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기의 일본무도 잔심(殘心)? 83년부터 관절 기술도 택견에 추가했다!

2024-07-22 / 조회수 : 475 신고

한국문화저널 기획 보도!

(택견 의혹)송덕기의 일본무도 잔심(殘心)? 83년부터 관절 기술도 택견에 추가했다!

http://mhjn.dothome.co.kr/%ed%83%9d%ea%b2%ac-%ec%9d%98%ed%98%b9%ec%86%a1%eb%8d%95%ea%b8%b0%ec%9d%98-%ec%9d%bc%eb%b3%b8%eb%ac%b4%eb%8f%84-%ec%9e%94%ec%8b%ac%e6%ae%98%e5%bf%83-83%eb%85%84%eb%b6%80%ed%84%b0-%ea%b4%80/

택견 송덕기가 1973년 예용해 조사때 증언했던 총 20개 기술, 좌우 나눠 10여가지, 스승한테 조목조목 배우질 못해 안타깝다! 했던 것과 달리

시기적으로 기술들이 추가,확대되며 우리는 발차기 몇개, 걸이 기술 몇개, 손만 쓰는 기술은 칼잽이가 단 하나의 수?등 민속적인 것에서 마치 일본무도 숙달자를 대하는듯

송덕기에 대한 무력 관련 인식이 바뀌어 갔다.


민속 놀이?

단오날 그냥 모여서 했다?

조목조목 배우질 못해 안타깝다?


이런건 문화재관리국의 개입과 무비판 수용돼 오며 의문조차 될수가 없었다.


뭐 하면 그냥 옛날 택견 기술이겠지? 라는 근거 없는 신뢰를 보냈지만 정작, 그 이면에 송덕기의 일본무도 학습 관련 시기적, 지역적 개연성이 있다는것과

문화재 지정이 거절 된 후부터 추가,확대 시킨 송덕기의 택견 주장 기술들중 상당수가 일본 가라테, 야와라에서 유사기술이 호가인되는 것으로 인해서

송덕기가 부족했던 택견 기술들 외 학습 했었던 일본무도에서 동작, 기술들을 택견으로 유입 했을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연구자의 송덕기 일본 야와라(쥬도,쥬쥬쓰) 관련 학습 의구심은 가설이 아닌 확신 단계에 이르러 있다.


(송덕기의 야와라 학습 관련 그 사실을 알만한 주변 인물들은 증언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연유가 무엇일까?

태권도 촤홍희는 정직한 편이다.

본인 스스로 일본 가라테도를 수련하고 그보다 더 나은 태권도를 창시할 수 있었다! 했다.

그러나 송덕기 관련 사실관계 여부를 판단하기도 전에 일본 무도 운운 말만 나와도 화들짝 하고 놀라며 감추고 숨기기에 급급한듯하다.


우선, 85년 송덕기가 택견 기술이라 주장하며 했던 재기,란 것과 일본 야와라 류파 쌍수집류의 재기를 비교해 본다.


송덕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재기 용어와 기술 사용 관련 두가지로 이해하고 있었던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들 두가지가 처음부터 다른것이었는지 아니면 송덕기가 임의로 구분 했었는지도 지금으로썬 확인이 어렵다.

다만, 이질적 두가지를 같은 용어로 묶어서 어떤때는 이렇게, 어떤때는 저렇게 취사선택 했음은 확인된다.


1983년 책에는 허리재기와 올려재기가 있다.

허리재기는 양손을 허리께 붙이고 뒤로 젓히는 준비운동 같은 것이고 올려재기는 제기 차듯이 하는 동작을 지칭 했었다.

그러나 85년부터는 재기가 그게 아니고 일본무도식 개념으로 확인된다.


연구자가 일본 야와라 전문가가 아닌 관계로 기술의 형태 및 목적성에 의하는것을 이해 하시기 바람.




송덕기 시연, 야와라 고제자 촬영(1985~  ) 송덕기가 어깨재기,를 하는 모습이다.

이 외에도 송덕기는 재기를 세분화 해서 시연 했다.








사진과 영상은 일본 야와라 류파 쌍수집류 고제자의 시연이다.

여기서 상대편을 쓰러트린 뒤 시연자는 위와 같이 오른손, 왼손을 자신의 허벅지(무릎께)에 대고 상대에 대한 경계를 유지한다.

쌍수집류에서 이런 재기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잔심(殘心) 일본무도에 있는 고유의 개념으로 마음을 남김 = 방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잔심(残心)은 일본무도의 특징중의 하나로 기술이 끝나도 방심하지 않고 상대의 반격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 잔심이 완료가 되어야 온전하게 기술이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다. 즉, 타돌을 성공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가 아니라 잔심을 줬느냐? 아니냐?

여기가 타돌이 온전히 끝나는 포인트다.<출처 국제검도연맹>


쌍수집류는 카노지고로가 정리한 일본 강도관 쥬도에도 영향을 끼친 류파로써 서로 기술을 비교하는 영상 등이 일본측에 널리 퍼져 있다.



双水執流 組討 佐藤昇一郎師範 清漣館


쌍수 집류 조토 제1회 고무도 대회에 있어서의 사토 가즈이치로 사범의 연무.

메이지 25년 니가타 출생. 사토사는 메이지 45년 1월 마츠이몬시타에 입문,

다이쇼 6년조 토목록을 전수 후 강도관에 입문해 당일 3단을 받는다. 강도관 8단


송덕기가 85년부터 촬영했던 것에 이 재기가 포함 되었다.


네이버사전에 재기 명사형은 확인되지 않지만

동사로써 재다!는 길이,등을,, 동사 여러모로 따져 보고 헤아리다.

일본어로는 타동사 (살피다) 몰래실정지츠 조탐구하다사구타동사 (살피다) ひそかに実情じつじょうを探さぐる.

로써 쓰인다.


송덕기 재기 취사선택 했다!


1983년 자신이 머리말을 쓴 책에 택견의 전부를 공개하게 된 것! 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 또 다시 추가를 시켰다.


송덕기의 재기는 눈으로 하는것(눈재기), 이마재기,어깨재기,허리재기,칼재기,두발재기,무릎재기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한국 야와라 고제자 김정윤은 송덕기와 한국합기도 도주 최용술 관련 이런 증언을 했다.


"송덕기 선생이,, 보인 재기에는 눈재기, 이마재기, 어깨재기, 칼재기, 허리재기, 두발재기, 무릎재기가 있었다.

재기는 떨어져서 겨루는거다.

서로 맞붙어서 겨루는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 맞붙게되면 상대편을 튕겨낸다.

재기는 기술을 쓰는 형태도 다르고 겨루는 방식도 다르다.




송덕기 1985~ 눈재기 시연 모습, 우리 민속에 포섭 될 수 없다.


야와라 고제자 얘기처럼 이건, 기술로 활용되기 이전에 개념이 있는거다.

송덕기가 생전에 연로한 상태에 엉거주춤하게 해서 시연하는 동영상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이러한 이질적 요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방해된 것으로 사료된다.


"송덕기 선생은 재기 가운데서 눈재기, 하나만 제데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기의 기예들을 빠트리지 않고 보여줬다."


"최용술 선생은 60대까지도 재기를 잘했다.

눈재기를 할때는 눈에서 파란 빛을 뻗쳐 내기도 하고, 상대편의 눈을 자기 눈으로 눈잡이 하기도 했다.

재기의 원리와 기술의 종류는 송덕기가 촬영했던 책에 전수되어 있다."


위의 송덕기 재기 중에 83년 책에는 칼재기와 이마재기 두개가 더 확인된다.

이 중에 이마재기를 살펴 보자!




송덕기는 민속놀이겸이었던 발차기 택견 외에 상기와 같이 관절 기술에도 이해도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냥 무턱 대고 상대방 이마부위를 미는게 아니다.

이건 일반적인게 아닌 특별한 것으로 즉, 기술이 된다.


송덕기, 관절기술 이해도 높았다! 연로한 상태 시연 영상들에 사람들 이질적 요

소 인식 방해 사료돼!




1985~ 송덕기 시연,촬영


위의 이마재기와 이 손목 관절기술을 살펴 볼때 송덕기가 관절기술들에 대한 이해도가 적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두번째 손목 관절기는 1983년 문화재 지정되기까지 택견 기술로 주장하지 않다가 그 이후 85년부터 새롭게 추가된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송덕기, 임호와 일제강점기 일본무도와의 접점 개연성에 대한 것이다.


송덕기가 택견 기술이라며 1973년 예용해에 증언했다가 83년 뺀 쥬도 배대뒤치기 유사기술 그리고 85년 이후 촬영에서 쥬도 전방 낙법과 유사기술 시연,

대동류 합기유술에서 확인되는것과 유사기술을 송덕기가 한것은 사실관계다.


송덕기로부터 계속, 쥬도, 야와라 얘기가 나오는 탓에 연구자는 송덕기, 임호와 일본 쥬도,야와라의 조선 진출관련 시기적, 거리적으로 비교해서 이해를 도모했다.


아래는 미확인 상태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판단되어 후속 연구중이다.


송덕기의 이질적인 택견 주장 기술들을 이해하려면 우치다 료헤이(후쿠오카번사이자 무예의 달인으로 알려진 우치다 료고로(일본어판)의 삼남, 활쏘기, 검도, 유술, 씨름, 사격을 부친에게 배웠다)가 송덕기 13세 무렵 서울 명동에 가마니 30매 크기의 쥬도장을 개관 한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우치다 도장은 송덕기가 거주하던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현재 기준으로 전철 30여분 안팍 에 지나지 않는 인접 거리에 위치했다.




우치다 료헤이(일본어内田良平1874년 2월 11일 ~ 1937년 7월 26일)

흑룡회 간부 , 유도 5단


옛 후쿠오카번사이자 무예의 달인으로 알려진 우치다 료고로(일본어판)의 삼남로 지금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도진정(唐人町)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료스케(良助), 기노에(甲). 1902년 료헤이(良平)로 개명하였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 검도, 유술, 씨름, 사격을 부친에게 배웠다. 


신도몽상류 지술 (신도무소 류류 주츠)은, 일본 의 지팡이 의 유파 . 에도시대 초기 무예자 몽상권 노스케가 창시했다. 에도시대에는 진도몽상류봉술 , 신당몽상류봉술 이라는 이름이었다. 고류 지술에서는 가장 보급된 유파이며 현대 지팡이 와 경지술 의 모체가 되었다.


후쿠오카번 으로 주로 하급 무사가 배우는 포수술 인 「남업(단교)」의 하나로서 전해져 왔지만, 메이지 유신 후, 시라이시 노지 로와 우치다 료고로 ( 우치다 료헤이 의 아버지) 등에 의해 전국 보급의 단서가 열리고, 쇼와 에 들어가 시라이시의 제자, 시미즈 타카지 , 타카야마 키로쿠 , 을 토시 쿠라 등은 대일본 무덕회 에 참가해, 본격적인 전국 보급이 행해졌다. 중산박도 와 그 제자도 신도몽상류지술의 보급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치다료헤이의 아버지인 우치다 료고로는 신도몽상류장술 >지팡이뿐만 아니라 신도 유검술을 포함, 일달류 포줄술 영문판 ) , 일각류십수술 , 일심유쇄 낫술 영문판 ) , 우치다류 단지술 , 중화류 단검술 을 병전 했었다.


아래는 우치다료헤이 도장에서 같이 수련됐던 타류 유술종목인 쌍수집류 14대 수장이다.


대한제국에 유도를 소개한 사람은?


아오나야기 키헤이 마사요시- 소수이시류(파)

소수이시류(双水執流)의 아오야나기 키헤이 마사요시(青柳喜平正聰)

쌍수 집류 (そすいしつり、そうすいしりゅう)는 일본 무술 의 유술 과 거합 의 유파.


유조는 니가미 반노스케 정청(후타가미한노스케마사아키)에서, 승응 년간 에 창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 . 처음으로 타케우치류를 타케우치류 개조의 타케우치 쿠모리의 제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운 후 니신류를 창시 [2] . 그 후 요시노의 산속에 37일 참배해 오오고, 니신류를 바꾸어 쌍수집류조 토요노유로라고 칭했다. 관문 연간 니신은 후쿠오카번 으로 마회조에 취임하고 , [후] 직방설간가에 의해 동련사번 으로 전승, 관연 4년에 설간종익에 의해 후쿠오카번 으로 전승되었다. 타케우치류 에서 파생된 유파이지만, 타케우치류에서는 「요노유키」는 1척 2치수의 단도를 이용한 조토 기법을 가리키지만, 현재의 쌍수 집류에서는 거합을 「요노유키」라고 부른다. 에도기에 에도에 전파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강도관조선지부의 어린이유도


1930년 4월 강도관 조선지부 어린이 시합대회 사진(송덕기 거주지에서 현재 기준 전철로 30분 거리다, 소공동 위치)


대회, 연수, 수련, 군경지원까지 도맡아 했다 한다.


강도관 조선지부


해방후 1948년 강도관 조선지부


그뒤 송덕기가 24세때 서울 중구 소공동에 설치 되었던 강도관 조선지부(카노지고로 계통)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역시 거리로는 송덕기 거주 사직동에서 30여분 거리에 있었다.


송덕기는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 태어나 사셨다 했다.

이 사직동에서 현재 기준으로 전철 30분 거리에 1906년 일본인 우치다 료헤이가 명동에 우치다 유도장을 개관 했었다.

돗자리 30매 정도 크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송덕기 나이가 13세 였다.

이후 1917년 일본 강도관 쥬도 조선지부까지 서울 소공동에 설치됐다.

이역시 송덕기 거주했던 사직동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에 불과하다.


송덕기는 1893년 출생 했고 임호가 자기보다 11세 연상으로 29세(임호)때 배웠다고 했다.

송덕기는 1964년 한국일보, 1973년 예용해 조사에서 18세때부터 택견을 했다고 하다가 어떤 이유인지 1983년에는 12세부터라고 말을 바꿨었다.


임호 나이를 송덕기와 같이 6년 소급 시켜야 할지 그대로 둬야 할지 연구자는 고민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송덕기 얘기를 받아 들여서 임호 나이는 소급 시키지 않고 상기 우치다 쥬도장 개관과 강도관 조선지부 설치와 시기를 비교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호- 24세때 우치다 도장 서울 중구 명동에 개관, 35세때 강도관 조선지부 서울 중구 소공동에 설치

이 역시 임호 거주지역인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전철로 30분 이내 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1)시기적

(2)거리적,으로 임호와 송덕기가 일본 쥬도, 야와라를 경험 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확인했다.


당시 우치다 도장이나 강도관 조선지부 설치는 일본인과 조선인들 사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청소년기의 송덕기와 청년기의 임호는 우치다  쥬도장 개관, 강도관 조선지부 설치를 알 수 있었을 연령대로써 시기적으로 겹치고 거리적으로도 멀지 않은 곳에 쥬도장과 강도관 조선지부까지 있었다는게다.


더군다나 우치다도장에서는 강도관 쥬도 외에도 일본 유술(야와라) 류파인 쌍수집류까지 같이 수련 되었고 우치다는 강도관 쥬도 외에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다양한 무도에 일찍부터 영향을

받았었다.


임호와 송덕기는 인접 거리에 있던 이 우치다 도장과 그후 11년 뒤에 설치되었던 강도관 조선지부에서 강습을 받거나 또는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것은 송덕기 본인으로써 쥬도 배대뒤칙 유사기술 택견 주장했다가 이후 기술을 책에서 빼기도 했었고

83년 책에는 야와라 유사기술을 택견 기술로 수록 하기도 했었다.

85년 이후에는 쥬도 전방낙법과 같은 유사기술을 택견이라며 시연했다.


또한 송덕기 시연을 촬영했던 합기도 도주 최용술의 고제자는 송덕기가 야와라 비전기술 5가지를 능숙하게 해 보였다! 고 증언했다.


송덕기가 생전에 택견 기술이라고 주장했던 것 중 민속 택견 기술 발차기, 걸이 기술과 칼잽이 외 대다수는 문화재 지정을 위한 과정에서 추가되고 확대되었다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었다.


(세부사항은 추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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