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보는 한국 유도사①

  

기록으로 보는 한국 유도사①


제25회 시드니 하계올림픽대회
(남 -60kg)은메달
(남 81kg) 은메달
(여 63kg) 동메달
(여 70kg) 동메달
(여 78kg) 동메달

제26회아틀란타 하계올림픽대회
(남자86kg급) 금메달
(여자66kg급) 금메달
(남자71kg급) 은메달
(남자95kg급) 은메달
(여자52kg급) 은메달
(여자56kg급) 은메달
(남자78kg급) 동메달
(여자61kg급) 동메달

61년 제 3회 프랑스 파리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참석한 한국선수와 임원진

이는 현재 우리유도의 성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메달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금메달이 아니면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는 비단 유도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그러나 오늘의 성적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땀과 노력, 고통과 좌절이 있어야만 했다.
한국유도의 국제무대 출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현재 우리의 유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 최강에 오르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뒤돌아 보았으면 한다.

“최초의 한국유도 국제 출전은 전패였다”
한국유도가 최초로 국제무대를 밟게 된 것은 유도가 한국에 들어온 지(대략 1909년 YMCA 중앙 기독교 청년회 유도부가 탄생한 시점으로 본다면) 50여년 만인 1958년 8월에 열린 제2회 일본 도쿄 세계유도 선수권대회(1회때는 불참했다)에서 이다.

이날 대회에서 한국은 박경림 감독의 지휘로 오영모 코치, 권용우, 이석도, 김위생 선수가 출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출전선수 모두가 입상하지 못하는 아쉬운 전패의 기록을 남기게된다. 이렇게 한국유도는 시작됐다.


64년 도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김의태선수(오른쪽 상단)

첫 국제무대 메달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61년 제3회 프랑스 파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나오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날 열린 대회에서 김근찬 단장을 사령탑으로 조수하 감독, 김덕용, 김동배, 한호산, 김의태 선수가 출전, Open급에 출전한 김의태(金義泰)선수가 동메달을 차지하는 영광을 얻는다.

김의태 선수(이후 일본 천리대 체육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퇴직한 것으로 보인다)는 일본에서 자라 유도를 익히고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재일교포였다. 이후 그는 올림픽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최초의 메달의 기쁨은 어느 정도 였을까? 지금 메달의 수십배 아니 수백배의 가치는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김의태 선수의 동매달 획득으로 한국의 유도가 세계에 다시 한번 부각되는 계기가 된다. 사실 한국의 유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이보다 전인 1955년 유도사절단이 유럽을 순회하면서 한국유도를 알린게 그 시초라 할수 있고 그와 함께 김의태 선수의 메달 소식으로 그 효과가 배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4년 10월에 열린 제 18회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유도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우리유도가 메달을 획득한다. 선수와 임원등 8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61년 파리 세계 유도선수권대회에서 첫메달을 안겨줬던 김의태 선수가 -80KG급에 출전하여 올림픽에서도 메달(동메달)을 따낸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대부분 잘 모르시겠지만) 김의태 선수는 단지 우리의 첫 국제무대 메달리스트만은 아니었다. 올림픽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자 모교(천리대)측에서 일본으로 귀하하여 출전하지 않겠는냐는 제의에 “퇴학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배달민족의 핏줄을 끈을 수 없다.” 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일본팀 대표로 선발된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태극기를 달아주지 않으면 출전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 (한국유도 발달사 -중앙일보 1964년 10월 22일자) 그는 애국자였다.

이렇게 우리유도는 김의태선수에 의해 메달행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970년대까지 세계정상의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열악한 지원과 환경 속에서도 좋은성적을 거두었다.


문헌자료:
韓國柔道發達史 李學來 저
월간 “체육” 대한체육회발행
武道敎本 육군사관학교
#한국유도사 #김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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