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통지] 태권도와 가라테 역사의 상관관계 - 1


  

▶ 가라테 역사의 시작! 오키나와 문화와 이해

▶ 한국, 중국, 일본,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하다?

 

가라테 역사의 시작은 오키나와에서 출발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키나와를 둘러싼 다양한 학설은 지금도 뜨거운 감자로 동양 3국(한국, 중국, 일본)의 무술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무술사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크게 상고주의(尙古主義), 신비주의, 국수주의 그리고 이 모두에 상업주의까지 가세하여 현대사적 무술 관점이 계속 진화함을 알 수 있다.

 

 상고주의+신비주의+국수주의+상업주의 

 

오키나와 개관을 보면 인구 약 140~150만(나하시권역 : 130만 거주)되는 작은 섬이다. 오키나와 최대 도시인 나하(なは)를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 읽으면 '나와'가 되는데, 이 역시 오키나와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류큐(流球)라는 표기는 중국에서, 오키나와를 부르는 이름은 류큐(流球)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오키나와는 토착 명칭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지만, 한편 류큐국(流球國), 류큐왕 또한 공식 명칭이었다.

 

오키나와의 역사는 작은 부족이나 호족세력으로 출발하여 통일된 것은 쥬우잔의 쇼씨(쇼하시, 尙巴志:재위-1421-1439)가 통일하여 제1대 쇼씨 왕국 건립했다.

 

명나라와 조공관계 수립: 1370년 이후부터 조공관계 수립되었고, 대명의 조공체제 확립으로 독립 왕국인 동시에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오키나와 줄다리기(사진:구글)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고려왕건의 교류설, 삼별초의 이주설,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 이 당시 류쿠왕국과 조선의 중계무역이 활발했고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했다고 만국진량종(1458)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구글지도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한국과 중국과 일본과 삼각형을 이루는 정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3국과의 관계와 문화 그리고 일본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는 과정까지 이번 영상에서 볼 수 있다.

 

27부에 계속..........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무카스미디어 = 엄재영 태권도 칼럼리스트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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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영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대한태권도협회 이사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11)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20)
아시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금메달(2022)
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무예통지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태권도역사 #태권도진흥재단 #문화체육관광부 #태권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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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 카라테

    전통 카라테 유파의 형성 - 쇼토칸, 시토류, 고쥬류, 우에치류

    오키나와 카라테는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고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19세기말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류쿠처분(1879)으로 류쿠가 오키나와(沖繩)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영토로 편입되고 카라테는 지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교습이 가능해 졌고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됨으로서 학교체육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도테(唐手)가 학교체육화 됨으로서 교습의 스타일과 수련 방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카라테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필살기가 아니게 되어 위험한 기술은 대폭 삭제되었고 고류 오키나와테의 특성이 소멸되어 간 것이다. 

    더불어 오키나와테의 명인들이 대거 일본 본도에 진출하여 카라테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극진으로 대표되는 지찐카라테(실전공수, 實戰空手) 이전의 카라테 유파, 그리고 고류(古流) 오키나와테와도 구분되는, 일본에서 보급되고 교습된 카라테를 일단 전통가라테라고 부르기로 한다. 

    전통 카라테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그것이 공인된 용어인지는 필자는 잘 모른다. 
    일본의 전통카라테는 수백 가지 유파가 있으나 크게 세 그룹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토스류(사주류, 絲洲流), 고쥬류(강유류, 剛柔流), 우에치류(상지류, 上地流)가 그것이다. 다만 이토스류는 다시 쇼토칸(송도관, 松濤館)과 시도류(사동류, 絲東流)로 분류될 수 있지만 원형은 같다고 봐도 될 것이다. 각 유파별 특징과 형성 경위에 대해 알아보자. 


    1. 쇼토칸(송도관, 松濤館) 

    카라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송도(松濤) 후나고시 기찐(船越義珍, 1868-1957))이 창시하였다. 

    송도는 서예가로도 활동하였던 후나고시의 호이다. 그의 고향 나하의 해안에 소나무 숲이 유명하고 바람이 불면 소나무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것에서 호를 소나무의 파도, 송도라 지어졌다고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어릴 적 아자토 야스쯔네(安里安恒, 1828-1906)로 부터 데를 전수 받았고 이후 또 다른 스승인 이토스 야스쯔네(絲洲安恒, 1831-1915)를 사사하게 된다. 아자토와 이토스는 마쓰무라 소콘 문하의 동문이고 계보 상으로 슈리테가 되지만 이토스는 따로 마쓰무라 고사쿠로부터 토마리테를 배운 바가 있으므로 후나고시에게 토마리테의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후나고시는 슈리, 나하, 토마리의 모든 테의 특징을 아우르지만 쇼토칸의 특징은 그래도 빠르고 경쾌한 슈리테를 특징으로 하며 후에 이것은 태권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타일이 된다. 

    그의 유년기는 몰락한 무사 집안의 가난하고 병약한 불우한 것이었다. 학교 졸업 후 공립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그 중에 자신의 도테(唐手)를 가르치게 된다. 마침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취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유도등 무술종목을 학교체육으로 도입하고 카라테도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쳐지게 된다. 시범단을 조직하여 오키나와 전역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행한 몇 번의 시범은 일본에서 온 관리의 눈에 인상적으로 보여 그는 일본 본토로 진출할 기회를 얻는다. 1917년 최초로 본토에서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후 그는 카노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8)가 설립한 코도칸(강도관, 講道館) 유도장의 한편에 카라테 클래스를 만들어 지도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상복 차림으로 수련하던 것을 유도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통일된 지금의 카라테 도복을 만들었고 띠의 색깔, 단(段)과 급(級)의 체계 역시 유도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혹자는 띠의 색깔을 말할 때 띠를 다른 색깔로 만드는 게 아니고 처음엔 백띠였던 것이 풀밭에서 오래 수련 하다 보니 처음엔 땀에 절어 누렇게 됐다가 풀물이 들어 퍼렇게 된 다음 피와 땀이 말라붙어 갈색이 되고 더욱 더 연륜이 쌓이면 검게 변한다고 하나 이는 터무니없는 지어낸 이야기다. (필자도 이걸 그대로 믿고 띠 색깔이 변하도록 일부러 빨지 않은 기억이 있다.) 혹은 띠 색깔이 일본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역시 근거 없는 얘기다. 벨트시스템은 수백년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 80년 전인 1923년에 카노 지고로가 만든 것이며 후나고시가 이것을 모방했을 뿐이다. 

    어쨌든 후나고시에 의해 현재의 카라테 도장의 모습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후나고시가 일본에서 카라테를 가르치기 시작한 1920년대 일본에서 일본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적인 것을 숨기고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복에 유도적 분위기를 도입했으며 시합의 방법도 검도의 것을 도입했다. 쇼토칸에서 일격의 슨도메(寸止)로 승부를 결정짓는 시합 룰을 만든 것은 검도의 영향이라고 말해진다. 빈손검도인 셈이다. 

    카타의 이름도 일본화 시켰다. 쿠샹쿠는 간쿠(관공)로, 나이판치는 테키(철기)로, 세이션은 한게츠(반월)로, 완슈는 엠피(연비)로, 친토는 간가쿠(암학)로 새로운 이름을 창안하여 붙였다. 더불어 오키나와 말로 된 명칭을 비슷한 일본어 발음의 한자어로 표기하였다. 피난을 헤이안으로 읽고 평안(平安)으로 표기한 것처럼. 

    이후 후나고시 스타일은 빠르게 일본화 되어 갔다. 1922년에 문부성 주최 고무도 박람회에도 참가하였고 1924년 최초로 게이오(慶應)대학에 당수부를 만들고 이어 그 경쟁 대학인 와세다(早稻田)대학 등으로 대학 당수부를 조직해 나갔다. 1934년 드디어 자기의 호를 따서 쇼토칸을 창립한다. 쇼토칸이 일본 본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당시 지식계급인 대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친 것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한국의 유학생들이 이를 배움으로서 태권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쇼토칸 스타일은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일본 전통 카라테이지만 동시에 오키나와테의 특징이 많이 상실된 점도 있다. 

    참고로 카라테가 공수(空手)로 한자 표기가 통일된 것은1936년의 일이다. 최초로 카라테를 공수로 표기한 것은 후나고시의 동문인 하나기 쵸모(花城長茂, 1869-1945)인데 1906년의 일이다. 이후 당수가 많이 쓰이고 간간히 공수라는 말도 쓰였지만 일본이 군국주의로 감에 따라 적국인 중국을 연상시키는 말 대신 공수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하나기와 강유류의 창시자인 미야기 쵸준 등이 공수로 통일한 것이다. 唐手든 空手든 발음은 가라테이다. 

    공수의 공(空)자로 무슨 불교와의 연관성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복건성의 남소림사(소림사는 청조 초기에 만주족 정권의 공격을 받아 하남성 등정시의 북소림과 복건성의 남소림 두 곳으로 나뉘게 된다)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와 공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토스 역시 카라테는 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제자인 후나고시가 1956년에 저술한 자서전 공수도일로(空手道一路, karatedo : my way of life)에 보면 공(空)의 개념을 불교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수란 empty hand 로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과 일맥상통한다고. . . 상당한 인텔리였던 후나고시까지도 죽기 한 해 전 88세 때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그렇게 썼고 또 그렇게 알고 죽었을 것이다. 근거 없는 신비주의는 이처럼 도취적이다. 


    2. 시토류(사동류, 絲東流) 

    시토류는 마부니 겐와(摩文仁賢和, 1889-1952)가 창시하였다. 슈리의 무사집안 출신으로 13세 되는 1902년부터 이토스 야스쯔네 문하에서 슈리테, 토마리테를 배우고 친구인 미야기 쵸준의 권유로 1909년부터 히가오나 간료에게서 나하테를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스승 히가오나의 스승인 아라가키 세이쇼로부터 오키나와 고부도(古武道-창, 봉, 흔히 쌍절곤이라고 하는 눈차쿠등이 있다)를 직접 배웠다. 이토스 도장의 2대 사범을 역임하였다. 

    고교 졸업, 군 제대 후 경찰에 투신하여 1918년 경 후나고시, 미야기 쵸준등과 당수연구회를 발족시켜 카라테를 연구, 보급하며 구니왕자. 가토왕자가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이름자 즉 이토스(사주, 絲洲)의 사(絲)자와 히가오나(동은납, 東恩納)의 동(東)자를 한 자 씩 따고 이를 그대로 음독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시토류(사동류, 絲東流)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사동류는 류파의 이름이고 단체의 명칭은 여전히 이토스카이(사주회, 絲洲會)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니혼 카라테도 이토스카이 (日本空手道 絲洲會)이며 카라테 역사에서 이토스의 비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시토류는 쇼토칸과 더불어 이토스류로 통칭되고 있지만 일본화 되어버린 쇼토칸에 비해서 오키나와데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3. 고쥬류(강유류, 剛柔流) 

    고쥬류와 후술(後術)하는 우에치류는 앞서 말한 쇼토칸이나 시도류와는 형성 경위와 기술적 특성이 많이 다르다. 그것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 남파 권법의 영향이다. 이 두 유파의 창시자들은 본인이 직접 중국에 가서 중국 남권을 배웠고 오키나와테로 변하기 전의 중국 권법을 직접 체득 한 것이다. 

    고쥬류는 미야기 쵸준(宮城長順, 1888-1953)에 의해 창시되었다. 오키나와의 관료계급 출신의 숙부에게 입양되어 부유한 환경에서 테(手)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 숙부는 상선을 가지고 중국과 무역에 종사하여 그는 중국을 왕래하는데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이다. 

    14세 되던 1902년 당시 나하테의 명인이던 히가오나 문하에 들어가 나하테를 수련하고 발군의 실력을 보여 히가오나의 우찌데시(內弟子)가 된다. 1905년 중국 복건성을 방문하여 남파권법을 배우고 이후 두 차례 더 중국을 방문하여 약 3년간 체류한다. 

    중국에서 돌아와 고향 나하의 지방 경찰국의 무술사범을 역임하였고 나하 상업고등학교에서도 가르쳤다. 한때 이토스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이토스는 그가 이미 나하테를 마스터 했다고 생각하여 제자로 거두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몇 가지 시연을 해 보이고 이론적 부분에 조언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가 1940년에 창안한 겍사이 카타가 이토스의 슈리테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 본토에 자주 여행하며 카라테 보급에 진력하여 교토대학과 간사이 대학에서 당수부를 만들어 가르치고 제자들을 배출한다. 1933년 카라테로는 최초로 일본 부도쿠카이(무덕회, 武德會)에 가입한다. 

    고쥬류는 그 명칭부터 다분히 중국에서 출발한다. 1930년 일본본토에서 당수를 보급하고 있던, 그의 수제자가 다른 유파로 부터 그 스타일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하고 이 사실을 스승에게 보고한다. 테, 나하테, 또는 도테(唐手)는 유파의 명칭이라기엔 좀 곤란했던 것 같다. 

    제자의 보고를 받고 미야기 초준은 며칠 고심 끝에 자기 스타일을 고쥬류(강유류, 剛柔流)라 명명한다. 강유(剛柔)는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의 권법편에 나오는 요결의 한 구절이다. 

    인심동천지(人心同天地) - 사람의 마음은 천지와 같고 
    혈맥사일월(血脈似日月) - 혈맥은 일월처럼 순환된다. 
    * 법강유탄토(法剛柔呑吐) - 호흡은 강하고 유하게 삼키고 뱉어야 하며 
    신수시응변(身隨時應變) - 운신은 시간과 기회에 변화무쌍하고 (후략). . 
    *참고로 무비지는 모원의가 1621년에 편찬한 19책 240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군사 서적으로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표준이 된 책이다. 

    이처럼 강유류는 무겁고 느리며 호흡을 강조하는 중국 남파권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강유류는 카타를 수련할 때 소리 내어 호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산찐(三戰, 삼전)을 강조하는 것 역시 남권의 영향으로 보인다. 미야기 쵸준의 제자 중 한국인 소네이쥬(조형주, 1907-?)가 있었고 그와 함께 최영의가 강유류를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4. 우에치류(상지류, 上地流) 

    우에치류는 우에치 간분(上地完英, 1877-1948)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19세 때 중국 복건성으로 건너가 13년 간 체류함으로써 청년기를 중국에서 보내는 것이다. 어릴 때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몰락한 무사 집안으로 농사를 짓고 살던 그의 부친 우에치 간도쿠로부터 도테와 오키나와 고부도(古武道)를 고루 수련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오키나와데의 계보와 연결시키기가 좀 애매하다. 

    중국에 건너간 그는 쓰시와(1874-1926, 추치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라는 중국인의 도장에서 수련한다. 쓰시와는 강력한 남소림권과 부드러운 아이션켄(?)이라는 스타일을 합쳐 판가이온 (半剛穩 쯤으로 써지는지 모르지만 반은 강하고 반은 부드럽다는 뜻)이라는 스타일을 만들어 도장 겸 약국을 개설하여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우에치 간분은 특히 산찐(삼전, 三戰)을 강조하여 첫 3년간 오직 산찐형만 연습했다고 하며 후에도 자주 "삼전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중국에서 체류한 13년간 그는 산찐, 세이션, 산세이류의 단 세 가지 형만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콩깍지를 단지에 담아 관수단련을 하여 동료 제자들이 신기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술 수업과 의학을 함께 공부했다. 

    1904년 27세 때 쓰시와의 조수가 되고 1907년에 남경에서 자기 도장을 개설한다. 1910년 도장 문을 닫고 오키나와로 돌아오지만 그는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시 오키나와는 경제난이 심각해져 그는 직장을 얻기 위해 47세가 되던 1924년 일본 본토로 건너간다. 관서지방의 한 섬유공장 노동자로 취업을 하고 1925년이 되어서야 자기의 도장을 개설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15년 만의 일이며 판가이온이라는 중국권법이 우에치류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우에치류는 가장 중국적인 카라테라 할 수 있으며 그의 아들인 우에치 가네이가 이를 이어받아 일본 전역으로 보급시킨다. 


    출처: https://ajurnak.tistory.com/entry/가라데의-기원 [蓮花中君子者也]

    2024-07-20 04:37:01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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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하나의변화

    도복-한복수련복만들기
    띠-한복복식띠로 개량하기
    도장-한옥식 수련터
    예법-한국식예법교육

    2024-07-19 06:13:59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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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부터우리것으로

    무술무도가운데에서
    중국일본강대국사이
    침약침탈속에서
    그들의문화을 우리것으로만들었다
    아시아에서 최고의무술무도로 그것이
    우리에민족의정신이다 무서움힘
    태권무예의시작이다 지금부터가
    세계태권무예로 우리의문화을
    심어나가자 우리것으로 태권무예은
    만들어 또하나의도약을하자
    수련복개선 띠문화개선 도장문화개선
    전통식또하나의변화로

    2024-07-19 06:06:03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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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성

    태권도 도장 가면 주춤 서기와 함께 가장 먼저 배우는 정권지르기. 역시 쇼토칸 가라테의 기본 수련법으로 정권 쥐고 좌우 번갈아 가며 지르는 것까지 똑같다. 애초에 손 기술이 거의 사장된 현대 태권도에서 정권지르기를 가장 먼저 배우는 아이러니도 이런 가라테의 영향이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외 약속 겨루기 같은 것도 가라테에서 왔다.

    태권도계 일각에선 태권도가 일본 가라테가 아닌 오키나와 테에서 직접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물론 오키나와 테에서 비롯된 가라테가 일본 본토에 본격적으로 전파된 게 길어봤자 20세기 초반이고, 이때 배운 사람들이 한반도에도 전파한 것이라 양 지역의 전파 역사가 생각만큼 길게 차이나진 않는다. 다만 후나코시 기친은 오키나와테를 그대로 보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한 쇼토칸 가라테를 일본에 보급했고, 다수의 태권도 초기 원로들은 이 쇼토칸 가라테 혹은 기타 일본화된 가라테 유파 무술을 일본 본토에서 배우고 한반도에 와 도장을 차렸지 오키나와에서 오키나와인에게 직접 무술을 사사한 사례는 없었기에 오키나와 테가 한반도에 직접 유입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더욱이 오키나와 테의 경우, 중국 남권에서 파생된 바 중국 무술과 흡사한 모습을 보이며 타격기와 유술기가 혼합된 형태라 지금의 태권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키나와 테의 형태를 많이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고주류 가라테를 보더라도 근접해서 잡고 넘어트리는 기술들을 꽤 많이 사용하는데, 입식타격기로 변모한 쇼토칸 가라테를 기반으로 파생된 태권도는 오키나와 테와 형태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쇼토칸과 마찬가지로 태권도에서 유술기는 품새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즉 오키나와 테에서 태권도와 공수도로 같이 갈라지듯 파생된 것이 아닌, 오키나와 테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 초창기 형태의 가라테에 태권도가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봄이 합당하다. 도복과 띠 체계도 그렇게 이해해야 보다 자연스럽다. 이것은 오키나와 테가 일본에서 현지화를 위해 유도에서 차용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일부 태권도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들은 앞차기, 옆차기, 뒷차기 내지는 관절차기, 금적차기 정도만 배웠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키나와테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발차기들이다. 쇼토칸 가라테에서는 1936년~1945년 사이 후나코시 기친의 아들 후나코시 요시타카가 원래 발차기가 그다지 없던 기존 오키나와 테에 사바트 발차기를 차용 및 체계화하였다. 이후 가라테 역시 손 기술이 주축이지만 발차기 역시 제법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태권도와 수렴진화하는 그림을 보이고 더 나아가 역으로 태권도의 기술을 차용하기도 한다.

    2024-07-19 05:05:55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역사성

      크게 보면 태권도는 쇼토칸 발차기를 개량 개조한 형태들이다. 통합 이전 각 관들은 본인들이 수련하던 계파들의 가라테를 수련하였지만 송도관 계통의 청도관, 무덕관과 교류하기 전엔 발차기 수련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에 대해선 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도 조선연무관서 과거 권법을 배울 당시 발기술을 배우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물론 현재의 태권도는 가라테와 많이 다르다. 애초에 가라테부터가 중국 남권을 차용한 오키나와 무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가라테가 일본 열도에 보급되기 시작한 당시 오키나와는 조선반도와 사정이 비슷한 식민지였기에 가라테 자체도 당시 일본에선 비주류 무술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태권도가 쇼토칸 가라테에서 유래된 무술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유도하고 차이가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유도가 브라질에 유입되어 탄생한 무술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2024-07-19 05:12:18 수정 삭제 신고

      0
  • 있는 그대로

    태권도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태권도는가라테를 변형, 발전시켜 대박난 현대무술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탄생, 이전 여러이름 난립

    태권도 최홍희, 태권도 태 발을 의미하고 태껸과 연결

    태권도 국기로 확립 이론화 체계화 이후 세계화 박차

    태권도 : 한국 무도인이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세계적인 무술이 되었다>

    1.가라테를 변형, 발전시켜 대박난 현대무술
    태권도(跆拳道)는 한국 고유의 전통무술이나 민속놀이인 태껸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태권도는 일본 가라테(からて, 空手道)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이를 변형, 발전시켜 1950년대 창시된 현대무술이다.

    가라테는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 당(唐)나라 ㅡ 류큐[琉球: 현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성화되었다.

    류큐에서는 중국 당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당수(唐手)라고 불렸는데, 일본에서 공수(空手)로 바꾸었다. 일본발음으로 둘다 가라테다.

    일제 때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무술 수련과 교육 체계 역시 일본이 가장 선진적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우리 선배 세대가 그걸 배웠고, 해방 이후 수많은 무도인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태권도라는세계적인 무술로 성장시킨 것이다.

    2.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탄생

    1950년대 후반 우리 무도계에는 당수도, 공수도, 권법, 화수도, 수박도, 태권도라는 명칭들이 난립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수박이나 태껸과는 무관했고, 가라테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당시 29사단 사단장 최홍희와 그의 부하 남태희가 만들었다.

    그해 9월 강원도 속초에서 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때 29사단의 가라테 시범이 있었는데,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최홍희에게 "저게 바로 예로부터 전해오는 태껸이구먼. 앞으로 전 군에 보급시켜봐!"라고 말했다.

    이에 최홍희와 남태희는 일본의 가라테를 지칭하던 공수도, 당수도를 버리고 옥편을 찾아가며 ‘태껸’과 비슷하게 들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이다.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무도인들은 가라테와 구분되는 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참고로 최홍희는 일제 때 도쿄 중앙대학에 다니면서 가라테부에 있었고, ‘가라테의 아버지’로 알려진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의 쇼토칸(松濤館)에서 정식으로 가라테를 배웠다.

    그의 부하 남태희는 해방 이후 ‘당수도 청도관(靑濤館)’에서 무술을 수련했다. 당수도, 즉 가라테를 가르치는 도장이었다.

    3. 태권도 명칭 작명 관련
    첫번째 글자인 태(跆)와 관련하여 최홍희는 태권도의 '태'자는 발을 의미하며 태껸과 연관짓기 위해 "밟을 태(跆)"를 붙였다고 한다.

    태권도는 높이 도약하는 자세가 많은데 도약을 하려면 바닥을 강하고 빠르게 밟아야 한다.

    그리고 두번째 글자는 '권(拳)'자로 가라테를 음독한 공수도 또는 당수도에서 사용되는 손 '수(手)'자를 고려했다가 그와 비슷한 의미인 주먹 '권(拳)'이 채택하였다고 한다.

    세번째 글자인 도(道)는 태권도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현대 창작 무술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데, 무예에 도(道)를 붙이는 건 일본식 조어로 전통적인 한국식 명명법이 아니다.

    4.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국기(國技)로 인정

    1959년, 현역 장성이었던 최홍희가 그 위세를 배경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며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이후 1961년에 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당'수'도를 절충하여 새로 만든 명칭이었다.

    1965년 8월에 협회의 이름을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었다.

    19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립된다. 총재는 최홍희였다.

    당시 태권도는 국내에서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라 ITF는 창립 당시에는 9개국밖에 안될 정도였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기(國技)로 인정받았다.

    1972년 11월 30일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이 설립되었는데, 1973년 2월 6일 '국기원'으로 개명되었다.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이 출범되고 김운용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5.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
    1960년대 후반 대한태권도협회는 무술로서 태권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품새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품새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태극품새 8개, 유단자품새 9개를 만들었다. 품새는 카라테의 가타가 원류지만 차별화 노력의 결과 독창성을 갖게 되었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종우의 주도로 "태권도교본(품새편)"이 발간되었다.



    6. 태권도의 세계화



    1971년 1월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행정인사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끌여들여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 초대회장도 겸하면서



    국제감각과 본인의 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를 성장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다.



    태권도는 1980년 8월 태권도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이후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이 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올림픽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유기고가글-펌 참고ㅎㅏㅅㅏㅁ

    2024-07-19 04:32:28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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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의생존

    다~전쟁을위한 그시대의방어인것을
    그옛날 방위사업일뿐 그이상그이하 도아님 너무복잡하게 생각하지말고
    그냥수련하자 몸으로수련하자
    입닥고 손묶고 몸으로

    2024-07-18 18:56:43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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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

    항사내용이 중화권뛰우기
    좌파우파들의 우리나라의뛰우기는없나
    우파일본뛰우기 좌파중국뛰우기
    에혀 우리나라뛰우기는없나
    나라가참

    2024-07-18 12:55:58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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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도

    내용이 기대 됩니다.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24-07-16 08:22:23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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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도네

    삼각형을 이루는 정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밑에서 왼쪽인데 아마미시가 가운데가까움!

    2024-07-16 06:24:58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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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의욕망.탐욕

    한국, 중국, 일본, 그~시절 전쟁을위한
    도구일뿐이다 지금에무기개발 싸움기술
    일뿐!

    2024-07-16 06:20:15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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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자인성교육부터해야

    유수가라테태권도나오나 자본주의 단체주의 역사왜곡
    유가태만들어야겠다 18기보존회주해책홍보가?

    2024-07-15 14:39:47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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