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증언 나왔다!(1910년대) 강원도,평안도,부산 동래 지역과 행위자, 기술 등 증언(날파람 관련 인터뷰 인용)
필자 주: 원로 목사님으로 부산에 거주하시는 분이 증언한 수박은 1910년대 중(늦게 잡아)후반에서 1920년초까지로 여겨진다.
이분 할아버지가 1888년생이라시는데 서울 YMCA에서 복싱(권투)를 배운 시기를 10대 중후반에서 20대초 정도로 볼때
그리고, 이 원로 목사님의 아버지로부터 수박 얘기를 들었다고 한 교차 증언이 나왔는데
어릴때 아버지 즉, 1888년생의 분을 지칭함. 과 같이 수박을 본 적이 있다는 증언이다.
1888년생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복싱을 배울때 강원도에서 수박하는 사람이 복싱을 배우러 와서 친하게 지냈다는것은 시기적으로 1910년대 중후반, 1920년대 초로 생각할때 이분이 혼인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수박을 같이 본 것은 1930년초~중반이 된다.
그때까지도 강원도 출신 수박하는 이 등과 교류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황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황기는 1935년 만주에서 중국무술을 처음 배운것으로 정보가 확인되는데 이후 1960년에 수박도를 주장했었다.
원로 목사님의 아버지가 그분 부친(1888년생)과 같이 수박을 본적이 있었고(후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면 죽는다! 등 얘기를 배석한 분에게 증언) 그 시기는 늦게 잡아도 1930년 중반으로, 이때는 황기가 만주에서 중국무술을 배우고 있을때였다.
황기가 당수도, 화수도를 수박도로 개명을 하고 보급을 시작한것은 1960년 이후이므로 황기의 수박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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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관련 그 당시를 살았던 분과 2세대의 증언이 추가로 나왔다.
아래는 평안도에서 했던 날파람에 대해서 모 인사가 관련자들을 찾아서 대담한것중 일부로써 수박 관련 내용이다.
인터뷰 내용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고 링크를 첨부한다.
출처는 우리몸짓 이야기,라는 단체라고 한다.
명칭- 수박
수박은 고유명사로 다시금 확인되었다.
기존에 서울 권태훈옹, 개성 송창렬, 오진환, 함경남도 단천 김학천, 김학현 등
지역- 강원도,평안도,부산 동래 추가
기존의 서울, 경기도 개성(일제강점기, 지금은 북한측 황해도에 속한다), 함경남도 단천
*2002년 국민생활체육 서울시전통무예대회 후 서울 금천구 소재 주최측 사무실에서 송창렬과 오진환을 모시고 대담한 영상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송창렬은 함경남도 북청에서도 수박을 했다고 했지만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대담자는 태권도 7단 국제사범, 미 아틀란타신학대학 범기철 교수였다.
(증언)함경도 북청 수박관련,범기철 ,송창렬,오진환 대담 2002년 중
1919년생 오진환은 날파람이라는 얘기를 한적이 없다.
1932년생 송창렬도 날파람을 모른다 했고
함경남도 단천이 원적인 김학현 선생도 날파람이 수박 같은 체기(술)이란건 알지 못했는데 용어는 (몸이) 빠르다!라는 뜻이라고 2003년 중국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필자에게 얘기하신바 있다.
송창렬이 증언한 함경남도 북청은 조선시대 남병영이 주둔했었고 인근의 단천에는 봉대가 있었다.
단천의 이동보(군사시설)나 여진성 등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송창렬이 북청에서 했던 씨름(샅바 없이 하기에 민둥씨름이라 지칭함)이나 권태훈, 본문의 인터뷰 중 주먹(치기)나 1930년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던 함경도 지역의 대표적인 경기, 뭉구리를 수박과 혼동한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송창렬 세대까지 각 지역의 체기들 상호간에 공유 되었던 부분들이 있었을것으로 이해된다.
또는, 북한 민속학자 홍기무 교수가 1964년 "조선의 민속놀이(북한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수박은 양편이 서로 떨어져서 주먹질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이라 언급 한것과
교차되는 증언으로 함경도 주먹치기(권태훈), 함경도 주먹(평안도 실향민)의 주먹치기,주먹을 수박의 별칭으로 이해할때는 함경남도 북청에서도 수박을 했다는 송창렬 증언에 대한 근거가 될수도 있다.
=송창렬의 함경남도 북청 수박 증언에 대해서 북한 홍기무 교수(수박은 주먹질), 권태훈(함경도 주먹치기), 평안도 실향민(함경도 주먹) 3가지 정보가 괘를 같이하고 있다.
본문 인터뷰로 수박을 했던 지역에 강원도, 평안도, 부산이 추가됐다.
[인터뷰 내용중 일부 인용]
필자 주: 편의상 2차 인터뷰를 앞에 소개한다.
인터뷰 2차
인터뷰에 도움을 주신 두 분을 간력하게 소개한다.
(선생4 / 현 74세) 이 선생님이라 불리는 선생4는 평안도가 고향이신 부친에게 어릴 적 날파람을 배웠고, 10대 후반부터는 복싱을 하시면서 기술 연구를 꾸준히 하셨다.
이 선생님의 부친은 '뛰어 받기'와 '주먹 박기'로 유명하셨는데, 특히 '뛰어 받기'는 머리보다 어깨를 많이 쓰셨다고 한다.
(선생5 / 현 75세) 선생5는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이시다. 조부(1888년~1968년)가 날파람으로 유명하셨는데, 평양 대부흥으로 복음을 접하기 전까지 날파람 고수들을 만나기 위해 편싸움판을 자주 찾아다니셨다.
1960년도 무렵 날파람을 다시 수련하려 한 실향민(평안도 출신)들이 꼭 만나고 싶어 했던 분이었다.
날파람에 관련해서 가장 많이 알고 계신 분이기도 했다.
필자 주: 선생5 / 현 75세(작년에 인터뷰 기사가 공개되었음을 감안할때 현 76~ 정도의 연세시다) 원로 목사님 증언이다.
◇선생5: 우리 할아버님이 1888년생이신데,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요.
이게 예수 믿기 전인데, 당시에 형님을 따라서 서울을 가셨다가 거기 YMCA를 가서 권투하고 기계체조, 뭐 그런 걸 보신 거라,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해요.
기독교청년회 ( YMCA , Y oung M en's C hristian A ssociation)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 결성한 기독교 민간단체이다. 세계 120개국, 1만여 개의 조직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개화기 때인 1903년 10월에 창립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이 한국 YMCA의 시작이라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EC%B2%AD%EB%85%84%ED%9A%8C
너무 신선했겠죠. 주먹 쓰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일부러 며칠 머무르면서 조금 배우셨어요. 그리고 다시 고향 왔다가 또 내려가서 배우고, 그래서 그때 배우신 권투 기법을 고향에서, 이제 같은 동네에서 날파람 하던 친구들하고 교류를 하셨거든요.
벌써 이때부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싸움꾼 눈에는 싸움 기술들만 보인 거지.
◇기자: 아까 말씀드린 건데, 왜 X장로님이 고향에서 택견을 본 적이 없다. 그러셨잖아요.
목사님 조부께서는 어떻게 택견을 알고 계셨습니까?
◇선생5: 알고 계셨죠. 택견 하는 사람들 하고 교류도 하셨고, 당시에 날파람에 박치기가 유명하니까, 박치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다른 분야에 있는 분들이 자주 찾아오셨나 봐요.
택견, 그리고 저기 함경도에서 몽둥이, 그 뭐죠?
◇선생4: 육모 방망이요?
◇선생5: 네, 네 그거 육모 방망이 쓰는 사람들, 또 씨름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죠.
◇기자: 박치기를 배우러 오신거네요. 그 외 편싸움 기법 같은 것도 배우시고 하셨겠죠.
◇선생5: 박치기도 배우고, 서로 기술 교류도 하고 그랬던 것 같해요.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과거에 서양 운동이 흘러들어가기 전만 해도 지역별 싸움 스타일이 명확했나 보더라구요.
뭐 평안도는 박치기, 함경도는 주먹이나 몽둥이, 아래 당시 경성? 지금 서울, 경기도 뭐 이쪽은 발차기, 경상도나 전라도는 팔 힘이 좋아서 씨름꾼이 많았다 하고,
필자 주: 내용중 평안도는 박치기, 함경도는 주먹, 아래 당시 경성? 지금 서울, 경기도 뭐 이쪽은 발차기
부분은 1900년 출생한 권태훈옹과 일치하고 있다.
권태훈옹은 평양 박치기, 날파람 그리고 함경도 주먹치기라고 했고 서울 택견(발차기)를 일제강점기때까지 했다고 했다.
선생 5(원로 목사)의 경기도,도 발차기를 했다는건 1964년경 북한 민속학자 계정희 교수가 북한 (경기도)개성에서 발굴한 택견이 있다.
선생5(원로 목사)는 전라도 사람들이 팔힘이 좋아서 씨름을 많이 했다 했는데
권태훈옹은 전라도에 깨물기(입으로 물기,코나 귀를 물어 뜯는것)를 했다고 한것과 인터뷰중 전라도 관련해서 "함경도도 전라도처럼 '코부랑깽'이라고 뛰어 들어가서 코나 귀를 물어뜯는 기술이 있는데 이게 무서워, 순식간이야!" 라는 것으로 권태훈의 증언과도 일치하고 있다.
◇선생4: 옛날에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나, 장로님한테 들었나, 그 강원도에 뭐 유명하다고, 뭐죠? 목사님이 얘기하셨던 것 같은데,
◇선생5: 우리 아버지? 강원도에, 아, 그거 수박,
◇기자: 수박이요? 그건 맨손 무술이라고 여러 문헌에 나오는 것 같던데요.
◇선생5: 그 수박이라는 게, 지역별로 있었는데, 그게 평안도, 강원도, 지금 저기 부산 동래, 거기가 유명했다고,
◇선생4: 여기 목사님 아버님이신 XXX목사님이 어릴 적에 아버지랑 본 적이 있다고 얘기를 해주셔서 기억이 나거든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면 죽는다고,
필자 주: 수박에 대해서 선생4는 선생5의 부친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며 선생5는 직접 본인 할아버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선생5: 이제 기억이 나는데, 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냐면, 이제 우리 조부께서 아까 말했죠. 서울 YMCA가서 권투를 배우는데, 그때 같이 배우던 강원도 사람이 수박을 하는 사람인데, 배우러 온거에요.
수박이라는 게 손을 많이 쓰나 봐요. 그러니까 권투가 궁금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우리 큰 할아버지죠? 형님이시니까, 공부 때문에 서울을 가시는데, 그때마다 며칠 식 있다고 오는데, 조부가 따라다니신 거지. 형님은 공부하고, 당신은 이제 거기 가서 권투 배우고, 그러다 알게 된 양반인데, 이 양반이 하루는 자기 벗이라고 또 소개를 해줘서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평안도 사람이다 말이지.
그래서 그 같은 동향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강원도 사람처럼 수박 비슷한 걸 하다라는거죠. 당시에는 믿음이 없을 때니까, 밤새 셋이서 술을 마시고 그랬데요.
필자 주: 선생5의 증언으로 본인 조부(할아버지 1888년~1968년)과 강원도 출신으로 수박을 한 이, 그리고 이 분의 친구인 평안도 출신 수박하는 이에 대한 것이다.
◇기자: 수박은 어떤 형태였을까요? 손을 많이 쓴다고 들어서,
◇선생5: 날파람에 '씌우기', '날 씌우기' 처럼 손바닥을 쓰는데, 단련을 많이 했는지, 손바닥에 굳은 살이 억수로 많았다고 하데요.
박치기도 있기는 한데 날파람 처럼 많지는 않고, 조부 생각에는 그냥 평안도에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날파람인가, 하셨지.
필자 주: 수박의 형태 관련 기술(동작)부분을 부분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날파람에 씌우기, 날 씌우기는 손바닥,을 쓰는 기술인데 기자가 수박은 손을 많이 쓴다고 들어서?,, 라고 질문하니 날파람 날 씌우기처럼 손바닥,을 쓴다, 박치기도 수박에서 했다고 한다.
필자 주: 기술적으로 손바닥으로 치는것을 주로 했었던 권태훈,송창렬,오진환,김학천 등과 다르지 않다.
송창렬은 날 씌우기,라는 용어를 얘기한적은 없지만 비슷한것으로 칼 씌우기,를 했었다.
부산 동래(구)는 송창렬이 6.25 종전후 부산으로 내려와서 작고하기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필자도 부산 동래구에서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부산에 수박,이 유명한것은 알지 못한다.
본문 인터뷰에서 동래 야와라,라는 것이 있었다는데 이것은 일본 아이기도처럼 관절기를 쓴다고 해서 수박과는 차이가 크다.
송창렬이 1950년 이후 부산 동래에 거주하며 국제시장(행정구역으로는 중구에 속한다)께 용두산공원이나 동래의 야산 등에서 수련을 하셨는데 그걸 본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 봤을수는 있겠다 싶다.
"수박"이라고 하니까 그 얘기가 전언 된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송창렬 외 부산 동래에 수박하는 사람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 없다.
[1차 인터뷰]
이번 연구와 자료 수집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다. 그분들 중 세 분의 대화 내용을 정리했다.
먼저 두 분(선생1/현 93세, 선생2/현 91세)은 일제 강점기 해방 막바지부터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북청년단에서 잠시 활동한 분들이다.
이 두 분은 어릴 적 고향(평안도)에서 평안도 박치기 또는 날파람을 수련했고, 청년단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으셨다.
그리고 또 한 분(선생3/현 70세)은 유명한 날파람꾼으로 알려진 부친에게 젊은 시절 여러 가지 기술을 전수받으셨고, 한때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과 본인 개인적으로 수련한 유도 기술로 주먹 세계에 몸을 담으신 적이 있었다.
다른 분들도 더 계시지만, 대화 내용을 공개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은 이 세 분이 전부다.
그마저도 이 세 분은 이름을 밝히길 원하지 않으셨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대화 속에 들어있다.
중략
당시에 날파람이나 박치기 기술들 찾는 무술 단체가 많았거든.
아 거기도 있었다. 수박이라고 전통 무술 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기자: 수박은 옛날 우리 역사에 나오는 거 아닙니까? 전통 무예 얘기하다보면 꼭 나오잖아요.
◇선생3: 아버지가 어디서 우연히 보셨나봐, 이름이 수박인지는 모르겠는데 옛날에 고향에서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다 하시더라고, 그래서 고향 사람인가 싶어서 한번 얘기나 해보까 하셨는데, 연세도 많고, 몸도 안 좋아지시고 하니까, 뭐 그렇게 지나갔지.
◇선생3: 그러다가, 나도 사업도 하고 가족도 건사해야 하고 하다 보니, 포기했지.
필자 주: 이 증언을 하시는 분들은 개신교 목사, 장로들로 평안도에서 남하해서 부산에 거주했거나 그 2세대이다.
◇선생3: 아버지가 어디서 우연히 보셨나봐, 이름이 수박인지는 모르겠는데 옛날에 고향에서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다 하시더라고, 그래서 고향 사람인가 싶어서 한번 얘기나 해보까 하셨는데, 연세도 많고, 몸도 안 좋아지시고 하니까, 뭐 그렇게 지나갔지
= 이 부분이 송창렬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부산에 송창렬 외 수박을 했다고 알려진 이는 없다.
필자 주: 고,송창렬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고 일본 오사카 그리고 개성, 다시 서울로 이주했었다.
1950년 6.25참전을 했고 전쟁이 끝나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국제시장 등지에서 소위 주먹을 쓰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고 했던때다.
그런 시대적 상황으로 이해할수도 있다.
송창렬이 국제시장, 남포동, 자갈치 등에서 불량배(라고 하자)들과 어울리던 때가 1950년 종전 이후로써 부산 해양대학교를 나와 외항선 선장을 하던 송창렬의 형이 공부를 해야한다며 억지로 단국대학교에 입학 시켜 서울에서 몇년 생활하고 부산시 동래구에서 작고하기까지 거주했었다.
송창렬이 1950년대에 수련하던 장소가 부산 국제시장 근처 용두산공원 내에 있다.
일찍이 평안도, 특히 평양에서 대부흥회가 있었고 익히 알려진 이기풍 목사도 날파람 대장으로 난봉꾼이었다가 신앙생활을 하게되었다 한다.
평양대부흥(平壤大復興, 영어: Pyongyang Revival, Great Pyongyang Revival)이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을 말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F%89%EC%96%91%EB%8C%80%EB%B6%80%ED%9D%A5
조선시대 초대 선교사 이기풍 목사
조선시대 초대 선교사 이기풍 선생(1868년~ 평양)은 구한말의 평양거리를 주름잡던 소문난 건달(불량배)이었다.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풍비박산을 만들기 일수였다. 어느 날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활개를 치며 평양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말 타고 가던 높은 분(평양좌수)과 마주치게 되는데, 아니꼽다고 다리깨를 잡아채서 낙마시킨 죄로 목에다 칼을 쓰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또 있다. 모펫이란 분이 선교하는데, 친구들 함께 문을 부수고 난입해서 돌로 쳐 턱을 부스러지게 하는 등 한때 평양 건달로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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