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에 세계 최초의 태권도학과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0-09-23 / 조회수 : 3,417 신고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군이 해체되면서 ‘무예도보통지’를 교재로 십팔기(또는 이십사기)를 중단 없이 수련하던 해산군인들은 즉시 의병이 되어 일제에 저항하다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맥은 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전승되었다.

조선 의병이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었을 때, 태권도와 관련하여 주목할 기관은 1919년 독립군에 의해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이다. 이 학교의 전신은 한일합방이 되기 직전인 1896년 고종 왕에 의하여 설립되어 1909년까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장교를 양성하여 운영되었던 왕립 무관학교였다. 김좌진(1889-1930) 장군을 비롯하여 4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던 이 무관학교가 일제에 의하여 폐쇄된 후 만주로 이동하여 신흥무관학교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독립군의 양성소였던 신흥무관학교는 왕립 무관학교의 교육내용을 그대로 따랐고, 이세영,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등 교관의 상당수가 왕립 무관학교의 졸업생들로 구성되었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던 원병상의 회고록을 보면, “학과로는 주로 보(步-보병), 기(騎-기병), 포(砲-포병), 공(工-공병), 치(輜-수송병)의 각 조전과 내무령, 측도학, 훈련교범, 위수복무령, 육군징벌령, 육군형법, 구급의료, 총검술, 유술, 격검, 전략, 전술, 축성학, 편제학 등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신흥무관학교의 정규과정으로 유술(柔術)과 격검(擊劍)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유술과 격검을 가르쳤던 교관으로 이극(1888-1919)이 있는데,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그는 함경남도 북청 사람으로 1911년 3월에 서울 오성학교를 졸업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특기반 제1기로 졸업하였다. 1913년에 신흥무관학교의 격검・유술교관으로서 학생들의 전투력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여기서, 유술을 곧 유도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대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자산(1886-1946)은 ‘조선무사영웅전’에서 유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유술의 시초는 고려 중기 때부터이다. 이를 수박 혹은 권법이라 하였으며, 왕이 상춘정이나 마암 등지에 항상 거동하여 수박희를 전문으로 개설하였다. 정중부 같은 이는 이 기술로써 유흥의 일과로 삼는 동시에 군인의 상예(常藝)로 행하였다. 씨름은 오직 육박(肉搏)으로 각투(角鬪)에 불과한 것이요, 유술은 인체 근육의 혈맥을 박동하여 죽이기도 하고 어지럽게도 하며 또는 벙어리가 되게도 하는 삼법(三法)이 있어 학술적으로 된 것이다.”

안자산의 분류에 의하면 유술은 급소를 쳐서 죽이기도 하고 불구자도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술이다. 그것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밝히고 있는데, 이 학술의 근거는 ‘무예도보통지’를 이른다.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이 이런 살상용 무술을 익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이 유술이 근대 유도가 아니라 고려 수박과 조선 권법을 계승한 전통태권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유도는 한일합방이 된 후에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안자산은 일제 치하에서 한국 무예를 통칭하여 체육이라고 사용한 사례가 있다. 그는 1930년 4월 4일 동아일보를 통하여 ‘기절장절하던 조선 고대의 체육’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친 칼럼을 연재하였는데, 유술(柔術), 격검(擊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등을 조선의 대표적인 전통체육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래로 이 유술이 권박(券搏)이라 하기도 하고 각저(角抵), 상박(相撲) 등의 뒤섞인 명칭으로 불렸으나 후일에는 기술의 발달로 씨름과는 다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유술이 “고려시대에 25세(勢)의 기술로 행하여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한교가 이를 부활시켜 교육을 시켰으며 과목이 되었고, 그 후 이 법이 일본에 전하여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내용에서 한교(1566-1627)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출신으로 훈련도감 낭청이 되어 명나라의 무예서인 ‘기효신서’를 주해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내용이 신문지상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밝혀졌던 점이 매우 주목된다. 특히 안자산은 이 기사의 삽화로 두 무인이 맨손으로 겨루는 장면을 싣고 곁에다 고대유술(古代柔術)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이 그림은 ‘무예도보통지’ 권법보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도 지식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무예도보통지’의 존재와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유술이라는 말이 일본의 전통적인 무술이라거나 유도의 원형으로만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제 강점기에 일간지를 통하여 유술이 한국 전통무예를 일컫는 용어로 쓰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그는 이 후에도 1939년 11월 ‘문장’지, 1942년 1월 ‘반도사회와 향토 만주’, 1942년 1월 조선일보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조선 무예에 관한 기사를 발표한다.

해방 후에 황기는 ‘수박도대감’ 제6장 무도의 발달사에서 유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도수공권법(徒手空拳法)이 모든 무도의 선조가 되어 자연적이고, 자유롭고 구곡이 없이 차차로 발전한 것이 오늘날의 당수(唐手) 혹은 권법(拳法)이라 함이요, 또 이 도수공권법을 기초로 하여 유술(柔術)이 나오고 보니 이 유술이 일상생활하기에는 위험천만이므로 이로 체육 향상화하여 일본에서 발전한 것이 곧 오늘날의 유도(柔道)이며, 한편 꺾고 비트는 기법을 따서 안출하여 낸 것이 합기술(合氣術)이다.”

한일합방 직전만 하더라도 유술이 조선의 무예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음은 당시의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제에 의해 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난 이듬해인 1908년, 황성신문은 왕립 무관학교에 체육부가 설립될 예정이며 유술이 그 종목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관학교 교장 이두희와 학무국장 윤치오 양씨가 발기하여 교육계 청년들과 일반 국민의 체육을 발전하기 위하여 체육부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여, 위치는 군인구락부로 하고 의친왕 전하께서 설비한 기기들을 사용하기로 협정하였다는데, 체육에 관한 조항은 활쏘기, 말타기, 유술, 격검 등이더라.”

여기서 체육(무술)을 장려한 의친왕(1877-1955)은 고종의 다섯 번 째 아들을 말한다. 여러 해 동안 외국의 여러 나라의 문물을 접하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여 만주로 갔다가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고, 폐인 행세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위 기사를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군부에서는 채택되지 않고 있던 유술이 한국에서 군사교육의 종목으로 채택되고 있었으며, 이 유술은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기원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 있던 이 무관학교는 다음 해인 1909년 일제에 의하여 폐지되고, 유술을 비롯한 조선무술은 만주로 이동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동안 계몽주의적 지식인들은 조선의 숭문(崇文)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판단했기에 상무(尙武)를 강조했고 따라서 젊은이들이 체육을 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체육엔 민족의 한과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대한체육회장도 윤치호, 신흥우, 여운형, 신익희, 조병옥에 이르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맡았다. 1896년 독립신문은 우리 학생들의 축구 실력이 일본 학생보다 백배 낫기 때문에 ‘조선이 암만 하여도 나라가 되겠다’고 썼고, 1920년 ‘개벽’은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기사에서 야구, 정구도 좋지만 축구를 해야 다리가 길어지고 튼튼해져서 민족적 신체 결함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신채호는 한국 청년의 나약함은 유교 교육이 체육을 배제한 결과라며 대한매일신보에 ‘덕․지․체 삼육에 체육이 최급’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09년 YMCA에 유술부가 창설될 때 이상재는 장사 100명만 양성하면 나라에 대하여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멀리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는 10년간 3천5백여 명의 엘리트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주역이었던 것은 물론 친일파를 처단한 의열단, 독립군, 광복군의 주축이 되었다.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이 탄생한다. 사격술과 권술에 능한 자로 구성된 단원들은 깔끔한 신사 복장을 하고 절도 있는 행동을 하는 국제신사로 교육을 받았다. 역사에는 권술로 기록되었지만, 이는 조선 권법과 같은 이름이다. 1920년 이후, 각 신문에는 놀랄만한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곳곳의 주요 경찰서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벌어지는 등 의열단의 활동은 일제에게 큰 두려움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7년,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을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하였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이 되었으며, 6 25전쟁 때 조영식(趙永植)이 이를 인수하여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이름을 바꾼다. 후일 경희대학교에 세계 최초로 태권도학과가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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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in33347

    공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계속 공부하셔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12-08-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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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in33347

    찬성입니다.

    2012-08-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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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kspain6

    세계최초로 태권도학과가 생긴학교는 대한유도학교(4년제 대학)입니다.

    2010-10-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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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skang00

    <<박종한> 님께,
    필자입니다.
    많은 공부를 이루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덩다라(덩달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얼씨구... 덩, 덩, 쿵 쿵 쿵.
    지금은 추석이니까, 신명을 내도 되겠지요?

    2010-09-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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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inatkd

    신흥무관학교는 조선말 명문가 우당 이회영선생이 집안 전재산을 정리하여 조선독립운동에 바치면서 1911년 만주땅 길림성 류하현에 설립한 민족인재육성기관이었다고 합니다.이회영선생은 인재와 무관육성을 통한 독립활동과 국제아나키스트조직을 통한 진정한 국제적 자유와 평화를 꿈꾼 이상주의 사상가이기도 하였다고 하는군요.신흥무관학교는 약3000명에 달하는 우국민족지사들을 양성하였지만 일제의 공략과 우당선생이 대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면서 1920년 문을 닫습니다만,해방후 우당의 아우 이시영선생에 의해 서울종로에서 신흥전문학교로 명맥을 다시 살리게 되었다합니다.이후 6.25 와중에 조영식박사에게 넘겨져 경희대학교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정말 좋은 자료의 발굴과 빛을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0-09-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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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skang00

    <<비공감>>님께
    여기는 공개토론 마당입니다.
    이왕 여기 오셨으니 몇 마디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2010-09-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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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kytkd

    반대입니다.

    2010-09-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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