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무술의 환상
중국은 일본과 대치하던 1927년 중국 국민당이 난징(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면서부터 최초로 전통무술을 정부 차원에서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10여 년 간 중국무술은 체육과목에 포함되어 군대무술, 민간무술, 학교무술이 각기 발달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역사를 통틀어 정부 차원에서 무술을 장려한 사례이다.
중국정부는 1927년 난징에 중앙국술관(中央國術館)을 설치하고 이듬해 전국 규모의 무술경기를 개최한다. 1929년 제2회 대회에서는 경기방법, 평가방법, 순위평가, 경기장 설치 등과 같이 경기의 규범화를 가져 왔다. 중앙국술관 이외에도 각지에 국술관이 설립되어 1931년 23개 지역에 300여 개의 지역 국술관이 설치되었다. 중국무술은 우슈(武術)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무술단이 국제무대에 시범을 보여 스포츠화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중국 무술의 진흥은 이 무렵의 약 10여 년 후 다시 암흑기로 들어갔다.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독립군들에게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만주지역에서 중국 관내로 무대를 옮기게 된 한국 독립군이 국술의 진흥을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구(金九)는 1933년 봄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최고지도자 장개석(蔣介石)과 만나 군사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중국육군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개설됐고,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간 근대적인 군사 지식과 훈련으로 단련된 130여명의 무관을 길러냈다. 이 때 중국의 진과부, 진립부 형제의 지원하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었고, 이 형제는 이런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장개석은 1953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이들을 포함하여 임시정부를 도와준 중국의 인사 31명이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지정될 만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양국의 협조체제는 긴밀하였다. 1934년 12월 결성된 한국특무대독립군의 본부는 한인 학생훈련소를 운영했으며,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 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을 지키는 데 자신을 바쳤다. 한편 조선독립군의 의열단을 만든 주인공인 김원봉(金元鳳)은 1932년 가을부터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남경 근교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는 의열단의 대중투쟁 노선을 선도할 중견 군사 및 정치 간부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던 가운데 한중 국제연대를 배경으로 설립된 이들 학교의 존재는 이동을 하던 임시정부의 취약한 지도력을 보완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광복군의 인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한편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이 탄생한 것은 1940년 9월 17일의 일이다.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중경)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공식명칭은 한국광복군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에 군사조직법을 제정하였고, 1931년에는 뤄양(낙양)군관학교, 난징(남경)군관학교 등 중국군 사관학교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한국의 독립군들은 이처럼 중국의 사관학교에서 실전에 필요한 정규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과정에 격투기 종목이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한 간부학교의 경우 교육내용은 정치, 군사, 실습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은 파괴, 기습, 유격전 등 특무공작에 필요한 경우가 주를 이뤘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취지를 천명하였다. 총사령관으로는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훈련처장에 송호, 군무처장에 유진동 등이 임명되었고, 창설 1년 만에 3백 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는 엘리트 군사 양성에 긴밀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민간인들도 중국무술의 일부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무덕관 창립자인 황기는 1935년 남만주철도국에 입사를 하여 그 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하는 바, 이 국술이 바로 장개석에 의하여 1927년부터 10여년간 중국에서 장려되던 무술로 보인다.
이 시기에 중국무술이 진흥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전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을지는 의문이 많다. 중국무술에는 워낙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 뿐만 아니라 사실과 다른 과장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이나 중국영화에 보면 공식처럼 등장하는 메뉴가 소림사, 그리고 소림의 비전(秘傳)이라는 ‘역근경’ 또는 ‘달마역근경’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선종(禪宗)과 더불어 소림무술의 기원을 달마대사에서 찾는데, 소림사는 원래부터 한국적인 개념의 무술과는 관련이 없는 사찰이었다. ‘역근경’은 승려의 동작을 그림으로 설명하고는 있으나 그 원리나 추구하는 내용은 체조에 가까운 도인술(導引術)의 일종이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저명한 무술사가이자 권법가인 당호(1897-1959)는 중국무술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해 소림사에 들러 조사를 했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소림사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호신용 봉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노던 아이와 대학교 교수인 사학자 찰스 홀콤(Charles Holcombe)은 1988년에 발표한 논문 ‘전투의 현장: 중국무술 비평’에서 “달마대사의 전설을 무술과 연결시키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1644-1912) 시대의 일이다. 628년 운운하는 ‘역근경’이라는 책이 달마의 어록을 싣고 있다는 주장으로 연결을 지으려 하고 있으나 학자들은 이 책이 1800년 이전에 나왔다는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청나라 말기에 책의 가치를 올려보려는 의도로 달마에 기원을 두려 한 위작이라고 보인다. 당시 달마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게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밝힌 바 있다. 조셉 니담(Joseph Needham, 1900–1995)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저서에서 중국의 권법은 도인술의 한 분야로 기원되었을 것이라 결론 내리고 있다.
소림사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는 태극권(太極拳)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수련하는 권법이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요가나 체조처럼 남녀노소가 아침마다 밖에 나와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즐긴다. 중국 하남성의 진왕정(1600-1680)이라는 장수가 명나라 말에 창시한 권법이라는 설이 있고, 송당의 어간에 살았다는 장삼봉이 창시했다는 설도 있지만, 조셉 니담은 일종의 체조와 호신술과 무용이 섞인 형태로 규정하고, 그 기원은 화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았다. 화타(?-208)는 무술가가 아니라 중국 한나라 말기의 명의로 후세인들에 의해 외과의사의 태두로 존경받아 왔다. 그는 호랑이•사슴•곰•원숭이•새 등의 동작을 모방하여 오금희(五禽戱)라는 의료보건체조와 양생학설(養生學說)을 만든 사람이므로, 중국무술은 처음부터 상대방과 싸우는 격투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건강을 위한 체조의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태극권이 장삼봉과 관련되기 시작한 것은 1867년 이후에 불과하다며, 20세기 초에 나타난 태극권의 제창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했다.
근래와 와서 중국무술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는 소위 쿵푸(功夫)라는 말도 100년 전 만하더라도 종교적인 색채가 깃든 체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인 존 더전(John Dudgeon)이 1895년에 쓴 ‘도가의 의료체조 쿵푸’라는 논문에 의하면, 쿵푸라는 단어는 본래 일하는 사람(工夫)이란 의미로 치료체조나 체조의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쿵푸는 크게 몸의 자세와 호흡법으로 이루어지며, 기본적인 몸의 자세는 선 자세, 앉은 자세, 누운 자세라는 세 가지라며 쿵푸는 결국 종교적 체조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중국무술은 시합을 부정해 싸우지 않기 때문에 원래부터 실전성이 없었고, 실전성을 상실한 대신에 건강을 위한 수단이나 공연의 형태로 나타났다. 정신세계를 가미한 수양의 수단이 된 것이다. 최근에 유행하다 중국정부에 의해서 제재당하고 있는 파륜궁도 그 한 예가 된다.
1560년 명나라 장군 척계광은 ‘기효신서’에서 중국의 맨손무예를 화법(花法)무예라고 칭하며 실전에는 아무 쓸모없는 체조술이라고 단정 지었다. 중국무술은 춘추전국 이후 봉건제도의 발흥과 함께 체조화되기 시작했고, 명대에 와서는 실전성을 상실한 혼자만의 체조이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의 형태로 변모하였다. 척계광은 기득예 필시적(旣得藝 必試敵)이라 하면서 무술을 익히거든 반드시 적에게 시험해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시합을 중시하였고, 중국 전역에 걸쳐 관념적인 1인 연습형인 화법을 부정하였다. 이처럼 중국무술은 혼자서 하는 소위 투로(套路)라고 하는 것으로, 혼자서 끊임없이 새로 배우며 펼치는 형과 상대 연습을 위한 약속겨루기 형이 있다. 자유겨루기라는 의미의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중국무술은 주로 혼자서 투로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형태인 것이다.
무술은 곧 격투기라고 생각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의 무술은 건강, 호신, 심미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 운동이고 겨루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무술의 표현을 품새, 겨루기, 격파로 나눌 때, 한국과 일본의 경우 단연 겨루기를 우선시하고, 품새와 격파가 보조적인 반면, 중국에는 품새를 우선시하고 겨루기는 보조적이다. 중국에서 무술 챔피언이라고 하면 대부분 표연(表演), 즉 품새 시합의 우승자를 가리킨다. 현재 중국의 표연대회는 심미(審美)에 많은 점수가 부여되며, 격투기와는 상관이 없다. 중국무술이 이렇게 된 것은 과거 4대의 왕조에 걸쳐 취해졌던 금무정책(禁武政策)이 민간무술의 발전을 저해하였고 무술가가 아니라 권력자에게 유익한 형태의 무술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농민반란을 억제하고 이민족의 지배와 위정자의 안전을 위해, 혹은 문화혁명과 같은 격변으로 무술은 금지되었다. 무술을 하면 사형에 처해지거나 투옥 당했고, 일부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실전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은 금지되었다. 대표적인 중국무술인 태극권(太極拳)은 주먹 권(拳)을 사용하면서도 결코 상대방을 향해 공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청나라에는 무술가들이 은신처로서 극단에 참가하였다. 극단의 무타(武打), 즉 격투연기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의 이소룡(1940-1973), 성룡(1954년생), 홍금보(1952년생) 같은 무술영화의 스타들이 경극(京劇)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이유가 된다. 이소룡은 경극배우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아역배우로 경력을 쌓았고, 한국 출신의 이준구(Jhoon Rhee, 1932년생)에게서 태권도를 배웠다. 성룡과 홍금보는 둘 다 경극학교 출신으로 한국인 합기도 사범 김진팔(1941년생) 등으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이소룡은 미국에서 태어나, 유명한 배우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홍콩에서 살던 십대에 이미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다.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무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소위 전통 중국무술보다는 여러 가지 무술을 다 수용하여 배우려는 나름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손기술은 합기도와 권투에서, 그의 발기술은 태권도에서 따온 것이었다.
경극은 말과 노래, 춤과 곡예를 모두 갖춘 종합 오락물이므로 일급 연기자라면 잘 생긴 얼굴과 균형 잡힌 신체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무사형이든 그렇지 않든 배우는 수년 간에 걸쳐 기초무술을 연마해야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미학적 가치를 위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무술은 무타(武打)의 영역에서 발전하여 홍콩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무술영화의 무대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타지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찰스 홀콤 교수는 이와 같이 중국무술은 신비와 기적을 달고 다니는 종교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무술의 공식적인 얼굴은 직업적인 예능인 바로 그것이며, 무술가 자신의 이미지는 극장에서 따 온 픽션적 테마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은 최근까지도 투로무술의 연장이다. 1930년부터 50년간 중국은 겨루기를 하지 않았고, 중일전쟁이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무술의 발전은 치명적으로 늦어지고 말았다. 중국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전통무술의 발굴, 정리, 대중화, 학술연구활동이 일어났다. 1985년에 제1회 국제무술초대시합이 개최되었고, 1990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에 이르러서야 중국무술은 우슈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종목이 되었다. 동양 삼국의 대표적인 무술인 유도, 태권도, 우슈가 국가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시점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다. 유도의 경우 일본 국내와 세계에서 인정받은 시기는 빨랐으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공인받은 시기는 태권도와 큰 차이가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중국무술에서 배운 것은 가라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품새에 불과했다. 그들이 한국 사범으로부터 배우면 배웠지, 중국무술이 한국에 배워준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만약에 중국무술이 한국 보다 훨씬 뛰어났다면 올림픽에서 맨손무예의 대표적인 종목인 태권도의 메달은 13억 인구의 그들이 다 휩쓸어야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은 매우 저조한 형편이다.
중국정부는 1927년 난징에 중앙국술관(中央國術館)을 설치하고 이듬해 전국 규모의 무술경기를 개최한다. 1929년 제2회 대회에서는 경기방법, 평가방법, 순위평가, 경기장 설치 등과 같이 경기의 규범화를 가져 왔다. 중앙국술관 이외에도 각지에 국술관이 설립되어 1931년 23개 지역에 300여 개의 지역 국술관이 설치되었다. 중국무술은 우슈(武術)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무술단이 국제무대에 시범을 보여 스포츠화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중국 무술의 진흥은 이 무렵의 약 10여 년 후 다시 암흑기로 들어갔다.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던 독립군들에게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만주지역에서 중국 관내로 무대를 옮기게 된 한국 독립군이 국술의 진흥을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구(金九)는 1933년 봄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최고지도자 장개석(蔣介石)과 만나 군사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중국육군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개설됐고,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간 근대적인 군사 지식과 훈련으로 단련된 130여명의 무관을 길러냈다. 이 때 중국의 진과부, 진립부 형제의 지원하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었고, 이 형제는 이런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장개석은 1953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이들을 포함하여 임시정부를 도와준 중국의 인사 31명이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지정될 만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양국의 협조체제는 긴밀하였다. 1934년 12월 결성된 한국특무대독립군의 본부는 한인 학생훈련소를 운영했으며,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 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을 지키는 데 자신을 바쳤다. 한편 조선독립군의 의열단을 만든 주인공인 김원봉(金元鳳)은 1932년 가을부터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남경 근교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는 의열단의 대중투쟁 노선을 선도할 중견 군사 및 정치 간부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던 가운데 한중 국제연대를 배경으로 설립된 이들 학교의 존재는 이동을 하던 임시정부의 취약한 지도력을 보완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광복군의 인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한편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이 탄생한 것은 1940년 9월 17일의 일이다.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중경)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공식명칭은 한국광복군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에 군사조직법을 제정하였고, 1931년에는 뤄양(낙양)군관학교, 난징(남경)군관학교 등 중국군 사관학교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한국의 독립군들은 이처럼 중국의 사관학교에서 실전에 필요한 정규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과정에 격투기 종목이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한 간부학교의 경우 교육내용은 정치, 군사, 실습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은 파괴, 기습, 유격전 등 특무공작에 필요한 경우가 주를 이뤘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취지를 천명하였다. 총사령관으로는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훈련처장에 송호, 군무처장에 유진동 등이 임명되었고, 창설 1년 만에 3백 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는 엘리트 군사 양성에 긴밀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민간인들도 중국무술의 일부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무덕관 창립자인 황기는 1935년 남만주철도국에 입사를 하여 그 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하는 바, 이 국술이 바로 장개석에 의하여 1927년부터 10여년간 중국에서 장려되던 무술로 보인다.
이 시기에 중국무술이 진흥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전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을지는 의문이 많다. 중국무술에는 워낙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 뿐만 아니라 사실과 다른 과장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이나 중국영화에 보면 공식처럼 등장하는 메뉴가 소림사, 그리고 소림의 비전(秘傳)이라는 ‘역근경’ 또는 ‘달마역근경’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선종(禪宗)과 더불어 소림무술의 기원을 달마대사에서 찾는데, 소림사는 원래부터 한국적인 개념의 무술과는 관련이 없는 사찰이었다. ‘역근경’은 승려의 동작을 그림으로 설명하고는 있으나 그 원리나 추구하는 내용은 체조에 가까운 도인술(導引術)의 일종이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저명한 무술사가이자 권법가인 당호(1897-1959)는 중국무술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해 소림사에 들러 조사를 했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소림사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호신용 봉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노던 아이와 대학교 교수인 사학자 찰스 홀콤(Charles Holcombe)은 1988년에 발표한 논문 ‘전투의 현장: 중국무술 비평’에서 “달마대사의 전설을 무술과 연결시키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1644-1912) 시대의 일이다. 628년 운운하는 ‘역근경’이라는 책이 달마의 어록을 싣고 있다는 주장으로 연결을 지으려 하고 있으나 학자들은 이 책이 1800년 이전에 나왔다는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청나라 말기에 책의 가치를 올려보려는 의도로 달마에 기원을 두려 한 위작이라고 보인다. 당시 달마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게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밝힌 바 있다. 조셉 니담(Joseph Needham, 1900–1995)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저서에서 중국의 권법은 도인술의 한 분야로 기원되었을 것이라 결론 내리고 있다.
소림사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는 태극권(太極拳)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수련하는 권법이다.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요가나 체조처럼 남녀노소가 아침마다 밖에 나와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즐긴다. 중국 하남성의 진왕정(1600-1680)이라는 장수가 명나라 말에 창시한 권법이라는 설이 있고, 송당의 어간에 살았다는 장삼봉이 창시했다는 설도 있지만, 조셉 니담은 일종의 체조와 호신술과 무용이 섞인 형태로 규정하고, 그 기원은 화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았다. 화타(?-208)는 무술가가 아니라 중국 한나라 말기의 명의로 후세인들에 의해 외과의사의 태두로 존경받아 왔다. 그는 호랑이•사슴•곰•원숭이•새 등의 동작을 모방하여 오금희(五禽戱)라는 의료보건체조와 양생학설(養生學說)을 만든 사람이므로, 중국무술은 처음부터 상대방과 싸우는 격투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건강을 위한 체조의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태극권이 장삼봉과 관련되기 시작한 것은 1867년 이후에 불과하다며, 20세기 초에 나타난 태극권의 제창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했다.
근래와 와서 중국무술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는 소위 쿵푸(功夫)라는 말도 100년 전 만하더라도 종교적인 색채가 깃든 체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인 존 더전(John Dudgeon)이 1895년에 쓴 ‘도가의 의료체조 쿵푸’라는 논문에 의하면, 쿵푸라는 단어는 본래 일하는 사람(工夫)이란 의미로 치료체조나 체조의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쿵푸는 크게 몸의 자세와 호흡법으로 이루어지며, 기본적인 몸의 자세는 선 자세, 앉은 자세, 누운 자세라는 세 가지라며 쿵푸는 결국 종교적 체조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중국무술은 시합을 부정해 싸우지 않기 때문에 원래부터 실전성이 없었고, 실전성을 상실한 대신에 건강을 위한 수단이나 공연의 형태로 나타났다. 정신세계를 가미한 수양의 수단이 된 것이다. 최근에 유행하다 중국정부에 의해서 제재당하고 있는 파륜궁도 그 한 예가 된다.
1560년 명나라 장군 척계광은 ‘기효신서’에서 중국의 맨손무예를 화법(花法)무예라고 칭하며 실전에는 아무 쓸모없는 체조술이라고 단정 지었다. 중국무술은 춘추전국 이후 봉건제도의 발흥과 함께 체조화되기 시작했고, 명대에 와서는 실전성을 상실한 혼자만의 체조이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의 형태로 변모하였다. 척계광은 기득예 필시적(旣得藝 必試敵)이라 하면서 무술을 익히거든 반드시 적에게 시험해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시합을 중시하였고, 중국 전역에 걸쳐 관념적인 1인 연습형인 화법을 부정하였다. 이처럼 중국무술은 혼자서 하는 소위 투로(套路)라고 하는 것으로, 혼자서 끊임없이 새로 배우며 펼치는 형과 상대 연습을 위한 약속겨루기 형이 있다. 자유겨루기라는 의미의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중국무술은 주로 혼자서 투로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형태인 것이다.
무술은 곧 격투기라고 생각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의 무술은 건강, 호신, 심미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 운동이고 겨루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무술의 표현을 품새, 겨루기, 격파로 나눌 때, 한국과 일본의 경우 단연 겨루기를 우선시하고, 품새와 격파가 보조적인 반면, 중국에는 품새를 우선시하고 겨루기는 보조적이다. 중국에서 무술 챔피언이라고 하면 대부분 표연(表演), 즉 품새 시합의 우승자를 가리킨다. 현재 중국의 표연대회는 심미(審美)에 많은 점수가 부여되며, 격투기와는 상관이 없다. 중국무술이 이렇게 된 것은 과거 4대의 왕조에 걸쳐 취해졌던 금무정책(禁武政策)이 민간무술의 발전을 저해하였고 무술가가 아니라 권력자에게 유익한 형태의 무술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농민반란을 억제하고 이민족의 지배와 위정자의 안전을 위해, 혹은 문화혁명과 같은 격변으로 무술은 금지되었다. 무술을 하면 사형에 처해지거나 투옥 당했고, 일부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실전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은 금지되었다. 대표적인 중국무술인 태극권(太極拳)은 주먹 권(拳)을 사용하면서도 결코 상대방을 향해 공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청나라에는 무술가들이 은신처로서 극단에 참가하였다. 극단의 무타(武打), 즉 격투연기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의 이소룡(1940-1973), 성룡(1954년생), 홍금보(1952년생) 같은 무술영화의 스타들이 경극(京劇)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이유가 된다. 이소룡은 경극배우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아역배우로 경력을 쌓았고, 한국 출신의 이준구(Jhoon Rhee, 1932년생)에게서 태권도를 배웠다. 성룡과 홍금보는 둘 다 경극학교 출신으로 한국인 합기도 사범 김진팔(1941년생) 등으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이소룡은 미국에서 태어나, 유명한 배우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홍콩에서 살던 십대에 이미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다.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무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소위 전통 중국무술보다는 여러 가지 무술을 다 수용하여 배우려는 나름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손기술은 합기도와 권투에서, 그의 발기술은 태권도에서 따온 것이었다.
경극은 말과 노래, 춤과 곡예를 모두 갖춘 종합 오락물이므로 일급 연기자라면 잘 생긴 얼굴과 균형 잡힌 신체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무사형이든 그렇지 않든 배우는 수년 간에 걸쳐 기초무술을 연마해야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미학적 가치를 위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무술은 무타(武打)의 영역에서 발전하여 홍콩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무술영화의 무대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타지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찰스 홀콤 교수는 이와 같이 중국무술은 신비와 기적을 달고 다니는 종교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무술의 공식적인 얼굴은 직업적인 예능인 바로 그것이며, 무술가 자신의 이미지는 극장에서 따 온 픽션적 테마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은 최근까지도 투로무술의 연장이다. 1930년부터 50년간 중국은 겨루기를 하지 않았고, 중일전쟁이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무술의 발전은 치명적으로 늦어지고 말았다. 중국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전통무술의 발굴, 정리, 대중화, 학술연구활동이 일어났다. 1985년에 제1회 국제무술초대시합이 개최되었고, 1990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에 이르러서야 중국무술은 우슈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종목이 되었다. 동양 삼국의 대표적인 무술인 유도, 태권도, 우슈가 국가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시점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다. 유도의 경우 일본 국내와 세계에서 인정받은 시기는 빨랐으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공인받은 시기는 태권도와 큰 차이가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중국무술에서 배운 것은 가라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품새에 불과했다. 그들이 한국 사범으로부터 배우면 배웠지, 중국무술이 한국에 배워준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만약에 중국무술이 한국 보다 훨씬 뛰어났다면 올림픽에서 맨손무예의 대표적인 종목인 태권도의 메달은 13억 인구의 그들이 다 휩쓸어야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은 매우 저조한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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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kang00
<<깍도>>님께제가 쓴 글에 대하여 퍽 수긍이 간다고 평하여 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중국은 워낙 다민족 다문화 사회입니다.
정치적이로 북경만이 중심이지만, 그 것은 중심의 논리일 뿐입니다.
저는 태권도나 무술에 대하여 초등학생 수준, 맞습니다.
좋은 의견 계속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2010-10-18 신고
risk75
내용은 뭐 수긍이 갑니다만.. 마지막 결론이란 부분이 참 거시기 하네요.13억인구니까 다 쓸어야 당연한일이자만 .....현실은....
딱 초등학생이 즐겨쓰는 말이네요.
2010-10-18 신고
mskang00
댓글 달아주신 <박종한> 님께,아무 것도 아닌 제게 이렇게 성의 가득한 글월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저 제 선생님께서 이렇게 쓰라, 저렇게 쓰라 하시면
그렇게 전달해 드릴 뿐입니다.
님의 염원, 이루시길 바랍니다.
갑사합니다.
2010-09-30 신고
chinatkd
오늘 제가 있는 이곳의 아침 하늘을 보니 참 맑고 푸르네요...천고마비의 계절이 맞는가 봅니다.어디론가 가을이 오는 소리와 정취를 찾아가고 싶은 날씨입니다.필자 민수님의 휴식이 좀 길어지는 것 같네요....역사의 장르는 역사학 언어학 그리고 우리 동방의 경우에는 한학에 깊은 씨름을 하신 분들의 역할에 따라 많이 잘 발굴되고 개척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더욱이 우리민족무예사를 들여다 볼려면 사회 전반에 대한 전방위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중국 대륙으로의 역사기행....함께 이루어지길 기원하며...필자 민수님의 열정이 다시 피어나 우리 무예역사 탐구의 뜨거운 불씨가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2010-09-28 신고
mskang00
<<박종한>>님께(3)중국은 기예. 기공. 양생. 실전무술로, 한국은 실존적 실전적 무술로 압축하고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대목과, 중국은 우슈(무술)라는 명칭이 내용을 포괄 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태권도 처럼 명칭의 제정의의와는 달리 한국무술을 포괄하거나 대표하기에는 미흡하다는 대목을 통하여 님께서 표현해 주신 그 괴리와 아쉬움을 저도 공부를 통하여 나늘 수 있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09-22 신고
mskang00
<<박종한>>님께(2)미국 사람들이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타국을 이해하려 여러 시도를 하려 했고, 그 학문이 제국주의를 공고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평화봉사단만 하더라도 그런 기능을 하였으니까요. 님의 글을 읽고 나서 미국인의 관점을 참고하고 인용의 척도로 삼았던 것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님께서 “태극권만 하더라도 실제로는 상대를 두고 자신을 다루며”라고 하셨을 때, 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010-09-22 신고
mskang00
<<박종한>>님께(1)정확히 잘 보셨습니다. 저는 중국무술에 대해 미국 사람들이 쓴 논문 몇 편 보고 나서 현상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현상이 아니라 피상이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저는 중국무술에 대해서는 아는 바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서점에 있는 책 몇 권과 동영상 몇 편으로 마구잡이로 글을 썼으니까요. 전 외국에 제법 많이 다닌 편이지만 중국에는 한번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님께 제대로 들켜 얼굴이 뜨겁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0-09-22 신고
chinatkd
태극권의 대표문파라 할 수 있는 진가권의 시조라고 하는 분도....우리가 김해김씨의 시조가 김수로...밀양박씨의 시조가 박혁거세 라고 하는 의미와 같다고 봅니다.김수로의 조상은? 박혁거세의 조상은?...어떤 역사적 문화적 사실을 느닷없이 설화나 전설처럼 뚝딱 생겨나는 일이라고 딱 잘라 정리한다면 .....개인적 미화나 영웅화의 극치가 될 것입니다.물론 그 시조나 창시자라고 하는 분은 보다 체계화 또는 집대성하거나 명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든지... 대표성을 인정한다 할지언정 본질적 창시자로 꼽을 수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태극권의 형성에 미친 여러 문화적 무술적 요소나 요인을 바라보면 진가권의 역사 이전으로 또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한국인으로 우슈를 실제적으로 수련하며 이론을 깊이 공부하신 최병진선생님과 같은 우슈학자들의 연구결과와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우리 무술과 경계를 상당부문 오버랩되어있다고 보여지는 중국우슈의 역사 또한 흥미진진하긴 마찬가지입니다.훌륭한 연구계속 하시어 조금이라도 넷상이라도 나누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태극권만 하더라도 피상적으로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역사와 내용이 있다고 봅니다.그야말로 사람의 몸 움직임을 태극의 원리나 이론으로 이끌고 있음이나,피상적으로 보면 알수 없는 동작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를 두고 자신을 다루며 상대를 다루고 자신을 단련하고 최적화하며 상대에게 대응하도록 구성되어 있기에, 건강체조로,양생기공으로,상대를 활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실전호신무술 등으로 다각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중국무술들도 본능적 생존력 확보를 바탕으로 발생하였다고 봅니다.아울러 보다 복잡다단한 사회적 지리적 여유가 넘쳤던 특성만큼 다양한 의미가 부여된 기예.기공.양생.실전무술로 다양한 장르와 분파를 거듭하였을 겁니다.반면 중국동북지방과 한반도를 기반으로 역사를 이어온 한반도인들의 역사와 문화는 소수부족으로 외세침략에 대한 비교적 절박한 환경에 의한 실존적 실전적유형의 무술로 압축하고 발전시켰지 않나 여겨집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중국의 우슈는 중국무술전체를 표현하다보니,현대 복합 종합 경기방식을 갖게되었기에 시범이나 개인시연형식이 많이 등장하고 겨루기 유형의 경기가 비교적 왜소해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한국의 무술은 태권도를 비롯한 무술들이 보다 실전적인 동작 중심으로 단순명쾌화시켜 겨루기중심의 경기를 많이 등장시키다보니 상대적으로 보다 겨루기중심무술이라는 설명을 하게되지않나 생각됩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중국무술사는 워낙 방대한 것이라 공부가 부족한 저의 한계와 이곳의 논의의 관점과 좀 벗어나기에 개념상의 문제점만 제시한 것으로 일약하고,중국은 우슈(무술)라는 명칭이 내용을 포괄 할 수있는 반면, 한국은 태권도 처럼 명칭의 제정의의와는 달리 한국무술을 포괄하거나 대표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괴리와 아쉬움이 있으며,중국의 우슈는 대체로 손과 상체 무장을 중심으로 발은 심부름과 보조적인 상체중심무술인 반면,태권도를 포함한 한국무술의 특질은 발과 하체가 보다 많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상체가 조화를 이루는 무술이라는.... 차별되는 무술혈통문화가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근대 대륙의 정치지형에 따라 오늘날의 무술유형이 특성화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부분이 숨어있거나 남겨져 있음을 체감할수 있었습니다.하남,서북,하북,산동지방의 무술은 대체로 相搏 격투형이 발달하여 양산박-精武유파의 무협들이 배출되어 근세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던 상해지역에서는 이미 19세기말에 도박형 종합격투기시합이 횡행하였다고 합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많은 분들이 주지하시다시피, 중국의 우슈는 중국에서 현대 등장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무술의 장르들을 다 포함하는 (中國)武術 우슈라는 명칭으로 대표명칭이 결정되었음을 볼 때....보다 대륙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우슈의 각 장르에는 이루 셀수 없을 만큼의 장르들이 갈라져있습니다.유형에 따라, 유파에 따라, 기법에 따라, ....등등등....척계광의 기효신서 이전의 무술사적에는 한국고대무술들의 명칭에 등장하는 手搏,手劈,相搏 등의 용어들도 등장한 것으로 배웠습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중국의 역사를 단도직입하면 전쟁의 역사입니다.수많은 부족과 왕조가 끊임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루며 명멸을 이어왔습니다.단연 전쟁의 최소단위는 개인무술의 발달과 발전이라고 봅니다. 지역적 민족적 문화상황에 따라 그 특징은 달리 할지라도 수많은 다양한 무술이 전개되고 이어져 왔음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시대적 주류계급의 문화통합정책에 따라 오늘날 대변되는 우슈(무술)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봅니다.2010-09-21 신고
chinatkd
현대에 표출되고있는 중국무술에 대해 비교적으로 현상적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한국의 태권도와의 현상적 차이점에 촛점을 맞추면 대체로 수긍하게 됩니다.그러나, 중국무술의 근대화와 현대화의 현상에만 시각을 맞추면 많은 부분을 놓칠지도 모릅니다.제가 중국무술의 학술과 실전에서 최고를 자랑한다는 상해체대에서 민족무술계 수업을 받은 바 있습니다.중국무술 또한 나라의 면적이나 인구만큼 시대별 지역별 대단한 무술의 역사와 기법 유파가 존재했다고 합니다.2010-09-21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