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습놀이와 무예경연대회: 바뀐 주인 되찾아야

2010-09-30 / 조회수 : 2,820 신고
대사습?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뭐지?

일반인이라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겠다. 대사습놀이가 벌어지는 전주 출신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아도 거기서 장원하면 명창이 된다느니 정도에 그치고, 막상 대사습의 뜻이나 유래를 따지고 들면 제대로 답을 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현재 대사습놀이에서 겨루어지는 종목은 농악, 무용, 기악, 시조, 민요, 가야금병창, 판소리, 궁도, 판소리명창 등 아홉가지다. 그런데 여기에 왜 궁도가 끼어 있을까? 국악인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등용문이자 축제의 장으로 알려진 대사습놀이가 원래 무예경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대사습의 유일한 종목은 조선 중기 마상궁술로 시작되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경기였다. 조선 후기 철종 때 판소리가 추가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국악 위주의 경연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궁도가 있는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주객 전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아홉 종목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궁도, 판소리, 농악(풍물놀이)의 순서이고, 이 모두 무예경연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나머지는 모두 풍류에 속한다.

총기가 나오기 전 한국의 무예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활이었다. 당연히 활쏘기는 군사훈련에서 빠지지 않는 종목이었고, 훈련에서 정식으로 쏘기 전에 연습으로 쏘아보는 일을 사습(私習)이라 하였다. 사습은 군사훈련을 통칭하게 되었고, 대규모의 훈련은 대사습(大私習)이라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대사습 군사훈련은 위험한 반란이 된다는 우려에서 중단되었다가 세종대왕 때에 궁원에서 왕명으로 다시 실시되었다. 신하의 반대가 대단했으나 세종은 병조에 명하여 진도(陣圖-군부대의 모양을 그린 그림)를 연습시켜 다음해 봄의 군대사열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 군사훈련의 주종목은 군사진법, 말타기, 활쏘기였다.

‘만기요람’에 보면 사습(私習)이 1625년(인조3년)부터 정례화 된 것으로 보인다. 매월 2회 교관이 지방군을 거느리고 진법, 궁술, 총술에 대한 사습을 실시했고, 진법을 익힐 때는 가짜 왜군을 편성하여 교전하게 하기도 했다. 월말에는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사습을 실시했다. 사습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무명 1필, 꼴찌에게는 곤장을 때렸다. 지방군은 10월부터 2월까지 궁술과 총술의 사습을 실시하여 성적을 보고하고, 나머지 달은 농사철이기 때문에 실시하지 않았다. 지방의 젊은이들은 농한기인 겨울에만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무예훈련인 사습이 예인들과 만나게 된 것은 1732년(영조8년) 지방 재인청과 가무 대사습청의 설치되면서부터다. 전주에 4군자정이 신축되고 대사습대회가 최초로 전주에서 베풀어진 뒤 연례행사가 되었다. 영조는 대사습대회에서 선발된 권삼득, 신재호, 송만갑 등 15명의 광대에게 의관, 통정, 감찰, 오위장, 참봉, 선달 등의 벼슬을 직접 제수하고 명창 칭호를 하사하였다. 사람들은 권삼득, 신재호 등에 대하여 다만 판소리의 최초 명인으로만 기억하고 있으나, 이들이 부여받았던 벼슬이 대체로 무관직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덕택에 문자를 잘 모르는 무인들은 적벽가와 같은 판소리 사설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병법을 익힐 수 있었다. 21세기의 무인들에게 죄송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무인은 대체로 무식한 천민 출신이 많았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문인에 비하여 한국 역사에 공헌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필자는 문인이지만 말과 글보다 행위와 실천으로 보여준 무인을 더 흠모하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적벽가는 조선 후기 군대훈련의 백과사전이라고 할만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가 공격받는 장면을 보면 당시 가능한 무기와 깃발이 다 나온다. 청도기, 순시기, 영기, 오방기, 고초기, 표미기 등은 모두 조선 후기 군대의 신호용 깃발이며, 그 뿌리는 명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중간 구절에 나오는 조총은 1500년대에 출현한 무기이고, 편전은 조선만의 특수한 화살이니 판소리는 조선 후기 군사훈련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적벽가는 우렁찬 장군의 호령이므로 이 소리를 제대로 냈던 사람은 군사훈련 사령관을 대신한 전령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적벽가는 권력을 놓고 다투는 내용이 많아서 예로부터 양반 귀족들이 즐겨 들었다고 한다. 수많은 군대와 장수들이 등장하여 군사훈련과 전투를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빠른 장단에 호령조를 많이 사용하는 가장 남성적인 판소리이다. 전통적으로 충의(忠義)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에 의해 전쟁에 내몰린 민중의 한이 풍자를 통해 표현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반전사상을 담고 있다. 적벽가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군사설움이라고 한다. 적벽대전을 앞둔 전날 밤에 조조의 군사들이 제각기 고향의 부모 처자를 그리워하는 등 애틋한 사연을 늘어놓는 사설이다. 이는 원전에 없고, 부르는 사람들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넣은 것이다. 원전인 삼국지연의는 영웅들의 쟁패인 만큼 보통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벽가는 이름없는 병사들을 다수 등장시켜 그들의 사연을 토로하게 한다. 또, 조조는 최고의 전략가가 아니라 작은 것에도 쉽게 놀라며, 겁이 많고 엄살이 심한 인물로 묘사된다. 정욱은 상전인 조조를 조롱하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적벽가는 외국 문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원래 영웅 서사시였던 것을 민중의 노래로 새롭게 만든 좋은 사례이다.

한편, 군사훈련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홍보가에도 진법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진법이란 북소리나 깃발의 색깔로 부대가 나아갈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박 속에서 나온 병사들이 ‘병학지남’ 방식의 행군 구령법을 사용했다. 병학지남은 정조대왕이 명나라의 병법을 조선에 맞게 간추려 편찬한 대표적인 군사교범이다. 놀부를 응징하기 위해 박속에서 쏟아져 나온 무사들이 조선 후기의 훈련체계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행군시 장애물을 발견했을 때 신호법을 설명한 대목에는, 나무가 울창하면 청기를 올리고, 습지가 있으면 흑기를 올리고, 적군이 발견되면 백기를 올리고, 지형이 험하면 황기를 올리고, 연기나 불이 보이면 홍기를 올리라고 하는데, 이는 병학지남의 신호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뒤이어 나오는 행군대형도 조선 후기 군사훈련의 모습과 똑 같다.

전쟁에서 병사들이 들고 나감을 신호하는 데는 여러 악기와 깃발이 동원되지만 이 가운데 필수적인 악기는 북이었다. 용고를 비롯하여 행진이나 진법에 쓰는 북은 가죽을 여러 개의 못으로 박아 단조롭지만 단단하고 힘 있는 소리를 내는 반면에 농악 같은 풍물놀이에서 쓰는 일반 북은 여러 개의 끈을 늘이거나 조여 음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고저장단의 변주가 심한 판소리 반주에 군대용 북을 쓰며, 진도 북춤에도 원래는군대용 북을 썼다. 둘 다 놀이보다 군사훈련이나 전쟁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수도이기도 했던 진도는 오래 전부터 서남해안의 관문이면서 군사 요충지여서 군사 진법에 풍물굿을 가미한 걸군악(乞軍樂)이 발달했다. 여기서도 기본은 북이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북춤이 진도북춤을 빼 닮은 이유는 무엇일까? 군대용 북을 어깨에 둘러매고 치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가 치더라도 매우 남성적이고 역동적이며 전투적이다. 전통축제인 에이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 북춤의 유래는 진도-오키나와의 연결고리였던 삼별초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진법은 농악(풍물놀이)에도 반영되었다. 농악은 농사를 위주로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파종과 추수를 축복하는 페스티벌에 군사훈련 체제가 반영된 놀이문화이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지방군은 주로 겨울철 농한기에만 군사훈련을 받고 나머지 기간은 농사를 지었다. 평소에는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배운 진법이 민간의 단체 놀이에 적용되었는데, 농악에서 진(陣)을 말한다. 이는 원래 군사용어로 전쟁에서 양측 군대가 전투를 앞둔 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락에 따라 진풀이를 펼쳐 가며 판을 진행하는데, 원진, 방울진, 미지기진, 오방진 등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지금도 농악대나 풍물놀이패는 옛날 군인 복장을 하고 있다. 우두머리인 상쇠는 옛날 무관과 마찬가지로 전립을 쓴다. 진법에서 신호체계는 호령, 음악, 깃발이므로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와 같은 악기와 여러 깃발이 동원된다, 특히 전라좌도 농악은 지금도 오락보다 군사훈련의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무주, 진안, 장수, 임실, 순창, 남원, 곡성, 화순, 여수에 이르는 전라좌도는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잇대고 있어서 적이 침입하는 길목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긴 군사적 요충지였고, 동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농민군과 의병들의 근거가 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 삼별초군의 군악은 진도와 오키나와에서 북놀이로 전승된다.

이처럼 판소리는 지방의 군사훈련에서 병법을 강연할 때 쓰였다. 병서를 인쇄하여 골고루 나누어줄 형편이 되지 않기도 했지만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전투경험과 병법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우렁찬 장수의 목소리를 익혀야 했고, 이들은 후일 이 분야의 전문적인 예인이 되었다. 판소리에 사용된 유일한 악기는 북이었는데, 지금도 풍물북이 아니라 군용북을 쓴다. 판소리가 군사훈련과 관계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풍물에 쓰는 북은 줄을 잡아당겨 음정을 조절할 수 있지만, 판소리 북은 못을 박아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음정을 조절할 수 없다. 지금도 옛날 군대에서 사용하던 북을 쓴다.

이처럼 판소리는 민중을 기반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점 양반들이 주요한 청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헌종, 철종, 고종 때는 판소리 광대들이 임금 앞에서 사설을 했고, 흥선대원군은 단오절에 관의 주관으로 판소리 경창대회를 열도록 하고 장원한 명창을 궁궐에 불러들였다. 판소리 광대들은 명예직이나마 벼슬을 얻고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양반이 판소리의 애호가가 되면서 판소리 사설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거칠지만 건강한 민중의식 대신에 양반의 고상한 미의식과 중세적인 질서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개작이 진행된 것이다. 쉬운 언어로 민중의 삶과 욕망을 반영하면서 변혁을 지향하던 판소리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수많은 고사성어와 한문투의 사설이 등장했고, 소리에서도 고도의 기교가 거듭되면서 서민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는 고급예술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판소리가 구미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1962년 여름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한 알란 헤이만은 동아일보 1962년 4월 10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판소리가 한민족이 이룬 빛나는 예술이면서도 서구에 소개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해 여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참가하여 구미사회에 데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런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판소리는 200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1989년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앞에 세워진 전주대사습사적비에 “전주대사습놀이는 숙종대의 마상궁술대회, 영조대의 통인물놀이, 철종후기의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놀이를 종합하여 이를 대사습놀이라 했다.”고 하여 대사습이 무예의 경연에서 기원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물놀이란 단순히 물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편을 갈라 싸우는 경기를 말한다.

이처럼 대사습놀이는 숙종(재위 1674-1720) 때 마상궁술 시합에서 최고수를 가리는 대회로 시작되었고, 철종(재위 1849-1863) 때 판소리 경연이 추가되었다. 조선시대에 전주의 전라감영 자리에서 실시되던 무예의 경진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1975년에 부활되었다. 지금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한국음악의 전분야로 확대되어 매년 열리며 명실상부한 국악인의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그러나 전주대사습이 원래 무예(마상궁술), 병법강연(판소리). 진법(농악)과 같이 무예의 경연으로 출발한 취지를 되살려 태권도와 같은 전통무예를 종목으로 추가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최소한 궁도 종목에는 마상궁술이 있어야 당연하고, 십팔기는 물론이다.

세계문화유산이면서도 한국사람도 잘 모르는 판소리, 국악인들끼리의 잔치가 되고 만 대사습놀이, 문화(무예)는 없고 경기만 있는 세계문화 브랜드 태권도, 문화가 있어도 체계가 없는 전통무예... 이 네 가지를 동시에 한 마당에서 살리고 꽃피울 수 있는 방법을 이 글에서 파악하고 액션에 옮길 수 있는 지도자가 이 땅에 나온다면, 그 분은 최근 리더쉽의 영웅으로 떠오른 최덕주 감독이나 박칼린 감독에 결코 못지 않은 존경을 전 세계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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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inatkd

    大射習戱로 알았는데...大私習이었군요.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능속에는 겨룸과 승리에 대한 본능은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거의 모든 사회.문화행위의 기저에는 武가 기초적으로 숨어있거나 버무려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옛 선비문인들도 사실상 무재가 뛰어나 문무를 겸한 인재가 대부분이었다고 생각됩니다.다만 무의 영역이 1차적이라면 문은 2차 3차영역으로 확장의 폭이 크고 넓다보니 난세나 전시에나 돋보이는 무인기상보다는 평상시나 상시 사회를 리딩하는 지도자상인 문인상이 더 도드라져 보였을 뿐이라고 말입니다.무의 본질적 기질위로 문의 당의정이 입혀진 모습이 사실상 인간사회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문약하거나 무방한 사회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있다고 봅니다.무문이 갖춰지고 균형을 이룰때 올곧고 반칙에도 이기며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제 어릴적만 하더라도 틈만나면..심지어 가을 성묘나 묘사를 지낼 때에도 산속묘지의 넓은 잔디밭에서 어른들이 지켜보며 추임새를 주는 가운데 집안 아이들끼리 다양한 무술놀이와 시합을 즐겼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좋은 글 즐감하였습니다.

    2010-09-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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