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 송덕기 의혹 3가지, 태권도식 옆차기후 뒤후리기 택견 주장, 일본 유도 배대뒤치기도 택견 기술? 야와라 비전기술 5가지 시연?

2024-07-06 / 조회수 : 306 신고

송덕기는 검증 된 적이 전혀 없다!

있는것은 일방적 주장일 뿐 반대되는 자료 확인은 불가능 했다.


송덕기가 주장한 택견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에 대한 학술적 의심으로부터 시작 된 추적이다!

이 송덕기가 주장했던 택견은 반대되는 비교검증도 없이 우리 사회에 수용 되었다.

그러나 북한 민속학자 계정희 교수의 1965년 발표 개성 지역의 택견 발굴로  반대되는 재료로 인해서 더 이상 송덕기가 주장했던 것에 한해서 일방적 정보를 제공받지 않아도 되는 보다 객관적 상황이 됐다.


북한측 택견 재료와 송덕기 재료 두가지를 놓고 비교 확인 해 갈때

양측에서 공통되는것은 인정하되 북한측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또는 다른것은 송덕기 개인 주장일 뿐 공적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는 것이 연구자 입장이다.

개인 주장은 개인 주장 일 뿐! 사회에 강요 되어서는 안된다.


송덕기가 기본수라고 했던 일본 유도식 무르팍치기/배대뒤치기 행방이 묘연하다?

택견 전부를 공개했다 하면서 책에 수록한 옆차기 후 회축(태권도 뒤후리기)도 행방불명 됐다?


송덕기가 택견이라 주장한 11가지 기술을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 기술 숫자를 늘이고 창작, 개작 및 타 무도(일본 유도, 태권도(가라테도) 등 유입이 합리적 의심을 넘어 확신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다!


송덕기 증언과 시연사진, 영상 기타를 통한 송덕기 주장의 택견을 판단하려면 복수의 재료가 필요하다.


알려지기는 예용해 조사후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 신한승이 충주에서 도장을 하면서 태권도 위계제도에 해당하는 단급을 동, 째로 품세를 본때로 해서

체계를 만드는 동안에 그러면 송덕기는 신한승을 지켜 보기만 했을까?

아니면 함께 또는 별개로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 예용해 조사 당시 11가지 기술을 대폭 확대 해 가고 타 무도종목을 참고해서 기술 숫자를 늘리고 체계를 만들려 했을까?

이에 대한 추적을 한다.


북한측 택견 발굴로 송덕기의 택견 대표성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게 되었다.

문화재 지정?

그건 행정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걸 들춰 내자면 2016,7,8년에 걸쳐서 필자가 문제제기 했던 것을 반복 해야 하는데 글 쓴 취지는 송덕기가 주장했던 택견 실체파악에 있다)

사실관계와 항상 같다고 볼 수는 없는거다.


송덕기가 뭐라고 했다? 송덕기가 시연한 사진이다? 영상이다?그러는 정보에 노출되고 문화재청 개입으로 인한 공권력, 언론력에 공적 신뢰를 검증도 되지 않은 송덕기에 부여했다.

1900년 서울 제동 출생의 권태훈은 택견이 문화재 지정 즈음, 본식이 아니다! 가짜들이야! 라는 증언을 녹취로 남겼다.


또한,  비판할 수 있는 반대되는 재료가 부존재 한 상태였고 송덕기가 고령이라는 신뢰가 작동 했던 이유도 있다.


송덕기? 송덕기? 그러며 그의 증언과 시연 등을 의심 없이 수용하고 그러는 와중에 전통적인 서울 지역의 택견은 민속놀이에서 일본식 무도로 시기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치 했었다.


본문 중간에 송덕기가 1973년 총 20가지 기술, 좌우로 나누어 10가지 정도 기술 증언 후

10년 뒤 박종관씨에게 택견을 전수 했다며 출판 한 택견 책 머리말에 "택견의 전부를 공개했다!" 하고 대폭 늘어 난 기술 공개를 해 놓고

그 뒤 2년이 지나서 김정윤 선생에게 또 다시 택견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한다.




필자는 연구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비록 인터넷 언론이긴 하지만 등록 된 신문 발행인이자 편집인기도 하다.

타고 난 성향이 이런일에 관심을 두는 탓에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게되는 경우가 있다.


택견 송덕기에 대해서 그동안 교차검증이 일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개입으로 1983년 문화재 지정 이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해 왔다.


전,문화재위원 예용해 선생이 송덕기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한 것이 1973년이다.

사실관계까지 체크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기술 숫자가 적다? 또는 체계가 없다? 등 이유로 문화재 지정이 거절 되었다 알려져 있다.


이후, 충주에서 신한승이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했고 83년에 지정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정 과정에서 송덕기와 신한승 간 다툼이 있어 사이가 요원 해 졌다는 얘기도 있다.


송덕기는 본인 입으로 문화재 지정때 문화재관리국 그때는 문화재청이 아니고 무형문화재를 담당하는 부서가 문화재관리국 2과 였나보다.

거기를 송덕기가 가서 신한승이 정리한 택견에 대해서 이의를 했다고도 한다.


이때가 1983년까지의 송덕기 대략적 행보다.




송덕기가 머리말에서 택견의 전부를 공개 했다며 발차기 기술로 수록 된 것중 하나다.


태권도를 예로 들때 옆차기후 찬 발 놓고 뒤돌려차기(필자는 이걸 회축이라고 사범시절 지도했던 기억이 있다)


(송덕기 의혹(1))83년 당수도(태권도,가라테도) 옆차기&뒤후리기 택견 발차기 주장, 이후 확인 어렵다. 73년~ 83년까지 택견 기술, 체계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 했을듯

송덕기의 배대뒤치기?

 

예용해가 조사했던 송덕기 기술중 무르팍치기,라는 것은 일본의 대표적 무도인 유도의 배대뒤치기와 동일한거다.


 

 

유도 배대뒤치기


 (송덕기 의혹(2))73년 일본 유도 배대뒤치기 택견 기술 주장, 보고서 수록 후 83년 책에서 빠진 이유? 택견 기술,체계 문화재 지정 과정에 적극적 역할 했을듯



예용해 조사 1973년 송덕기 기본기술 중 무르팍치기(송덕기 본인으로부터는 행방불명 됐다)

 

송덕기 증언무르팍치기=相對方이 쳐서 들어오면 손으로 그 발뒤꿉을 다른 한손으로는 옷을 맞붙잡아 뒤로 넘어지면서 발로 늦은배(下腹部)를 괴고는 받아 넘긴다.

*그러나 이 무르팍치기는 이후 송덕기로부터 확인이 되지 않는다.

 

83년 박종관 저 책에도 수록되지 않았고 1990년 이용복 회장 책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2000년대 김정윤 선생 책 태견(요약본)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기본기술이라며 문화재관리국에 보고 됐던 기술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게다.


택견 경기 승패 관련 무르팍치기의 이질적 성격

 

송덕기 증언땅에 먼저 손을 짚으면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송덕기가 택견 기술이라 한것이 실제는 쥬도 배대뒤치기라는게 설득력이 있는데 송덕기가 증언한 경기 승패가 땅에 손을 짚으면 패한다!이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 땅바닥에 벌러덩 누우면서(이미 경기에서 패했다거는 기술이란 연구자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전통 택견이 아닌 일본 무도 기술로 본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 해 왔던 송덕기 기술중 상당히 많은 것이 추가되고 은근슬쩍 사라지기도 하고 하는 과정은

별개로 치고라도 일본 무도 기술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송덕기 의혹(3))일본 야와라 비전기술 5가지 송덕기 시연? 1983년 택견 전체 공개했다하고도 재차 택견 남기려해 출판 준비 증언, 일본 무도 접목 의심스러워!

그런데 필자가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3년 예용해 선생에게 송덕기 본인이 증언하고 채집 된 송덕기가 택견을 배우던 당시 상황, 배운 경위 및 동작,기술들과 달리

시기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은 구별된다.


송덕기는 예용해에게 스승한테 조목조목 배우질 못해서 안타까워 한다! 고 했다 보고서에 적시 되어 있는데

그것과 사뭇 다른 부분들이 확인된다는게다.


문화재 지정 후 1983년 박종관 씨가 서림문화사에서 출판한 택견 책은 박종관 씨가 정리자로 되어 있다.

즉, 책 내용을 이루는 동작,기술 관련 송덕기가 주도적 위치에서 정리되고 사진 촬영 및 출판이 됐다는것을 알 수 있다.


박종관 씨는 당시 택견 책 출판 관련 고령의 송덕기에게 택견을 배웠다고 하며 그런 까닭으로 송덕기에게 택견 동작,기술을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주도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된다.


송덕기가 시연하고 박종관 씨가 정리한 택견 동작, 기술들을 수록 한 택견 책은 지금도 확인이 가능하다.


필자가 첫번째 의구심이 들게 된 이유가 있다.


1973년 예용해 선생에게 조목조목 배우질 못해서 안타까워 한다! 며 11가지 택견 기술이라는걸 증언 했는데

예용해 선생 얘기로는 (보고서에 적시되어 있다)


송덕기가 택견은 총 20종류의 기술이 잇다고 한다.

그것도 좌,우로 나누어 그러니 10가지 정도 기술이 송덕기로부터 채집 되었으며 예용해가 아쉽게 생각하며 보고서에

택견에 이보다는 더 많은 기술들이 있었을것 같은데 지금은 알 도리가 없다고 했다.


여기 까지는 자연 스럽다.


민속적인 것을 찾아 다니고 또, 정리도 해 본 필자 경험으로도 지적할 것이 딱히 있지는 않다.


그 뒤 10년 기간이 지났을 무렵, 즉 문화재로 지정 되고 공개 된 송덕기의 택견 기술들은 앞서 살펴 본 예용해와의 증언, 채집, 문화재관리국 보고서 등과는

천양지차로 차이가 크다는거다.


예용해가 택견에서 손만 쓰는 단 한가지 수! 가 칼잽이라고 보고서에 적시했다.

이는 예용해 독단적으로 자기 마음데로 택견에 손 기술이 몇가지나 있는지도 모르는 예용해 입장에 확신을 가지고 쓸 수 있는게 아니란게다.


송덕기를 인터뷰 하고 보고서를 쓰면서 단 한가지 수! 라는 언급을 문화재관리국에 내는 공적 보고서에 확신에 차서 쓸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 10년 기간이 지나며 과연 송덕기의 택견 기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83년에도 송덕기가 택견은 총 20가지 기술이 있다.

예용해 선생 얘기데로 좌,우 나누어 그러니 10여가지 수가 있다 했다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게다.


박종관 저 택견 책에는 예용해가 확신에 차서 손만 쓰는건 칼잽이 단 한가지가 있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26가지 정도로 대폭 가짓수가 늘어 나 있다.


두번째는 합기도 최용술의 제자로써 한풀을 하시는 김정윤 선생과의 만남 관련이다.


필자도 김정윤 선생이 태견 책을 출판 한 이후 세검정 김정윤 선생 사무실겸 도장에서 뵌 적이 있다.

그때 김정윤 선생은 데코이, 야와라 얘기를 하셨었다.

그때는 김정윤 선생의 개인적 의견이라 여기고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이번의 기회에 다시금 김정윤 선생의 태견 책(요약본임)을 살펴보니


송덕기와 김정윤 두사람이 만난 것이 1985년이라 책에 적혀 있고 2년 기간동안 만남이 이어졌다고 했다.

이는 사실관계로 이해된다.


문제는 택견 관련 송덕기가 시연한 동작, 기술들에 있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 보고서 작성때 송덕기 본인 입으로 택견은 총 20가지 기술이 있다 했고 조사자 예용해는 그것도 좌우 나누어 그런거다며

송덕기로부터 채집 된 기술들을 별항에 정리해서 기록했다.


1973년 예용해 조사 이후 문화재 지정이 거절 되고 신한승이 충주에서 택견 도장을 하면서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 체계를 세운다고 태권도 단급에 해당하는 동과 째를 만들고

(위계제도), 품세에 해당하는 본때 8마당을 만드는 등 관련된 것을 해 가고 있을때


송덕기는 서울에서 1973년 예용해에게 증언한 택견 총 20가지 (실제로는 10가지) 기술을 올 곧게 보존하고만 있었을까? 아니면

송덕기 본인 스스로도 문화재 등재를 위해서 주도적 위치에서 기존의 조사 된 택견 기술 숫자_기술 숫자가 적다!는것이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입장 이었다고 한다

(단언이 아니며 팩트 체크 될 것임)

체계가 없다고 하는것이 예용해 조사 이후 문화재 등재가 보류, 즉 거절 된 것이라고도 한다(이도 아직까지는 단언하는것이 아니다)


???????????????


택견 문화재 지정이 1983년이다.

박종관씨 택견 책 출판도 1983년이다.


1973년 총 20가지 기술로 실제는 그 반수 즉 10여가지 기술에 지나지 않았던 송덕기의 택견이라 주장했던 기술들 숫자가 늘어나도 너무 큰 차이로 늘어나 있다.


흡사, 민속놀이가 아닌 일본식 무도처럼 기술의 숫자 외에도 전체적인 체계가 갖춰져 있다는게다.


또한, 박종관씨 책 이후 2년후인 1985년 김정윤을 만나고 2년 기간동안 교제를 하면서 증언하고 시연한 기술,동작들은 합기도 도주 최용술의 수제자로도 알려져 있는

전,기도회 김정윤 선생이 책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일본의 야와라 비전 기술 5가지를 송덕기가 알고 있었다.


그것을 그데로 보존하고 있었다.


물주, 심주,라는 용어를 송덕기가 일러 줬다.


또,,,

또,,,


필자는 가설로 송덕기가 1973년 문화재 등재 관련 문화재관리국 등 얘기를 접하고 신한승과 함께 또는 송덕기 혼자서 주도적으로 부족한 택견 기술을 보충하고 체계를 세우려

했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세워본다.


필자가 야박하게 1973년 조사된 것만이 다이다! 라는 것은 아니다.


조사에서 누락 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정도이고 이해 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게다.


송덕기가 택견 기술이라고 증언한 무르팍치기(일본 유도의 배대뒤치기와 거의 동일한것임)를 어떤 연유로 박종관 책 저술때는 택견 기술이라고 포함 시키지 않았는지

(충주 신한승 계통에서는 이 배대뒤치기를 홈페이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김정윤과의 만남 관련 김정윤 선생이 필자에게(또 한분의 동석자가 있었다. 태권도 국제사범으로 미국 거주, 실명 략)

송덕기가 김정윤에게 택견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한다.


???

앞 서 서림문화사에서 책을 출판 했다.

그건 남긴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때 미처 수록하지 못했던 기술들이 또 있었다는 얘긴가?


1973년에 얘기하지 못했던 것이

1983년 책에 대폭 늘어나 출판까지 됐고

또, 남기지 못한것이 있어 재차 책 출판을 요청할 만큼


송덕기가 일본 순사가 오면 다같이 모여서 택견 한다다가 도망 갔다가 다시 와서 잔디밭이나, 개천 사장에서 하던 그 택견에?


그래서 김정윤 선생이 촬영을 준비 했는데 그때 김정윤 선생이 다른 책 출판을 위해서 원고 집필 등을 하고 있던 차였다고도 했다.


그리고 송덕기 모델로 태견 책에 수록되어 있는 송덕기 동작, 기술들이 촬영되었고 오랜 기간이 지나고 출판됐다.


이 태견 책에 수록되어 있는 송덕기는 1973년의 예용해가 만났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 이었을까?

스승에게 조목조목 배우질 못해서 안타깝다고 했다던?

순사(일본 경찰)가 오면 여러 사람이 택견을 하다가 우르르 도망 갔다가 다시 모여서 일본식 도장 문화, 단체나 조직과 무관하게

민간에서 민속놀이이기도 했던 택견을 했다는 그 송덕기와 같은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송덕기가 머리말에서 박종관 씨에게 택견을 전해 주었고 (중략) 오늘에 와서 택견의 전부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 이 머리말은 누가 그냥 송덕기 이름 가져다 임의로 쓴 것인가?

아니면 송덕기는 택견의 전부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했는데


뒤에 생각 해 보니 전부가 아니고 또 남아 있네? 였다는 것인가?


의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1973년 예용해 조사- 실제 10가지 기술이 있다 증언(이건 국가기관인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 나온 조사위원에게 했던 얘기다)


1983년 박종관 정리 책- 손기술만 단한가지 있다던 칼잽이 외에도 수십가지가 늘어 났다(전부를 공개 했다고 했다!)


1985년~87년까지 김정윤과 책 출판을 위해서 만남-(남기고 싶다고 했다 김정윤 선생 증언이 있음)

일본 야와라 비전기술 5가지를 알고 있고 그 외에도?


전통무예 연구자를 자처하는 필자 입장에 송덕기의 기간 별 행보와 그 결과물은 추적을 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 되어 왓던 송덕기 택견 관련 자료화의 필요가 있다.

부언해서 그동안 교차검증이 될 수 없었던(기존의 택견 관련 송덕기 한사람의 증언과 시연에 한정되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송덕기 택견에 대해서 북한 민속학자 계정희 교수가 1965년 북한 고고민속에 발표한 북한 개성지역에서 발굴한 택견과 비교해서 송덕기 증언에 대해서 뒷받침이 되고 있다.


(글 내용은 보충 예정이며 문장 등 수정 됩니다)


비공감 0
이전글   /   다음글
목록

의견쓰기 (익명보장)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
  • 한산 이정우

    일제 35년 5개월을 거치면서 한국의 모든 문화는 오염되었다.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문화는 음악밖에 없다. 음악은 우리나라 박자가 3분박인데 비해서 다른나라 음악은 2분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박자라서 개입하여 오염할 근거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음악만 오염되지 않고 나머지 모든 문화가 일제의 영향을 받고 오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무엇인지 몰랐던 해방후 세대들에 의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형식 방법론들이 일제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절대선인양 결정을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이가 들어서 우연히 우리 국궁을 배웠는데 활선생이 자기가 국궁이라고 알고 나에게 가르쳐 준 활쏘는 방식은 1991년 대한궁도협회내 양궁을하던 사람들이 활만 국궁활로 바꾸어 잡고 양궁식으로 쏘았던 활쏘기를 국궁이라고 알고 가르쳐 주었다. 한참을 엉터리 활을 쏘다가 의심이 들어서 옛 문헌을 찾아서 비교해 보니 국궁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활을 국궁이라 금과옥조같이 여기고 가르쳐 주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배우는 사람들은 선생말을 철떡같이 믿고 엉터리 활쏘기를 국궁이라 알고 세상에 확대재생산하며 전파하고 큰 세력으로 자리매김해서 부동의 엉터리 활쏘기 국궁판이 만들어 진 것이었다.
    박정희가 올림픽 금메달이 탐이나서 학교체육에 양궁을 도입해서 양궁선수들을 대량으로 육성했는데, 양궁판이라는 것이 올림픽 출전하는 랭킹 1. 2. 3등 세사람이 필요하고 같이 경쟁해줄 몇몇이 필요한 상황인데 몇만명을 양성해 놓으니 그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국궁판으로 몰려들어서 활만 국궁활로 바꾸어 잡고 양궁방식을 차용해서 쏘기 시작했고, 그것이 국궁판에서 과녁을 맞추는데 효과를 얻자 기존의 국궁기법들을 무시하면서 자기들 세계로 놀았다.
    세월이 흘러 1983년 대한궁도협회내 양궁분과로 있던 양궁이 양궁협회로 떨어져 나가면서 양궁 엘리트들은 양궁협회로 분리되어 나갔지만, 양궁의 루저들은 양궁협회로 따라가지 못하고 대한궁도협회에서 실무를 보고 남았다. 십수년이 지나자 국궁판에서 윗대 어른들이 활을 접고 은퇴하자 양궁으로 뼈가 굵은 사람들이 대한궁도협회 실세가 되고 자기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양궁식으로 쏘는 국궁교본을 만들어 각 활터의 국궁지도자(활선생>에게 보급하고 가르쳐서 대한민국의 국궁판이 일시에 양궁식 활쏘기로 바뀌어 버린 것이고, 이때가 1991년경으로 알고 있다. 그 이후 양궁식으로 쏘는 활쏘기를 배운 활선생에게 필자가 국궁이라고 엉터리 활쏘기를 배운 것이고, 우리의 전통국궁에 대한 의문을 가졌던 필자가 옛 사법서 문헌을 전부 찾아내어 모든 동작을 하나 하나 비교하면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고 바로잡은것이 조선시대 특급무장 조선무과급제자들이 쏘는 방식(궁체)가 조선철전사법 별절궁체인 것이다.
    철전사법 유튜브 올린 동영상 모음
    https://www.youtube.com/watch?v=_vRkUfRt4fE
    https://www.youtube.com/watch?v=dxJ1lwtJUVU
    https://www.youtube.com/watch?v=MSLqHuQRX4g
    https://www.youtube.com/watch?v=Yj4nRNYO6eI&t=42s
    https://www.youtube.com/watch?v=1gcfG14yu1k&t=61s

    https://cafe.daum.net/BosaengBowThimble/jvYl/22 前手撇而後手絶별절 規正규정 – 별절을 正意정의하다.
    https://cafe.daum.net/BosaengBowThimble/jvYl/9 前手撇而後手絶전수별이후수절에 대한 제 사법서 내용 분석
    https://cafe.daum.net/BosaengBowThimble/91LA/13 책 「조선의 궁술」, 射藝訣解, 正射論, 射訣, 禮記 射儀 각 사법서 사론 사법 궁체 비교검토

    활과 택견이 전혀 다른 무술체계라서 상관없는 내용이겠지만, 엉터리가 주인노릇 하고 있는 현 상황이 동병상련이라서 글을 올립니다.

    2024-07-06 수정 삭제 신고

    의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