이버블로그)

* 허인욱의 무인이야기는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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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만은

    비재가 재밌었다!!!!!!!!!!!!!!!!!!!!!

    2009-10-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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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ㅋㅋ

    김유신이 천관을 사랑했다는건 조금
    믿기지가않아요

    2009-10-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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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하다

    그럼 바위를 자르느냐 못자르냐로 오리지널을 가리면 되겠네

    2009-09-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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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인

    그렇다면 한국검술이 원조이네. 그것도 900여년이나 앞선 것이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16세기에 바위를 자르는 검술이 있었는데 한국은 신라시대 김유신이 7세기 초에 바위를 잘랐으니 한국 검술이 원조로서 거의 천여년이나 검술에 앞서 있었네. 자부심이 생기네.

    2009-09-2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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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은

    가야계 이므로 신라 왕계가 아닙니다. 가야계입니다..김일제의 후예로 보기 어렵습니다..

    2009-09-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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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은

    흉노족인가요?

    2009-09-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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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므츠원명류

    무츠 원명류 가짱이야 맨손으로 다때려잡어 야규신카게류도 이겼어

    2009-09-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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