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계승자, 송창렬옹 부고알림

2017-09-18 / 조회수 : 2,788 신고

[문화유산] 전통무예 수박 계승자, 송창렬옹 부고알림


전통무예 수박 계승자 송창렬옹(86세)께서 2017년 9월 15일 노환으로 별세, 부고를 알려 드립니다.


송창렬옹께서는 한국문화저널, 한국문화예술인총연맹, 전통무예 계승단체인 사)대한수박협회(체육,공익법인)을 창립하시는데 크게 기여를 하셨고

6.25참전(국가)유공자로써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공헌하였고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인 전통무예 수박을 유일하게 계승, 후학에 전해주려 많은 노력을 하신 분 입니다.

송창렬옹께서는 문화와 예술계 전반에 걸쳐 크고 작은 업적을 남기셨는데 그 중 대표적인 전통무예 수박을 후대에 전해주는데 개인적인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수박은 고려사에 용력절륜이라 하여 무사들의 상예이기도한 우리 민족 도수무예의 원류인 바 그 유형적 유물이 만주 집안현 고구려무덤에 벽화로 남겨져 있기도 합니다.

송창렬옹께서 이런 전통무예를 우리들에 전해주시기 위해 하신 공적활동을 몇가지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송창렬옹은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무형문화재 기능자로 신청되었고(2007년),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국고지원으로 국기원 산하 세계태권도연수원에서 연구한 태권도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결과보고서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셔 자문과 함께 시연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 무형문화유산(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신청관련 추천서 외 >>


추 천 서

금번의 문화재청에서 실시하는 예능분야 무형문화유산의 전승현황등록 신청 접수와 관련하여 향후 무형문화유산 보호정책의 기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아래와 같이 추천하고자 합니다.

1 신청인; 송창렬, 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 고문

2 신청대상; 무예부문으로서의 수박(치기)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가 고향인 위 신청인이 일제강점기하의 1940년대 초에 경기도 개성(松都)에서 전해 받은 이 수박치기는 근대 이전(1910년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조선 정조때의 재물보에 슈벽등으로 기록되기도 함) 지역적으로 특색을 가진 민속 체기, 무예로 발전, 전승되던 중 경기도 개성을 중심으로 전해지던 수박치기의 경우 그 기능자인 천일룡(생존시 105세정도가 됨)옹이 동 신청인에게 전수한 바 작금에 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에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수박치기는 그 역사성, 전통성과 학술성 및 향토적 특색을 인정할 수 있다고 사료되며 현재 그 맥이 끊어질지 알 수 없어 보존과 전승에 어려움이 많은것으로 보여 이에 추천하고자 합니다.

2007년 2월 24일

*추천인으로는 태권도 9단 곽기옥관장님과 택견 예능보유자이신 정경화선생이십니다. 곽기옥관장님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 파견 해외태권도사범으로 아프리카 가나등의 군(정글)부대,특수요원들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지도하고 협회 창립, 초대회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프랑스소재 세계태권무도아카데미 기술분과위원장등, 얼마전에 태국에서 송기영사범님 외 몇 분과 함께 연수원을 건립하시는등 태권도계에 헌신한 바가 많은 분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현장 조사 - 2008년 4월 14일

국립문화재연구소 현장 조사 - 2008년 4월 14일 오후 2시 ~ , 장소; 부산시 중구 부평동 보존회사무국, 전수관 연구관, 학예사님, 진주경상대학교 강인숙교수님(자문위원), 송창렬선생님 외


1932년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출생, 1942년 개성 일보인소학교 입학, 1943년 개성만월국민학교 전학, 1942년에서 50년까지 개성(송도)에서 부친이 운영하시던 주물공장의 십장이었던 천서방(천일룡)으로부터 수박,무당춤등 사사, 1953년 단국대학교 정치학부 2년 중퇴, 1993년 수박연구회 고문, 2000년 "아시아 위클리(전국판)"에 유일한 수박기능자로 소개, 2001년 사단법인대한수박협회고문, 국민생활체육서울시전통무예연합회 고문, 제3회 대한민국전통무예제(국립극장대극장) 수박지도, 2002년 제1회 전통무예대회 시연, 공로표창 수상(서울시 생체협회장 문일권), 세미나 주제발표에서 수박원형으로 소개(발표; 미국 아틀란타대학교수 범기철), 서일대학교 레크레이션학과 초청 수박시연, 지도, 충북진천군 배달국무연구원 논문에(송도)수박기능자로 소개(발표; 경기도검도회장 김재일), 2003년 동아일보에 "한국 내 유일한 수박보유자"로 소개, EBS 설날특집 출연(수박증언, 시연), 프랑스 소재 "세계태권무도아카데미" 김용호총재 초청 대담, 2004년 무도미디어 초청 시연, "올 어바웃 태권도" 태권도 9단 곽기옥 저, 영문판에 수박계승자로 소개, 시연사진 개제,택견예능보유자 초청 대담(충주 택견전수관), 2005년 '전통무예간담회' 공로패 수상(문화관광위원회 의원 강혜숙), 2007년 수박(무예부문)으로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지정 신청, 2008년 4월 14일 국립문화재연구소 현장조사시 증언, 시연, KNN 스포츠와이드 출연, 아리랑 TV '코리아 나우' 출연 수박증언, 시연등


<전통무예 간담회>

2005년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강혜숙의원 초청 <전통무예 간담회>, 전통무예 발전을 위한 합의 결과 중 “남북교류와 학술적 연구 활동 전개”등과 관련해서 송준호 외 4인을 실무단으로 위촉하고 동 보좌관을 참관하게 함


일시; 2005년 8월 12일 오전 11 ~ 12시

장소; 국회 125호 특별회의실

참석자; 원욱(선관무), 임동규(경당), 김재일(조선세법), 송창렬(수박), 정경화(택견), 유수남(문광위 강혜숙의원 보좌관) 외 다수


내용; 전통무예 발전에 대한 합의서 작성, 종목별 실무위원회 구성, 전국생활체육 전통무예연합회로 추진결의


전통무예의 발전을 위한 간담회 합의사항; 전통무예 남북교류를 추진한다, 전통무예 조직간의 연대, 협력을 강화한다, 2006년 충주무술축제에서 전통무예의 위상과 비중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전통무예의 학술적 연구활동을 공동전개한다.


“우리 무술의 원형 수박계승자 송창렬옹 제2회 무도대상 수상자로 선정” (1981년 1회 수상자는 고 송덕기옹 전 택견예능보유자)

무술의 원형, 우리의 고유 맨손무술인 ‘수박’ 계승자인 송창열선생이 제2회 무도대상수상자로 선정되어 2004년 12월 11일(토) 서대문구 문화 체육회관에서 열리는 제3회 국민생활체육 서울특별시 전통무예대회 식전행사에서 수상을 하게된다.


Homepage 3

수박의 계보

집필중인 송창렬옹

민간전승(民間傳承)되어 온 기예(技藝)들이 그러하듯 수박과 수박춤의 경우도 계보와 관련한 문헌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 실제 행위자로서 그 맥락을 들여다 볼 수는 있다.

송창열 선생은 청년기에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했고, 신상옥 감독께서 하시던 ‘신-필림’이란 곳에 잠시 계셨다고 한다. “최불암도 내 후배야!”라고 하시는 등 어찌됐든, 유현목 감독의 ‘순교자’란 영화에 단역목사로 나오는 등 몇 편의 출연작이 있다하시니 전직 영화배우 출신은 맞는 것 같다. 이 분의 외삼촌은 1965년 한반도의 반쪽을 눈물바다로 만든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영화를 기획했던 최현민 감독이시다.

송창렬 옹은 1932년 2월에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일본국 대판(오사까)에서 부친이 ‘오하라 미싱 가이샤’를 경영했다. 1938년에서 40년까지 오사까에서 살았다. 이후 경기도 개성군 오정문에서 부친이 주물공장을 경영하여 일본국에서 조선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 공장은 군수품 공장(포탄 껍데기 만드는)으로 징용되었다. 자택은 만월정에서 거주했다. 42년경에는 '가이조 고리쓰 고꾸민 각꼬ㅡ(일본인만 다닐 수 있는 학교였으나 부친이 경제적 능력이 있어 입학이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입학했다. 


일제강점기, 개성철도역 뒤에 위치한 공원에서 수박을 배우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일본 아이들이 ‘조센진’하고 놀리고, 때리면 조퇴를 했다. 울면서 오정문 공장에 가면 아버지께서 “왜 울면서 오느냐?”고 묻기에 “일본인 아이들이 조센진하고 때린다”고 말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래?”하면서 우리 공장 십장 천일룡이라는 사람에게 “우리 애가 일본 아이들한테 맞으니 운동 좀 가르쳐라!” 하여 수박(수박타라고도 부름)을 처음 배웠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가라테와 검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장 사장실(다다미방 이었다)에 일본도를 걸어 두셨던 것도 기억난다. 나중에 씨름은 조금 해 봤다.

한 6개월 정도 배우니 일본 애들한테 맞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일본 학교에서 사고뭉치가 됐다. 학교에서 만월정 집에 오면 일본 애들이 몰려와 다다미방에 '고다쓰'를 뒤엎고 다다미에다 오줌을 싸고 도망가기도 했다. 일본 아이들한테 맞을 때 한 동내 사는 미야꼬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내가 일본 애들한테 맞으면 대신 나서서 말리곤 했다.


공개대회에서 증언하시는 오진환 할아버지

천일룡이가 오정문 공장에서 만월정 집에 도착하면, 주로 기무라 약수터 뒤쪽 여우골이라는 장소에서 연습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그 당시는 대동아전쟁 말기라서 우리 것은 무엇이든 못하게 하던 시대였다. 이후 싸움도 좀 하게 됐고, 자심가도 생겼다. 

1944년 일본 학교에서 하도 일본 애들과 싸우니 학교에서 퇴학을 시키려했다. 이때 아버지께서 일본학교 바로 밑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만월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3학년 이후로도 꾸준히 천일룡에게 여우골, 기무라 뒷산, 개성 홍삼정 뒤뜰에서 배우고 연습했다. 내가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잡기에 소질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 때는 특별히 할 만한 게 없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서울에 사시던 故 오진환 옹(1919년생)은 2002년 돌아가셨다. 6·25전쟁 이전 개성역에 근무하셨는데, 역사(驛舍) 뒤에 위치한 ‘개성철도공원’이란 곳에서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바 있는 민관식 선생의 형(兄), 중산 민완식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2002년 12월 8일 서울 금천구에서 열린 제1회 국민생활체육 서울시전통무예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송창렬씨가 하는것은 예전에 내가 민완식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과 동일한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한 민완식 선생(사진 왼쪽)


김룡칠 선생(중국연변작가협회, 시인)의 경우 선대(先代)에 함경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셨다. 김만석 선생의 고향도 함경도라고 했으나 정확한 연세를 알지는 못하신다. 평안도(자강도)지역의 수박무(手拍舞), 전남 필봉굿(중요문화재), 경북 빛내농악(도지정문화재) 등, 이 외에 전라도 광주에도 기능자가 생존했다. 대외적으로는 송창렬옹(2007년 문화재청에 수박(무예부문) 지정신청)과 중국 거주 김학현 선생(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 고문) 두 분이 알려 져 있다.

북한의 경우는 수박의 여러 갈래 중 수박춤과 수박놀이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가 전승지역인 수박춤은 북한의 공훈예술가인 전한률 선생(1931~)께서 발굴하셨다고 한다. 1955~6년 사이에 서북부지방의 민속무용인 손벽춤(수박춤)을 발굴했다. 

1956년 8월 전국전문예술단체 축전에서 특등상을 받고 모스크바에서는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은메달을 받기도 했다. 조선향토대백과를 살펴보면 “수박춤은 서북부지방 사람들의 락천(낙천)적인 민속전통을 훌륭히 구현하고 작품구성이 원만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절주 있게 치는 손벽 소리는 흥을 더욱 돋우어 준다”고 적혀있다. 수박과 유사했던 체술인 평안도의 날파람은 맥이 끊긴 듯 보이나 1960년대 초 개성에서 계정희라는 민속학자가 찾아 낸 ‘택견’이라는 것이 혹, 그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노란색테두리 있는 곳이 고려궁궐터인 만월대이다. 

송창렬 옹께서 연습하시던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로 고동색이 일본소학교 다니다 전학가신 만월국민학교(당시 조선아이들이 다니던)이고, 주황색이 개성의 홍삼정이다. 이곳에 뒤뜰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천일룡선생께 배우셨다고 한다. 

파란색은 2002년 작고하신 오진환 할아버지께서 개성역에 근무하실 때 명성황후 조카 민완식 선생을 뵌 곳이다. 초록색은 개성의 남대문인데, 송창렬 옹의 스승이신 천일룡 선생께서 사시던 남문통에 있었다.

옆의 하늘색은 선죽교이며 민완식선생께서 백범김구선생과 함께 자리하시기도 했던 곳이다. 개성은 근대까지 수박의 마지막 맥을 이은 곳 중 하나인 역사적인 장소다.

기무라(당시 개성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이름으로 산이 그 사람 소유라 기무라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산과 그 안쪽 여우골이라는 골짜기 그리고 개성시내 홍삼정 뒤뜰에서 주로 배우셨다. 


일제강점기 천일룡선생께서 거주하시던 남문통 주변과 고려 만월대


수박의 전승에 관한 증언

故 예용해 선생(문화재위원 역임)께선 “수박희를 우리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 서울의 동대문근처에서 수벽치기를 한다는 노인 몇 분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이고 대충 이런식으로 하더라 하며 흉내 내곤 하셨다.

권태훈옹(1900년~94년 작고)께선 "수박이란 주먹을 쥐는 것이 아니라 편 상태로 재빨리 뻗으며 상대방 역시 손을 내밀어 부딪히는 식으로 훈련한다. 흔히 곡조를 띤 소리를 질러가며 박수도 쳐가며 행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혀가며 노는 놀이의 한 형태로서 민간에 전해 내려온다"

택견예능보유자 정경화 선생과 함께(우측 송창렬 옹)


수박을 하면 곤장이 백대!

“박희(搏戱)로써 돈과 물건을 내기한자는 각각 곤장 1백대 이며, 돈을 대고 도박을 시킨자 또한 곤장 1백대의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음식을 걸고 활쏘기를 익히는 무예자는 비록 돈과 물건을 걸었다해도 죄가 없다. 고려사, 권85, 형법지(刑法志). 2 금령(禁令). 

고려 때 법(法)으로 엄금(嚴禁, 곤장 백대는 쳐 죽이겠다는 말과 같다)했던 수박(手搏)이 설마 요즘처럼 손바닥이나 치고 노는 유습에 한하였을까? 아니다. 잘 만하면 벼슬길도 열리는 무예였으며, 무인(武人)의 특기였다. 위력적인 것 또한, 정사(正史)가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 이의민(? ~ 1196, 명종 26)이란 자가 있었다 한다. 아버지 이선은 소금장수 였고, 모친은 옥령사(玉靈寺)란 절의 여종이었다고 한다. 8척 장신에 타고 난 기골은 장대하여 두형과 함께 시골구석(지금의 경주)을 횡행하며 온갖 흉폭한 짓을 일삼아 왔다. 그러던 중 이들의 악행을 알게 된 안찰사(按察使) 김자양이 어느 날 잡아다가 족쳤다. 그런데 두 형은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 자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수박이 법률로 무과시취(武科試取)의 과목이 되기도 한다. 세종실록 세종25년(1443) 11월, 삼가 <육전>을 상고하건데 이르기를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 능히 삼백보를 달리는 자가 상등이고, 이백보를 달리는 자가 중등’이다. 또 수박의 기능이 능히 네 사람을 이기는 자가 상등이고 세 사람을 이기는 자가 중등이 된다”하였다. (조선 최초의 법전이었던 '육전(六典:경제육전)'에 실린 임금의 호위무사인 보갑사(步甲士) 선발 규정 中) 

고려 형법지(刑法志)에 현상금을 걸고 박투(搏鬪)할 때의 기술이 수박이었다 한다. 조선 세조때는 노비(奴)들까지 나라에서 수박으로써 시재한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모여서 수박으로 용사들을 뽑았다.


원문보기

https://mookas.com/news/10999 수박의 계보

https://mookas.com/news/11047 수박의 계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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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7-09-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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