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또 나왔다! 황해도 수박, 보부상들 많이 했어,개성의 수박과 명칭,지역,행위자,형태 일치해

2025-08-09 / 조회수 : 60 신고

평안도 박치기와 날파람 2편~ 짤린 부분 이어서 3편

출처는 다음과 같다.

'프로젝트 우리몸짓이야기'에 참여 중인 분이 올리셨다.

'우몸이'는 단체가 아니라 프로젝트 명이라고 한다.

https://yugakkwon.com/taekkyeon/367159

필자 주: 개인적으로 수박 외에도 함경도에서 했던 속쇄를 발굴하기도 했고

압록강을 수차 넘어 가서 조선족들이 이어가고 있는 전통 문화중 무예 관련 조사를 3회에 걸쳐서 진행 하기도 했다.

함경도 민간검무 관련 단행본도 출판했다.

씨름 전문가는 아니지만 연구자로써 일제강점기 민둥씨름을 정리하고도 있다.

경북 군위군을 직접 찾아가서 현장을 답사하기도 했고

군위 박시싸움이 재물보의 시박이라는 의견을 내어 일부 학계로부터 동의를 받고도 있다.


날파람도 근거 있는 우리 전통무예의 하나로써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나

아쉬운 것은 조사에서 조사대상자 실명이 공개되지 않고 사진이나, 동영상 그리고 실향민 1,2세대의 직접 동작 시연 등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거다.


증언은 실명 공개, 외 개인 인적사항들도 공개되어야 한다.


국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것은 필자 경험으로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관여 하시는 분들이 잘 살피시길 바래본다.


참고:수박 증언 나왔다!(1910년대) 강원도,평안도,부산 동래 지역과 행위자, 기술 등 증언(날파람 관련 인터뷰 인용)


https://mookas.com/discussion?postId=1702


필자가 몇일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볼때 전화가 왔다.

교육 문의이기도 했는데 수박 관련 언급된 글이 모 커뮤니티에 올라왔다해서

관심이 있던차 찾아 봤다.


우선, 날파람에 대해서 북한 노동신문에서 날파람 기술이라며 기사화 했던게 있다.

이 노동신문은 북한 전역에 공식적인 당기관지다.


거기에 적시되었던 날파람 동작,기술들과 이번에 평안도 실향민 1,2세대로부터 채집되었다는 것들간 차이가 적지않다.

어떻게 보면 북한 노동신문의 날파람과 이번에 공개된 날파람은 다르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연유가 있다.


북한 민속학자 계정희 교수가 1963년인가 4년쯤 북한측 개성에서 발굴했다는 택견이 있다.

그 논문에 택견 기술로 발표된것을 북한 노동신문에서 임의로 날파람이라 명칭을 바꿔 개제한거다.

그래서 노동신문의 날파람과 실향민분들이 증언한 날파람간 서로 다른것으로 밖에 안보이게된거다.


노동신문의 것-날파람은 계정희 교수가 발굴한 개성 지역에서 채집된것으로 날파람이 아니고 택견이다.

이 택견을 날파람으로 바꿔 놨으니 달라 보일 수 밖에 없었던거다.


위에서 봤듯이 평안도 지역에서 했던 날파람과 서울 일부 지역, 그리고 개성에서 한사람으로부터 채집되었던 택견은 

종목이 다른거란 얘기다.


날파람과 택견 종목이 같다면 적어도 노동신문에서 개성 지역에서 발굴한 택견을 명칭을 환치 해 놨다해도

근래 공개된 평안도 실향민분들 증언상 날파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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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고는 필자가 업무가 많아서 길게 또 친절하게 쓰지는 못하지만

날파람 관련 조사에서 채집되었다는 수박 관련 부분을 출처, 링크를 밝히고 인용하고자 한다.


서울은 광화문이 어디 있고, 그 뒷골목이나 근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커피숍 이름도 기억하고

우리 생활과 맞닿아 있지만


개성은 개성공단? 이나 초코파이 정도밖에는 젊은 사람들이 알지를 못한다.


고려사 얘기하면 그건 수백년전 일이라 현실성도 없다.


그렇다보니 개성이 어떻고

개성에서 했던 수박에 대해서'


당췌 알아 듣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멍때릴 뿐인거다.


평양이 고향이신 박 장로님(선생6 / 현 81세)


옛날 이북, 저기 황해도 그런 지역에 보부상들이 싸움을 잘했다 했거든, 손을 잘 쓴다고, 
 
◇기자: 전에 X목사님께 수박이라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그런거요? 
 
◇선생6: 나도 옛날에, 그러니까 우리 위세대지? 수박이라는게 있다. 뭐 이런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게 몇 가지 있어. 
하나는 지금 뭐 날파람이나 저기 택견, 씨름 이런 것들을 다 묶어서 수박이라 칸다. 
다 손으로 치고 받는 동작이 있으니, 우리가 그냥 묶어서 무술이라고 부르듯이 말이야. 
또 하나는 수박이라고 따로 있다. 손을 잘 쓴다고, 
내 생각에는 수박이라는 무술이 따로 있었다고 봐. 왜냐면 X장로님 있잖아. 

 

필자 주: 보통명사로써의 수박 그리고 고유적 수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황해도 지역을 특정하고 있는데 황해도는 개성과 맞닿은 곳이다.


해방후 개성이 미군정하에 남한측 소속이었다가 6.25전쟁 종전후 북한으로 넘어 갔고

북한측에서 개성 인근을 황해북도에 편입 시켜놨다.


우리는 행정안전부 산하 이북오도청에서 미수복 경기도 지역으로 실향민 기타 관리하고 있다.


◇기자: 아, 네. 사람들이 시라소니라고 착각하셨다고, 
 

필자 주: 위 밑줄 그은분은 부산으로 내려오신 평안도 실향민 1세대이신데 박치기를 잘해서 주변에서 혹시 시라소니(이성순 선 생) 아니냐?

했다는 분을 일컫는다.

◇선생6: 그래, 그 양반 살아 계실 때, 내가 듣기로는 황해도, 평안도 쪽에 수박이라는 걸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그래. 스스로도 보셨고, 그래서 내가 우찌 하는건데요? 물어보니, 
손바닥도 쓰고, 주먹도 쓰고, 씨름처럼 잡고 넘기고 그런다 카데. 
그런데 이 양반들이 가만보면 전신에 보부상들이라, 장돌뱅이라 이거지. 전국을 다니니까 도둑도 만나고 할거아이가, 그러니까 온종일 걷다가 잠깐 쉴 때 모여서 그걸 연습하고 그랬다는거야.  
전에 내가 왜 주머니 치기 얘기 안했나? 
 

필자 주: 위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장로님 얘기를 전하고 있다.

그분이 생전에 황해도(평안도는 편의상 제외한다) 쪽에 수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얘기했고

또, 직접 보기도 하셨다는거다.

그래서 궁금하니까 "어떻게 하는데요?"라고 물으니 


손바닥도 쓰고

주먹도 쓰고

씨름처럼 잡고 넘기고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황해도에서 수박을 했던 이들 행위자들이 전신에(전부) 보부상들이였다 한다.

그들간 연습도 하고 그러는것도 작고한 모장로님이 증언하셨다는거다.


고,송창렬옹이 생전에 수차 얘기해서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얘기하신바 있는데

송창렬옹 부친이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주물공장을 했었고 개성 남대문께 남문통이라는 시장에 거주하던 천일룡이란 이가 일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 와서 공장에 숨어 살면서 일했었다 했다.


그리고 송옹 얘기로는 천서방(송옹은 천일룡을 이리 부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보부상이었다 했다.


개성 상인 건드리면 죽는다!는 말이 일제강점기까지도 있었다.


괸히 단결이 잘되서 그러니? 가 아니고

예전 보부상패들은 군대나 다름 없었다.


송도속지-18002년 판본도 있는데

당시 송도-개성의 무과시험 합격자 숫자가 25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무예제보번역속 집이나 정조때 무예도보통지가 발간된 이후로써


개성에 무예도보통지 권법, 검술 등을 알았던 이들이 수백명이나 살았단 얘기다.


1940년까지 개성에서 남대문을 위아래로 나눠서 남부패와 북부패가 편을 갈라서 개성 훈련원터와 야다리까지 6백미터 거리를 두고 석전을 했다는 증언이 개성 토박이 현 재 90세 분의 증언도 있다.


참가 인원이 총 100명정도 될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정도면 서울이나 평양에서 일찍 끊어진 진짜 석전을 개성에서는 해방즈음까지도 했다는 얘기다.


송도속지에서 확인되듯 개성의 무관들 수백명이 1907년 일제에 의해서 군대가 해산된 후 무엇을 하고들 살았을까?

일부는 집안 재산 물려 받아서 편하게 살았을 수 있지만 또 일부는 무과시험 합격자로써 개성 시내 기생집이나 요리집을 돌아 다니며 활량짓을

하기도 했을터

또는 거꾸로 기둥서방이나 경호를 자처했을 수도 있다.

목구멍이 포도 청이었을테니 말이다.


또, 일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했을 수도 있겠다.

이 경우는 3세대 정도 시기에,,,


또는 개성의 보부상 상단에 들어 가서 보부상을 했을수도 있다.

논 밭떼기가 없이 맨몸으로 살아가야 했을 경우에,,,


1940년까지도 개성에서 행해졌던 개성의 석전에 남부패, 북부패가 참가 했는데 이들중 개성 상인, 보부상들이 없었을 것이다 보다는 보부상들이 석전에  참여했다가 보다 설득력이 있을게다.


아쉬운 것은 개성 석전을 증언하신 개성 토박이분이 당시 어릴때라 그보다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증언이 되지 않은거다.


몽둥이!

육박전!에 수박을 했을터


정리해서, 황해도에 수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죄다 보부상들이었다는 필자와 아무런 관계 없는 제3자의 증언과

송창렬옹이 증언했던 개성 남문통 보부상 집안 천일룡 그리고 


오진환옹-개성시 남산동 출생, 1919~2002 얘기로 "보부상들이 많이 했을거야!" 등 

황해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던 개성 상인패들에서도 수박이 행해졌다는 얘기다.


필자는 오래전 송옹과 오진환옹 얘기를 듣고 개성의 보부상을 추적하려했던 적이 있다.

그러다 서울 교보문고에서 책 한권 사고는 중단했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지,, 보부상들이 수박 했다는 증명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증언자평안도 실향민(조사때 81세)송창렬오진환
명칭수박수박수박
지역황해도(평안도는 편의상 제외)

현재 북한측 황해도 개성

6.25 종전 전까지는 경기도에 속했다.

개성
행위층보부상들보부상보부상 언급
형태

손바닥,주먹으로 치고

씨름처럼 잡고 넘어뜨려

같다같다


위 도표로 알수있듯 증언자들간 명칭, 지역, 행위층, 형태들이 모두 일치한다.


◇기자: 네, 말씀하셨습니다. 씨름의 훈련법일 것 같다.라고 하신거요. 
 
◇선생6: 그래, 그런데 X장로님은 지금 생각해보니, 왔다 갔다 하신 것 같해. 본인이 그걸 보시고 수박하는 사람들도 하고, 씨름 하는 사람들도 하는 걸 보신건데, 세월이 흘러서 보니 씨름하는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 나는 그게 아마 수박하는 사람들이 하는 게 맞겠다. 싶은거지. 


필자 주:위 얘기는 날파람에서 하는 연습법을 말하는데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인지 여부는 교차확인이 된바 없다.


◇선생6: 지금와서 맞다 아니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나도 오래 전에 듣기로 박치기나 날파람하고는 거리가 멀고, 보부상들이 모여서 땅에다 줄 끄어놓고 하는거라고 들었거든. 
 

필자 주:이도 역시 수박과 교차확인 된바 없다.

또, 보부상들이 했다고 해서 복수의 정보가 없는 상태에 수박 연습법이라 하는것은 맞지 않을터

(위 얘기하신 분이 그랬다는게 아님, 유의)

◇기자: 네, 그래서 그냥 제 생각에 보부상들이 즐겨 하던 무술이 수박이니까, 혹시 장단 치기도 주머니 치기처럼 수박하는 사람들이 하던 것이 아닐까, 손을 쓰는 흐름도 비슷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자 주: 조사자 의견이다.


◇기자: 네, 맞습니다. 
참, 그분은 당시에 서양문물을 잘 흡수하신 신지식인이셨네요. 혹시 지금 수박하시는 분이나 비슷한 수련을 하시는 분 알고 계십니까? 
 
◇선생6: 개인적으로 아는 양반은 없고, 예전에, 가물가물하는데, 자갈치 시장인가, 장사하는 사람이라 했는가, 아무튼 우리 처럼 이북에서 온 양반인데, 맨손 무술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 
나는 모르고, X장로님이 살아 계실 때 들은거라. 
그 양반이 X장로님을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못봤던 것 같해. 

필자 주: 조사자가 수박하는 분 아시냐 질문에

증언자가 언급한 부산 자갈치 시장, 맨손무술 하는 사람을 현싯점에서 수박을 했던 것으로 특정하는것은 정보부족으로 어렵다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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