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분석(2))1920년대 수박,김원보 선생,영상 캡쳐 설명
김원보 선생
(김원보 선생)조선 최초 수박 영상(1920년대),독립운동가 추정,기록유산,논문 등재,교보문고 출판예정
(내용은 수정, 보충 됩니다!)
1920년대 수박 영상이 일제강점기 이규설 감독의 현존 조선 최초 무성영화에서 발견됐다.
필자가 이 영화를 볼 이유가 없었다.
영화 제목이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로써 당시 일제가 조선인들을 계몽하고자 제작했다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김원보 선생(1897년 출생, 독립운동가 추정)의 격투모습을 본것은 무엇에 끌리듯이 영상을 클릭했기 때문이다.
부언은 차치하고
김원보 선생의 동작, 기술 및 몸 움직임 등은 필자가 해당 영상을 수차 반복해서 보고 영상을 캡쳐해가면서도 1920년대에 이렇게나 숙련 된 분이 계셨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된다.
필자 의견에 동조해주십사 하는것이 아니므로 각자 생각하되 영상을 대충 보고 무슨 막싸움이니? 개싸움이니? 하는것은 참으로 어렵게 이 싯점 우리들에게 발견 된 일제강점기 조선 전래 수박, 태권도의 원류로써 기예능적,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 기능자로 확인되는 김원보 선생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필자는 태권도 사범 출신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쇼토칸 영향을 받은 태권도가 역사 관련 고구려 운운 하는 작금에 우리 전통 수박과 중국 남부 복건성의 권법이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추가해서 일러둔다)
이규설 감독은 총 18분 영화에서 1분이나 격투에 분량을 할애했다.
즉, 비중 있는 장면이라는게다.
그런데?
아래에 확인 할 수 있지만 김원보 선생이 박순봉(이분은 1970년대까지도 활발한 영화계 참여를 하셨다.
동작은 시키는데로 하는것이라 숙련도는 볼 필요가 없다)
이 떼밀기를 해서 넘어졌다가 완력으로 밀면서 일어나고 그 다음 동작으로 상대방이 손으로 치려고 할때 그냥, 자신의 우측방향으로 멱살께를 잡아채 버린다.
그리고, 뒷걸음 치면서 거리를 확보하는데 이때, 영화 앵글(필자가 영화 언어에 문외한이므로 이해를 구함)에서 벗어난다.
박순봉도 마찬가지다.
이규설 감독이 일제 국책 사업의 일환인 계몽(교육)영화에서 이렇게 서툴게?
연출을 할 분이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이규설 감독은 민족영화라 일컫는 아리랑을 감독한 춘사 나운규와 조선 최초 설립된 영화사인 부산키네마주식회사에서부터 같이 동거동락을 했던 이다.
1926년 이규설 감독이 농중조를 감독 했고 같은 해 나운규가 또 아리랑을 감독했었다.
아리랑에는 이규설이 주인공의 아버지역으로도 출연했다.
이와 같은 이규설의 한국 영화 초기 위치를 보건데 영상에서 김원보와 박순봉 두사람이 영화 앵글을 벗어난것을 인지 하지 못했으리라 볼수가 없다.
1920년대 중후반에도 조선에 서양식 활극영화나 사무라이 영화 등이 보급됐던것 같다.
일본 가라테도가 조선에 들어 오기 전이나 서양식 복싱 또한 모르지 않았을 이규설 감독이 그와는 전혀 같지 않은 격투모습을 1분이나 되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김원보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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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김원보 선생 동작 분석 설명(2)
좌측: 박순봉 우측: 김원보
박이 오른손을 들어 내려친다.
김이 걸음걸이로 거리조절하면서 피하고 있다.
박은 헛친다.
위 사진에서 김의 자세 그중에서 손의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왼팔굽을 굽혀 자기 몸쪽으로 들고 있는데 오른손은 그렇지가 않다.
즉, 뒷손은 안면과 명치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복싱의 가드처럼 해 두고 앞손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이 앞손과 뒷손을 구분해서 쓰는것은 영상에서 여럿 확인할 수 있다.
박이 헛치고도 재차 왼팔을 들어 치려고 하니까
김이 자신의 좌측으로 왼발을 내디디며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회피하는 모습이다.
김원보 선생이 상대를 끝까지 보고 있다는것(상대 움직임 주시)은 분명하다.
김이 박순봉의 타격을 피했다.
단지 피하는것 뿐 아니라 그의 우측 어깨가 회피하는 순간 가드격으로 상대방 쪽을 향한체 들리고 오른 팔굽을 굽혀서 팔로 거들고 있다.
흡사, 서양식 복싱을 보는듯하다.
일제강점기 조선 삼대천재로 일컫던 최남선은 <조선상식풍속>에서 전통 수박= 작금의 복싱에 가깝다! 라고 했었다.
(박순봉은 전문 배우다.
시키는데로 동작을 하는 것이기에 형태적인것만 보면된다.
그러나 김원보의 경우 상당한 숙련도가 확인된다.
김원보는 (존칭 생략) 이 영화 이후 행적이 묘연해 졌다.
어느분 희극에 같은 이름이 한번 나타나긴 하지만 동일 인물 여부는 알수가 없다.
이규설 감독이 김원보를 격투장면 촬영을 위해서 전문 배우가 아닌 이를 섭외 했다고 여겨진다.
김원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기는데 김원보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황해도 출신 김원보와 나이대가 딱 들어 맞는 분으로 전문배우가 아닌 이로써 격투장면이 아닌 영상중 몇몇 곳에서도 얼핏 보여지는것은 1920년대 구한말, 힘 깨나 썼던 장사로도 생각된다.
(일제가 조선의 군대를 해산 시킨것이 1907년이다. 김원보 선생 나이를 1897년으로 볼때 그의 나이 10세때다.
조선 군대에서 무관들, 민간의 개성상인패, 황해도, 평안도 등 보부상, 주먹패들이 했었던 전통 수박을 직접 배우는것이 시기적, 지역적으로도 어렵지 않았을 거다)
사진 캡쳐가 안됐는데 김원보가 박의 왼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쳐내고 이어서 타격을 하기 위해 드는 모습이다.
같은 손으로 연이어서 막기에 이어서 공격 순이다.
김이 박의 뒤를 쳤다.
인체 목뒷편에는 급소가 있다.
두개골 바로 아래는 아문혈이라고 하는 혈이 있는데 쎄게치면 벙어리가 된다는 혈이다.
이외에도 뒷목부위를 강하게 얻어 맞게되면 눈 앞이 노래진다.
필자가 오래전에 경험한 바다.
김원보 선생이 상당한 숙련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적지가 않다.
그중에 한가지를 얘기하자면 김이 상대방 공격을 회피, 막거나 피한다음 되받아칠때 상대방의 측면에서 또는 뒤편에 위치한체로 한다는거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한번 더 확인을 해 보자!
김이 박을 가격한 다음, 양팔을 아래로 내려서 뒷걸음 치고 있다.
위치가 서로 정반대가 되고 있는데 이런 장면이 여러번 확인된다.
필자는 작고하신 어른들께 우리 전통 수박을 배우고 자료를 수십년간 채집하고 학술연구물과 단행본, 미국 아마존에서 영문판으로도 출판한 것이 적지 않은데
김원보의 동작과 움직임을 통해서 그동안 놎치고 있었던것을 짚게 되는 계기가 되고도 있다.
전통 수박에서 특이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게걸음을 하는 연유다.
김이 뒷걸음 치고 있다.
한걸음 더 뒷걸음 쳐서 거리를 벌리고 있다.
박이 쫏아 가면서 오른팔을 들어 치려고 한다.
김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좌측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서 거리조절 하는 모습이다.
박이 또 헛쳤다.
김원보가 타격 거리내에서 상대 공격을 피하고
오른 손으로 또 상대방 뒷목, 등부위를 가격하고 있다.
필자가 영상을 느리게(슬로우) 재생하면서까지 김원보의 오른팔이 완전히 들린 상태를 캡쳐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동작이 순간적이라 캡쳐가 안될 정도다.
몸에 익어 있지않은 경우 이렇게 하지를 못한다.
이번에도 박이 등을 김원보에게 보이고 있다.
김의 시선을 살펴보자!
박순봉의 뒤를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구식군대에서 병장기, 검이나 창 같은것을 들고 이 격투를 했다면 박은 김에게 여러번 죽을 운명인게다.
이와 같이 김원보가 보여주는 움직임 중에 상대방 측면이나 뒷편으로 회피, 가격 가격후 위치하는것은 특이한 것으로 일반적인게 아니다.
다시 반대 위치에서 서로 마주하고 섰다.
박은 자세를 낮추고 김도 무릎을 굽혀서 응하는 모습이다.
김의 왼손과 오른손을 살펴봐야 한다.
왼손은 복싱 가드식으로 안면과 명치께를 보호하면서 오른 손으로 대처한다(오른손이 앞손이다)
김이 무릎을 다소 펴면서 몸을 세우고 있다.
타격 거리 안이지만 여유를 보이는 모습이다.
다음 동작을 보자!
박이 왼팔을 들려고 할때 김이 응하는거다.
박쪽으로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김의 오른 다리가 박쪽으로 더 깊게 들어가고 있다.
이때 당연히 김의 몸통과 팔도 함께 박에게 근접해진다.
박이 김을 치려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오른팔을 들려할때
김이 근접해서 자신의 뒷손인 왼손으로 박의 왼팔을 붙잡아 당기는거다.
김이 박의 앞에 나와 있는 왼팔을 잡았다.
김이 박의 팔(손목부위)을 잡아서 사진상으로 볼때 김의 좌측으로 또 상방향으로 쳐드는것이 확인된다.
이어지는 사진에서 이유를 알수가 있다.
김이 박을 잡아끌어 (들었다가 내리며) 들때 박이 오른손 타격을 못하게 한 다음 이어지는 동작이다.
김이 잡은 팔을 위에서 아랫방향으로 내리고 있다.
박은 왼팔이 잡힌체 김의 좌측으로 끌어져 등을 보이고 대응을 못하고 있다.
김이 왼팔을 내리고 오른팔은 드는 순간이다.
김이 오른 손으로 박의 뒷통수(뒷목) 부위를 가격하고 있다.
가격 했다.
영상으로는 타격 내지 밀치는것으로도 보이는데
이 영상은 이규설 감독이 촬영한 1920년대 것으로 일제가 지원을 해서 제작 되었던 교육영화, 조선인들을 계몽할 목적(일본 입장에서)의 현존 조선 최초 무성영화에 포함되어 있는것으로 실제 치고 받는것은 아니다.
타격 기타 완화해서 하고 있다는거다.
필자 주: 무성영화도 영화다.
연출이 당연히 들어 간다.
그런데 그 연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격투 요소, 태권도면 태권도, 합기도면 합기도 동작과 숙련된 인물이 그 역을 맡아해야 한다는게다.
이규설 감독이 이러한 이유로 김원보 선생을 섭외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 이유는 김원보 선생은 박순봉과 달리 전문 배우가 아니란것이 이 이후 영화계에서 행적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왜정때 이규설 감독은 민족영화로 일컬어지는 아리랑을 감독했던 춘사 나운규 감독과 함께 조선 최초 영화사인 부산 소재 키네마주식회사에서부터 같이 동거동락을 하던 인물이다.
1926년 같은 회사에서 이규설은 농중조, 나운규는 아리랑을 연출했다.
김원보 선생이 전문 배우 였다면 아니, 배우로써 직업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이규설이나 나운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게다.
조선사회가 당시까지만 해도 유교적 분위기하에 영화배우를 딴따라라고도 하는 얘기들을 했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것 역시 사실인거다.
김원보는 이규설 감독의 현존 조선 최초 무성영화 한편에 그의 이름과 1920년대의 전통 수박을 생생하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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