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수남 대사범, 49년 만에 고국 돌아와 영면
발행일자 : 2024-06-28 18:40:09
[한혜진 / press@mookas.com]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태권도 세계화에 기여… 28일 국기원서 영결식
태권도 진흥과 세계화를 위해 평생을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를 넘나들었던 故 박수남 전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가 49년 만에 자신의 뿌리인 고국에 돌아와 영면에 들었다.
지난 14일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별세한 박수남 전 부총재가 한줌의 재로 고국에 돌아왔다. 지난 4월 지병이 악화되어 수술대에 올랐지만 병세가 나빠져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49년간 머물었던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한 성당에서 지난 20일 유럽태권도연맹장으로 장례식 후 가족 품에 안겨 28일 태권도 뿌리인 국기원에 돌아왔다. 그와 함께 태권도 세계화에 함께 했던 선후배들과 오랜 인연을 가진 국내 태권도인, 지인 등이 추모하며, 영결식이 진행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태권도 세계화에 동반자로 내조한 미망인 김경숙 여사와 그의 딸 등 유가족이 고인과 함께 방문했다.
국기원 이동섭 원장과 대한태권도협회 양진방 회장, 이승완 전 회장 등 태권도 원로, 영산대 총장 및 교수진 등 고인의 지인 등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배웅했다.
영결식은 세계어린이연맹(부총재 김한준)과 유네스코추진단(단장 최재춘), 강덕원(관장 홍상용) 등이 공동 주관으로 고인의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국기원 10단 추서, 추도사, 조사, 헌화 순으로 한 시간여 진행했다.
국기원 이동섭 원장은 미망인 김경숙 여사에게 태권도 세계화에 헌신한 고 박수남 부총재에게 10단 추서 단증을 전달했다.
앞서 세계태권도연맹(총재 조정원, WT)은 2001년 집행위원과 2005년 부총재로 품새 개발특별위원장과 전자호구개발 특별위원장 등 중책을 역임하면서 태권도 발전에 기여한 고인을 별세를 애도 하면서,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본부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했다.
1947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명문 경남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축산학과를 졸업한 그는 가족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권도에 빠져 지도자의 길에 나섰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국내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그는 1975년 독일로 이주해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10년간 맡아 독일을 세계 최강팀 반열에 올려 놨다.
1986년 오스트리아와 인연을 맺으면서 대표팀 감독을 역임할 뿐만 아니라 영국,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등 가라테와 ITF가 주를 이루는 태권도 불모지로 활동의 폭을 넓히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태권도 지도자와 제도권 행정가로 텃세가 심한 영국과 독일 두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태권도협회장을 맡아 행정가로 활약했다.
올해로 태권도 올림픽 채택 30주년이 된 1994 파리 IOC총회 현장에 김운용 전 총재와 함께 힘을 보태 역사적인 쾌거를 이뤄냈다.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예감한 그는 지난 4월 태권도인 박수남의 유서를 남겼다.
“이억만리 타국 땅 독일에 정착 할 때는 태권도는 생존의 수단으로 여겼지만 차츰 나이가 들면서 그 중요성을 느끼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독일 선수 양성을 통한 저변 확대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독일태권도협회장과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 유럽태권도연맹 종신 명예회장을 맡게 되었다. 모교인 건국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영산대에서 태권도학과 석좌교수 직책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과분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뚜렷한 업적도 손에 쥘만한 남는 게 없다는 생각 뿐이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60년 태권도 인생을 살며 보고, 듣고, 경험을 바탕으로 뭔가 후대에 남길 유산으로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태권도를 할 수 태권도와 전통의학이 융합된 ‘경략품세’ 집필에 힘썼다.
마지막까지 이 연구에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였는지 고인은 “길이 태권도계 태권도 후학들, 한국 한의학계가 지속 발전 시켜 주길 기대한다. 미완의 과업을 그대들에게 바친다”고 유지를 남겼다.
이동섭 국기원장은 추도사를 통해 “태권도 세계화를 위해 한 시대를 걸었던 박수남 대사범의 노고에 대해 지구촌 태권도인과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라며 “우리 모두는 박 사범님의 열정과 태권도에 대한 헌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고 전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양진방 회장은 “태권도 세계화는 물론 태권도 발전에 늘 한 발짝 앞선 제언과 실행에 옮긴 선구자로써 태권도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헌신하신 분이다.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영면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장례집행위원회 김한준 위원장은 “빨리 회복해 한국에 오겠다는 말씀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이런 일을 예견 하셨는지 이번에 출간될 경락품세 인사말에서 미완의 과업을 그대들에게 바친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이제 영원히 볼 수 없지만, 생전 힐링 건강산업과 어린이교육을 위한 태권도 과업을 우리가 완수 하겠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쉬시길 기원한다”고 조사를 낭독했다.
49년 만에 하늘의 별이 되어 고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故 박수남 부총재는 평생에 동지였던 태권도인들의 추모를 받으며, 이날 오후 자신이 태어난 경남 남해에 안장됐다.
박수남 사범은 누구?
박수남 사범은 1947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누님 권유로 부산에서 태권도를 처음 시작했다. 강덕원 계열의 태권도장이다. 타고난 신체조건이 좋아 태권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969년 최우수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영남권 최고 명문 경남고를 졸업하고 건국대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당시 건국대 축산대 학장은 지도관장을 역임한 윤쾌병 관장 이었다.
박수남 사범은 전공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산 태권도와 산을 좋아 했다. 1971년부터 5년간 서울 남산에 있는 외인아파트 근처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태권도 사범을 했다. 이때부터 외국 진출을 꿈꿨다.
1975년 12월 더 큰 꿈을 꾸고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독일로 떠났다. 당시 독일협회장이던 하인츠 막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계약 기간은 1년. 그러나 명색이 국가대표팀 감독이간 했지만, 협회 지원이 넉넉하지 않아 대표팀 감독에게 주어지는 월급이 200불(400마르크)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976년 5월 ‘제1회 유럽선수권대회’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바로 이때, 유럽태권도연맹이 창설되는 등 유럽태권도의 공식적인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이 대회다.
이 대회에서 독일대표팀은 전체 8개 체급에서 5개 체급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이 후 박 사범이 대표팀을 맡은 10년간 독일 팀은 격년으로 열리는 유럽선수권에서 5연속 종합우승의 위엄을 달성한다. 이에 독일연방공화국 공훈훈장(Verdienstkreuz am Bande)을 받았다.
1985년 독일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박 사범은 1986년부터 87년까지 2년 간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맡는다.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박 사범은 오스트리아 태권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공로로 결국 2006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박수남 기념 우표’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1988년에 다시 독일대표팀으로 복귀한 박 사범은 독일대표팀을 이끌고 서울올림픽에 참가했다. 1989년까지 독일팀을 맡은 후 박 사범은 영국태권도의 발전에도 일조 했다. 그런 인연으로 1990년에는 영국태권도협회(British Taekwondo Control Board) 회장으로 취임한다.
영국은 세계태권도연맹(WT)보다 국제태권도연맹(ITF) 수련 동호인이 더 많이 있는 곳이다. 처음 시작도 ITF 스타일로 시작했으며, WT가 인정하는 BTCB 외에도 많은 군소 단체가 많으다. 그 단체들의 대부분은 ITF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사범은 2010년까지 무보수 명예직으로서 영국태권도협회장을 맡으며 영국 내에서 WTF 스타일 태권도의 영향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박 사범이 유럽태권도계에 미친 영향은 독일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유럽태권도연맹 부회장을 맡았고, 2001년에는 WTF 집행위원에 선출된 후, 2005년에는 선출직 부총재에 당선되며 전 세계 태권도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박 사범의 주류 태권도계에서의 승승장구는 2009년 박 사범이 WTF 총재선거에서 출마하면서 조정원 총재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변하게 된다. 박 사범은 선거 과정에서 또 다른 후보였던 낫 인드라파나 IOC 위원을 지지하면서 후보를 사퇴했으나 선거의 승리는 조정원 총재에게 돌아갔다.
이후 박 사범은 WTF 주류에서 잠시 물러난 듯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박 사범의 활동이 덜 활발해진 것은 아니었다. 17년간 세계어린이태권도대회를 개회하면서 미래 태권도 주역이 될 어린이 태권도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박수남 사범이 생각하는 어린이태권도는 부모와 함께 격파를 하고, 품새를 하는 모델이다.
오랫동안 어린이태권도협회를 만들려고 생각을 정리 했고, 실제로 세계어린이태권도협회(CTU)를 만드는데 3년 정도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룩했다고 한다. 독일을 중심으로 CTU를 운영하면서 점차적으로 세계화시키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독일태권도협회장까지 맡은 상태에서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1996년부터 이어오던 국제어린이태권도대회, 박 사범을 기려 만들어진 국제 박스컵(International Park’s Cup)태권도대회 등 큰 행사는 물론이고, 그의 독일에서의 고향인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태권도장에도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박수남 사범의 태권도장은 슈투트가르트 시내에 있다. 건물 전체가 박 사범의 태권도 본부나 다름이 없다. 1층은 태권도장이고 3층은 사무실로 쓰인다. 특히 그가 1992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독일어로 발간되는 유일한 태권도전문잡지인 ‘태권도 악투엘(Taekwondo Aktuell)’의 사무실이 바로 이곳에 있다. 1층 태권도장은 슈투트가르트에서 가장 오래된 태권도장이자 가장 유명한 태권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사범은 이 태권도장을 자식 중 누군가가 이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 사범은 딸만 셋을 뒀다. 가장 태권도를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셋째가 태권도를 맡아서 실질적인 도장 관리를 하고 있다.
잠시 세계태권도계 주류에서 멀어져있는 듯 했던 박수남 사범이 2012년 10월 태권도계 주류에 화려하게 돌아왔다. 독일태권도협회장 선거에서 하인츠 그루버 당시 회장을 꺾고 당선된 것이다. “화려했던 독일 태권도의 영광을 되찾아오겠다.” 회장에 당선된 후 밝힌 박 사범의 각오다. 2012년 현재, 만 65세인 박수남 사범의 태권도계에서의 절정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 출처 : 태권도진흥재단 - 태권도 해외 진출 역사(유럽,아프리카지역) - 2012년 12월 기준.
[무카스미디어 = 한혜진 기자 ㅣ haeny@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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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 | |
태권도 경기인 출신의 태권도·무예 전문기자. 이집트 KOICA 국제협력요원으로 태권도 보급에 앞장 섰으며, 20여 년간 65개국 300개 도시 이상을 누비며 현장 중심의 심층 취재를 이어왔다.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대회 중계방송 캐스터, 팟캐스트 진행 등 태권도 콘텐츠를 다각화해 온 전문가로, 현재 무카스미디어 운영과 콘텐츠 제작 및 홍보 마케팅을 하는 (주)무카스플레이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국기원 선출직 이사(언론분야)와 대학 겸임교수로도 활동하며 태권도 산업과 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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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빕니다.
2024-06-29 18:22:14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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