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력은 1940년 이후 쓰여진 씨름 명칭! 대한씨름협회 관계자 증언 및

2025-06-16 / 조회수 : 144 신고

필자가 씨름 관련 건전한 비판을 하는것이지 잘못 돼라?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고려때 충혜왕이 무슨? 씨름을 했다하고 단순 추측, 희망성 번역을 마치 역사적 사실마냥 얘기하는건

태권도 이후 씨름이 뒤를 따랐고 택견이란게 또 태권도 흉내 내서 역사 왜곡에 한창이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막연하게?

각력을 한국 씨름 아니, 조금 더 시기를 소급해서 조선에서 하던 씨름을 일컫던 명칭으로 알고 있는 이가 허다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씨름협회(후에 조선각력협회, 대한씨름협회로 개칭되었음) 관계자 증언과 동국세시기 씨름 내용

그리고 이를 인용한 최남선의 조선상식풍속, 1964년 북한 민속학자 홍기무 글과 중국측 송나라 조로자가 쓴 각력기 해당 부분을 소개한다.


우리측에서 씨름을 각력이라 불렀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동국세시기에는 중국에서 고려기 또는 요교라고 한자로 쓴다 했고

정조때 간행된 재물보에는 졸교 등 한자로 쓰여 있지 각력이나 각저가 씨름이다!는 문헌 기록은 확인된 바 없다.

재물보에는 시(서로) 박(칠), 서로 치는것을 씨름의 일종이라고도 했다.


씨름의  한자는 고려기, 요교 또는 졸교, 시박 이외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을 더욱 뒷받침 해주는것으로 조선씨름협회를 조선각력협회로 개칭했을때 관계했던 분의 실제 증언도 남아 있다.


각력을 우리 씨름으로 지칭하고 인식하게 된것은 그리 오래 된게 아니다.

고작 해 봐야 일제강점기,, 그도 후반에 지나지 않는다.


(추측성으로 용어를 혼용하는것은 지양되는것이 옳다)


조선후기 기록에서 각력이 무(희)인데 탁견이다? 란 걸로 각력=씨름

수박+각력(씨름)이니 택견은 수박과 씨름을 합한것?

이라는 멍청한 애들도 많은게 현실이다.


이런 애들은 조로자가 쓴 각력기를 번역본이라도 읽어보고 말하는게 좋겠다.


각력이란 "11월에 있을 대열병을 위해서 10월에 말 타고 활쏘기를 익혀서 그 능력을 시험본다는 말이었다.


우리측, 조선시대 각력이나 각저 등은 중국 명나라와 용례가 다르지 않았음은

조선이 명을 얼마나 사대 했는지부터 이해하는게 순서다.


*禮記란 한문. 유교경전으로 오경(五經)의 하나로써

『예기』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 초기이며, 통일신라 이후로는 관리등용 시험에 필수과목이 되는 수가 많았다고 한다.


필자 주: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에 예기의 각력에 대해 논하라! 했는데

뭐?

씨름이 어떻고 저떻고 했다간 등신 취급 받았을수도 있다!



각력은 언제부터 씨름이었을까?

필자 주: 1921년부터 40년까지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각희 戲 로 다리 각,자를 쓰고 있다.


https://blog.naver.com/bhjang3/220884740423


1920년부터 1929년 까지 동아일보 기사들과 매일신보, 독립신문 등을 찾아봐도

기대한 것처럼 각력은 보이지 않는다.


전부 한글로는 씨름, 한자로는 다리,각자에 유희,희자를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 각희는 씨름을 지칭 했음이 분명하다.


이때의 각은 뿔 각이 아니라 다리 각자다!



角力처럼 뿔,각자를 쓴 것은 한참 뒤이다.



한국씨름연구소

2022년부터 대한씨름협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씨름자료를 정리하는곳이다.


https://blog.naver.com/ssireum123/222883137084


[김근찬씨 증언- 1938년 조선씨름협회 총무를 지냈다]


*김근찬씨는 자신이 조선씨름협회에 관여한 때를 1940년이라고 해서 기간이 다소 차이가 있다.


이분의 증언 관련 경북 씨름협회장을 지낸 김태성은 당시 김근찬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증언해서

실제 조선총독부에서 씨름 명칭을 바꾸게 한것은

상박-김근찬 본인 증언, 각력-신문 기사(1999년 연합뉴스), 김태성 증언 으로 차이는 있으나 사실관계로 판단된다.


수난 당한 씨름 개명

상박相撲을 각력角力으로 바꿔

내가 조선씨름협회에 관여하기 시작한 해는 1940년이라고 기억된다.

(중략)

심판위원장을 맡아 보다가 전무이사가 되었을때 씨름협회라는 고유호칭이

일제총독부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개명을 하라는 엄명이 내리면서

그들의 호칭인 스모우(상박相撲)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개명 않으면 씨름 없애겠다 위협

(중략)

그래서 이사회를 소집하여 씨름협회 호침 문제를 협의하기에 이르렀다.

각저,각희,각계,각력 등 의견이 나왔다.


씨름을 표현하는 한자로는 의견을 모으고 ,,, 힘력자를 넣은 각력으로 하는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어 조선 각력협회로 명칭을 바꾸겠다고 총독부에 통보했다.

그때의 에피소드로써 아직도 생생한것은 각력을 일본말로 스모우라고 호칭하므로

상박도 스모우요 각력도 스모우니 상관 없지 않느냐 하니까 담당자인 일본인

시오자키도 군말 않고 인정해주기에 이르렀다.

필자 주: 샅바 관련 당시 상황

이 무렵 협회에서 한일들을 보면 지방마다 씨름의 격식이 오른씨름과 왼씨름으로

각각인 것을 통일 시켜야 한다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였던 바

(중략)

김윤근, 고봉우씨 등과 함께 낙원동 강무관에서 통광목을 잘라 실제로 매어보면서

다리둘레,허리둘레 등을 합친 길이가 몇자이면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지금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것을 만들어 샅바규격을 통일하기로 했다.

샅바에 통광목 처음 사용

(하략)

김근찬의 증언 관련 교차확인 되는 것이 있다.

<한국스포츠 100년> ⑨씨름과 조선총독부

https://m.sports.naver.com/general/article/001/0004455898


이 기사에서

총독부는 조선씨름협회가 1938년 종합대회인 조선신궁(神宮)경기대회에 씨름을 정식 정목으로 넣으려 하자 씨름이라는 이름으로는 절대 참가할 수 없고 `각력(角力)'으로 이름을 변경하면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겠다는 통보했다.

줄 친 부분은 김근찬씨의 증언과는 배치된다.

김근찬씨는 총독부에서 상박으로 하라고 했으며 논의 결과 일본어 발음이 같은 각력,으로 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했다했다.

기사 이어서

김태성 경북씨름협회장은 "당시 조선씨름협회 총무를 지냈던 김근찬씨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 각력이 뭔가 의아했었는데 70년대 일본 오키나와에 들렀을 때 그곳에 각력협회가 있고 각력이 씨름과 비슷한 그 지방 경기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

필자 주: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씨름을 한자로 각력이라 일컫진 않았을까?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조선헌종 15년(1849)에 홍석모(洪錫謨)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들에 대해 기록한 책.




파란색 테두리 내용은 샅바와 관련 된것으로 후술한다.

붉은색 테두리의 내용은 동국세시기 저자인 홍석무가 밝혔듯

"내 생각에는?, 또 생각건데?이지 근거를 든게 아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풍속에도 이 동국세시기를 인용하고 있다.





북한 민속학자 홍기무는 이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다.

조선의 민속놀이

1964년 북한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민속학연구실

홍 기무

씨름

우리나라의 씨름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민속놀이의 하나인동시에

이웃나라들에 영향을 준 점에서 동방씨름의 조종이라고도 할수있다.


18세기 말엽에 류득공은<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당시 서울의 단오풍속에 대해서 쓰면서

"서울의 젊은사람들이 남산기슭에 모여서 씨름을한다.

그법은 두사람이 마주 무릎을꿇고서 저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잡고 또 저마다 왼손으로 상대방의 넓적다리를 잡고서

한꺼번에 일어서 서로 넘어뜨리는것인데, 안낚시(內句), 바깥낚시(外句), 덜미잡이(輪起)등 여러수가 있다.

중국사람들이 배워서 하는데,<고려기>(高麗技 )라고 부르며 <료교>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경도잡지 내용을 홍석모가 인용한거다.

홍기무는 홍석모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썼다.


반세기 후에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서 이를 더욱 보태여<힘이 세고 수가 날쌔서 여러판을해서 다 이긴 사람을"판막을 했다"고한다....

수리날 단오에는 이놀이가 매우 성하여 서울,시골할것없이 많이한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의 서울의 씨름터는 남산의 왜장,북산의 신무문 뒤였으며 지방에서 단오씨름이 성한곳은 경상도 금산이라고 했고

충청도에서는 음력 7월 15일 즉 <백중>과 음력 8월 16일 <추석> 다음날에도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대표적인 곳을 든것일 것이다.

당시 앞에서 든 지방과 비교해서 성한 정도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의 영명사 뜰과 내성,남문밖 벌판에서 벌어지던 단오씨름과 추석씨름이 또한 유래가 오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큰 씨름판에는 씨름군들의 나이와 힘에 따라서<애기씨름>,<중씨름>(포씨름이라고도 한다.)

<상씨름>의 등급이 있어 대개 애기씨름으로부터 시작하는 법이였다.


씨름판도 마당 한가운데에 따로 두어 간 직경으로 둥그렇게 모래를 펴고 씨름군의 차림도 넓적다리에 샅바를 매고 하는데,

샅바를 매는것도 어느쪽 다리에 매는가에 따라서 씨름 손잡는법이 다르게 되였다.


오른편 다리에 매서 상대방이 왼손으로 샅바를 잡게 하는<왼씨름>이라는 것과 왼편 넓적다리에 매서 상대방이 오른손으로

샅바를 잡게 하는 <오른씨름>이라는 것이 있으나 경도잡지나 동국세시기에 적혀 있는

왼씨름이 역시 보편적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 각처의 장사들이 모여드는 큰 씨름판을 말하는 것이요,


조선사람은 모두 씨름을 좋아하기 때문에 명절이 아니라도 쉬는 때에는 이른바<장난씨름>이 또한 성하였다.

이것은 도시보다도 농촌이 더 하였다.

이리하여 젊은이들은 씩씩한 기상과 날랜 몸놀림을길렀다.

농촌에서 많이한 <장난씨름>에는 샅바를 매지 않고 하는<민둥씨름(네굽씨름이라고도한다)>을 많이 하였으며 선채로 하는 선씨름도 하였다.


씨름판에서 거는 상급은 황소였으며 우승으로 판마감을 한 젊은이는 황소를 몰고 개선장군처럼 유유히 돌아갔다.


(중략)


우리나라에는 심지어 팔씨름, 다리씨름이라는것도 있다.

팔씨름은 우리나라 외에 일본에도 있으나 다리씨름은 우리나라 밖에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씨름을 한자로<각력> 또는 <각저>라고 썼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홍석모는 <례기월령>과 장형의<서경부>에 있는 각력, 각저를 곧 씨름으로 보고 중국에서 씨름이 오래임을 말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거기에 있는 각력이라는 말은 11월에 있을 대열병을 위해서 10월에 말 타고 활쏘기를 익혀서 그 능력을 시험 본다는말이지 씨름이 아니며

<장형>의 서경부에 있는 각저도 그 글 자체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무거운것 들기, 솟대(솟대장이 올라가 재주를 부리는 장대.) 오르기를 비롯하여

잡기(여러가지 놀음), 환술(요술, 사람의 눈을 속여 넘기는 괴상한 술법)등의 경기이며 씨름이 아니다.


대체로 중국에서 각저라고 하는것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가지로 쓰이는바 넓은 의미로서는 잡기와 환술의경기를 가리켰다.


좁은 의미로서는 맨주먹으로 승부를 겨루는것을 가리켰는바, 이것은 오대사, <10세기 초에 있은 5개 왕조에 관한 력사책.>리 존현전에서

보는바와 같이 수박 즉 권법(주먹으로 겨루기를 하는법)이지 우리나라 씨름과 같은것은 아니였다.


우리나라 씨름과 같은것을 중국에서는 관교, 또는 솔교라고 부르는바, 근래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솔교를 몽고에서 시작한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씨름에 대하여서도 고려 충혜왕때부터 씨름 이야기가 나온다는데로부터 몽고 전래의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나 이는 력사적 사실의 전후관계를 모르는데서 나온것이다.


고분벽화에서 보는바와 같이 이미 고구려에 후세의 씨름과 꼭 같은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류득공이 중국 솔교는 조선씨름을 본받은 것이라고 본 것은 정확한 관찰이라고 할것이다.


중국 솔교는 물론, 일본씨름도 조선에서 건너간것임은 의심할 여지 없는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전통을 가진 우리의 민족경기 씨름이 이 역시 일제통치시기에 박해를 받고 쇠퇴 되였었다.


그것은 첫째 군중이 모이는것과 우리 인민들 속에 민족정신이 발양되는것을 놈들이 극도로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였다.

8.15 해방 후에야 공화국 북반부에서 씨름도 우리 인민의 건전하고 진정한 민속놀이로 정당히 계승되여 더욱 발전하게 되였으며

오늘 국가적인 주요 민족경기의 하나로 되고 있다.

각력기


중국 "북경 인민체육출판사 1990"


각력기는 송(宋;960~1278)나라때의 조로자(調露子)가 편찬한 책으로 역대 솔각(率角) 즉,각력에 대한 사화(史話)를 모은 책


각저희는 東漢때 百戱라고도 했다.


동한말 通俗文에 넘어뜨리는 놀이를 相搏이라 했다(爭到曰相搏),

그 특징은 처음에 주먹으로 치고 수박으로 공격한다.

(조로자 <각력기>,북경 인민체육출판사 1990, p7).

상고시대(商,周,漢등)의 뛰어난 무술 기교는 한나라 角抵, 百戱 등으로 나타나

발전을 거듭 했으며 수, 당의 舞蹈, 雜技로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p3).


<한서애제기> 찬(贊)에는 고상한 자는 잘 나타내려 하지 않고 (卞)로 武戱를 추구했다.


소림은 卞이 곧 手搏이다. 角力이 武戱다 라고 했으며,


필자 주: 정조때 재물보의 변 어쩌고 저쩌고는 소림의 말을 인용한 것.

​변=무희, 변=수박=무희, 각력=무희

무희로서의 변과 수박, 각력 등 보통명사를 쓴거다.

이 각력은 각저희라는 것으로 각력, 각저희는 씨름이 아니다.


최영년이 지은 해동죽지 1925년에는 각저희를 씨름이라고 했는데 시기적으로 늦다.

교차확인 되는 기록이 전무하다.


고구려 각저총도 마찬가지다.


벽화에는 각저라 되어 있지도 않고 씨름을 한자로 각저라 지칭했다는 우리측 기록도 확인되지 않는다.


정조때 재물보에 씨름 관련 용어가 나오기에 부언 해 둔다.



(1) 청색 테두리- 각저,는 한무제때 시작했다, 소 뿔을 머리에 쓰고 하는거다.

상당 각력이다.


각저(우리 씨름 아님)=각력(마찬가지로 이것도 씨름이 아님)


(2) 한자로 졸교= 한글로 씨름이라 했다.


즉, 정조때 씨름은 한자로 졸교였지 각저도 각력도 아니었단 얘기다.


같은 책 같은 페이지에서 구분을 하고 있다.


(3) 녹색 테두리는 택견 관련 짜깁기 하는데 쓰이는 부분이다.


변이 수박이고 각력이 무이고 운운은 무예도보통지에도 인용 되어 있는데

소림은 이들을 무희(무술놀이나 무술적 유희로 이해하면 틀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 한글 표현이 탁견, 일 뿐인거다.


무술적 놀이, 유희를 총칭해서 우리말로 탁견이다 한거다.


이건 보통명사로써 고유한 종목을 일컫는게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변=수박+각력=씨름=택견(수박+씨름),,,???

멍청한 애들은 이해를 하는게 좋겠다.

조로자는 한나라 이후에 角力과 角抵란 말이 뒤섞였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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