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이야기] 거칠고 질박한 무인, 야뇌 백동수 1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에 참여한 백동수(白東脩, 1743~1816)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와 교류를 하던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지금의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麒麟面)으로 거처를 옮기려는 백동수에게 글을 써 주었는데, 그 글이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글(贈白永叔入麒麟峽序)’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제목에 보이는 영숙(永叔)은 백동수의 자(字)로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끼리 부르는 이름이었다. 성년이 되는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부모나 스승 이외에는 이름 자체를 부르는 것이 결례로 생각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에 그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다른 호칭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자이다. 자 또한 부모나 웃어른들이 지어주는 것이다. 그 글을 보면, 백동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백영숙(白永叔: 백동수)은 장수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에는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있어 지금까지도 사대부들이 서글퍼하고 있다. 백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능하고 전고(典故)에도 숙달되어 있다. 젊어서는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무과(武科)에 급제도 했다. 비록 시운을 만나지 못해 영달하지는 못했지만 군주에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그 뜻은 충분히 선조의 뛰어난 공적을 계승할 만하여 사대부에게 부끄럽지가 않다.”

백동수를 장수 집안의 후손이라고 하고 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충장공 백시구(白時耈, 1649~1722)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백상화(白尙華, 1691~1768)였는데, 백시구의 서자였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다. 백동수는 1743년에 백사굉(白師宏, 1721~1792)과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지원의 글을 보면, 백동수는 말타고 활을 쏘는 것에 능했다고 하는데, 성해응은 「백동수에 관한 일을 쓰다(書白永叔事)」라는 글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굳센 무인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무예 스승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으로부터 검술을 배웠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반 가문이다 보니 그 집안의 수련법을 통해 무예를 수련했을 가능성도 있다.

1759년(영조 35)에 사도세자와 임수웅 등에 의해 󰡔무예신보󰡕가 완성되었고, 후일 그가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에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는 권법의 맨손무예와 검술과 창술 등 조선 병사들에게 전수되어 오던 무기술을 수련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박지원은 백동수가 전서나 예서의 글씨에 능했고 전고에도 능했다고 하고 있다. 전고는 일정한 의식을 말하는 전례(典禮)와 옛날부터 전해 오는 규칙을 말하는 고사(故事)를 의미한다. 거의 백과사전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이다. 따라서 백동수가 무인이면서도 문에도 상당한 소양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해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지은 '청성집(靑城集)'의 '인(韌)에 대한 이야기를 비인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백동수에게 해 줌(韌說贈白永叔之官庇仁)'이라는 글을 보면, “백영숙은 무예를 하고, 글을 하는 사람이다. 어려서는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다가 중년에는 의지를 꺾고 학문을 배워 그 재능과 뜻을 이루었으니, 영숙의 도량이나 씀씀이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무예 수련에, 나이가 어느 정도 들은 이후에는 학문에 힘썼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백동수는 그림을 보는 감식안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1788년(정조 12) 백동수의 매형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음악으로 노친의 생일에 즐겁게 해주는 자리에 참석한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그 자리에서 백동수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백동수를 본 첫 인상에 대해,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백동수의 일을 기록하다(書白永叔事)'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리에 앉아 잠자는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이) 홀연히 일어나서 술 취한 눈을 닦더니, 그림을 잘 그리는 김홍도의 노선도(老仙圖)를 달라고 해서 (그 그림을 받아서) 찢어버렸다.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화법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곧 영숙이었다. 나는 또한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겼다.”

김홍도의 그림마저 화법이 잘못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림 보는 눈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림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합리적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김홍도의 작품을 찢어버리는 그의 모습이 성해응에게는 강렬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백동수는 29세 때인 1771년(영조 47)에는 3년마다 열리는 식년(式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호탕한 성격의 그에게 관직 생활은 맞지 않았던 듯하다.

박제가 송백영숙기린협서

이에 대해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정유각집(貞㽔閣集)'의 '백영숙을 기린협으로 보내며 쓴 글(送白永叔基麟峽序)'에서는 운 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말했지만, 성해응은 '백동수의 일을 기록하다'에서 그가 관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고 유곽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성해응은 이어서 다음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그 무리들을 이끌고 북한사(北漢寺)의 누각에 올라, 술을 내오고 광대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무뢰배들이 무리를 지어 (백동수와 친구들을) 뒤쫓아 왔다. 이에 백동수가 눈을 부릅뜨고 분기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서는데, 수염이 다 뻗칠 정도였다. (이 모습을 본) 무뢰배들이 두려워하며, 도망갔다.”

지금이나 예나 다른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것을 보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는데, 북한사에 놀러 온 백동수의 무리들을 쫓아 온 무뢰배들도 그러한 유형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분기탱천한 백동수의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백동수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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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ㅎㅎㅎ

    조빠로 말하면 무예 무술 무도에 사이비가 어디있니? 무엇으로 해결할라구 무먹 칼 뭐........이빨로는 사이비가있지요 ㅍ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2011-08-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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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할 날이 없다

    "동냥은 커녕 쪽박 깨는 무진법(택견연맹)" 택견외는 다 사이비전통무예다랍니다. 많은 무예인들이 분노하는것 같아요... 무예신문/ http://www.mooye.net/sub_read.html?uid=4046§ion=sc2§ion2=기고

    2011-08-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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