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형의 얼바인 산책]9.11 테러의 아픈 기억

  

다섯 번째 이야기-짐을 기억하며


몇일 전 예멘 북부 사다에서 피랍된 한국인 엄영선씨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언론에서 이슬람 무장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의 소행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더군요. 테러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할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테러라고 하면 모두 치를 떨죠. 떠올리기 싫은 2001년 9월 11일의 악몽 때문이죠. 알 카에다에 의해 자행된 9.11 테러는 전 미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엄영선씨의 안타까운 소식은 9.11 테러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사실 911 테러는 제 개인적으로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번 ‘얼바인 산책’은 아마도 제 넋두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파커(당시 7세)라는 수련생이 있었습니다. 태권도를 정말 좋아했죠. 아시다시피 미국 도장은 대부분 차량운행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경우 부모들이 데려오고 데리고 가죠. 파커도 어머니가 도장에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기간에는 파커를 돌보는 사람이 바뀌었죠. 바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로요. ‘짐’이라는 이름의 파커 할아버지는 미 육군사관학교 풋불 코치를 역임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콧대 높은 미국인이겠구나”라고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풋볼 선수나 코치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높은 편이고, 자부심도 무척 강한 편이거든요.

짐 부부는 미국 동부 보스턴에서 살고 있습니다. 방학기간에만 얼바인에 있는 딸의 집으로 와서 지내는 겁니다. 짐 부부가 얼바인에 오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외손자인 파커 때문입니다. 파커는 짐 부부의 보물단지죠. 짐은 손자를 도장에 데려주면서 점차 태권도에 매료됐습니다. 파커가 태권도를 배운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짐이 저에게 와서 “태권도는 최고의 무술이자 교육이네요. 육체는 물론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훌륭한 교육을 하는 마스터를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과찬의 말에 쑥스러웠지만, 태권도 사범으로서 큰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짐은 도장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어린 수련생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면, 사범들을 도와 도장분위기를 바로 잡아주시곤 했습니다. 큰 덩치(정말 몸집이 크셨습니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아이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곤 했죠.

짐은 정말 인자한 할아버지였습니다. 짐의 부인은 허리가 안 좋아 제대로 걷지 조차 못했습니다. 그래서 짐이 항상 부인을 안고 도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또 도장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했기에 부인의 신발 끈을 묶고 푸는 것도 대신했죠. 그 모습은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하나입니다. 짐은 제 부인에게도 특별한 사람입니다. 제 평생의 동반자의 이름은 김영미입니다. 영어명은 소피아고요. 소피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바로 짐입니다. 짐은 제 와이프가 평생 사모했던 소피아 로렌(영화배우)을 닮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 와이프는 입이 귀에 걸렸었죠. 이렇게 짐은 저희 부부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9.11 테러로 인해 무너지는 세계무역센터(사진출처 = 다음 카페)


그런데 악몽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9.11 테러가 자행됐던 비행기 중 한 대에 짐 부부가 탑승했던 것입니다. 이 비행기는 보스턴에서 LA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방학기간도 아닌데 짐 부부가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파커의 블랙벨트 심사 때문이었습니다. 그해(2001년) 10월 25일은 파커의 3년의 수련 성과를 평가하는 블랙벨트심사가 있었습니다. 짐 부부는 손자의 블랙벨트 심사의 준비과정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고 미리 일정을 당겨 왔다가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우리 도장 사람들은 침통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든 학부모들은 한자리에 모여 촛불을 켜고, 짐 부부를 애도했습니다.

얼마 후 뉴욕 세계무역센터(쌍둥이빌딩)의 잔해를 정리하면서, 짐의 한쪽팔과 시계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짐의 가족들은 다시한번 오열했습니다. 몇 개월 후 파커의 어머니가 도장을 보내기 힘들 것 같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파커와 우리가족 모두 태권도와 마스터를 너무 사랑합니다. 하지만 도복만 쳐다봐도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마스터 이해해 주세요.” 그녀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혼자 술을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짐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따뜻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있을 겁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17일 연재 예정이었던 이승형의 얼바인 산책이 편집부 사정으로 금일 진행됐습니다. 얼바인 산책은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정리 = 신준철 기자 / sjc@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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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혜성

    짐이라는분과 그의아내는 늘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항상 마음은 늘 그곳에 있을거라 생각 합니다. 그리고 손자 또한 늘 그곳에서 함께 운동하고 땀흘리고 있겠지요. 이모든것이 사랑에 의해서 연결된 열매일것입니다.항상 좋은 의미로 진실되고 책임감 있는 말과 행동이 있다면 우리의 무도 태권도를 항상 기억하고 사랑 할것 같군요.

    2009-06-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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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바인

    마음이 따뜻해 졌습니다. 요즘 시끄러운 태권도계 쳐다보기도 싫어졌는데, 감사합니다.

    2009-06-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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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BBB

    살아가다보면, 누구에게나 지우기 힘든 상처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가슴에 묻고 가다가도 어떤 계기에 문득 생각이 나곤 하죠. 도장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 식구처럼 지내시는 이 사범님에게도 힘든 기억이었겠습니다. 듣기싫은 뉴스들로 가득한 요즘 이 사범님의 글이 청량제 역할을 하네요. 감사합니다.

    2009-06-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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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웅

    읽을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군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2009-06-1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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