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사랑방] 사범(師範)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명의(名醫)

  

이정규 사범의 무예 사랑방


L.A 그리고 미친 놈

우리 도장 청년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 그리고 네바다 주(州)를 가로지르는 서부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한인여행사 패키지관광을 이용한 탓에 미국인이 생각하는 그런 느긋한 여행이 아니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며 파김치가 되었던 여행이었다.

어쨌든 즐거웠던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날. LA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영화 속에서 보았던 거리들을 지나며 흥에 겨워 있을 때였다. 한 정류장에서 건장한 사내 하나가 버스에 올랐는데 차에 오르자마자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설을 날리며 사람들을 치고 들어왔다.

자기와 눈이 맞거나 몸이 닿은 사람들에겐 당장에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대드는데 ‘저 놈이 마약을 했나?’ 싶었다.

그 사내가 뒤쪽으로 들어오며 행패를 부리자 승객들은 우르르 버스 앞 쪽으로 몰려가 버리고 버스 뒤 칸은 우리만 남았다. 게다가 그 사내는 우리가 몰려 앉아 있는 맨 뒷좌석 한복판에 털썩 끼어 앉는 것이 아닌가?

우리 도장 청년들은 창가로 바싹 붙어 앉아 곁눈질로 나만 자꾸 쳐다보았다. 나도 혹시 모를 위급상황에 대비해 황급히 머릿속을 뒤져 <미친놈에 대한 호신술>을 검색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매뉴얼은 애초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있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잔뜩 긴장한 채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급소부터 치고 들어가야겠다는 작전을 짰다. 내가 인솔한 학생들은 내가 지켜야할 의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내는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질러댔다.

“대통령이 FBI를 시켜 나를 납치해 고문하고 내 귀에 도청기를 심었다! 그 뒤부터 우주에서 메시지가 들려온다! 내가 거짓말 하는 걸로 보이냐? 다 죽여 버리겠다!”면서 가방이며 주머니 속의 잡동사니들을 꺼내 사람들을 향해 마구 던지며 행패를 부리는데 아무도 못 말렸다.

그러던 중 사내의 주머니에서 동전하나가 떨어져 굴러가다 멈추어 서자 갑자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내 아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전을 주워들더니 그 사내에게로 걸어가 얼굴 바로 앞에다 대고 손뼉을 크게 “짝짝!”하고 치는 것이 아닌가? 버스 안의 승객들이며 나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Hey, Sir! you dropped this coin! (아저씨, 여기 동전 떨어뜨렸어요!)” 그리곤 “Stop yelling at them, Nobody understand you.(그만 소리 질러요. 그러면 아무도 못 알아듣잖아요.)
예상치 못한 아내의 행동에 말문이 막힌 것은 나뿐 아니라 미친놈도 마찬가지였다.
“Where are you come from? What is your name? Who tortured you? (어디서 왔어요? 이름은 뭐고? 누가 고문을 했다고요?)” 한순간에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서 있는 키가 제 앉은 키 밖에 안 되는 작은 동양여자 하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이것저것을 물어대니 황당하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한 동안 눈을 치켜뜨고 쳐다만 보던 사내가 좀 전에 하던 말이 무슨 말인지 마저 해보라는 아내의 호기심에 찬 질문공세가 이어지자 하나씩 묻는 말에 차근차근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내는 점차 조련사 앞에 기가 꺾인 사자처럼 양순해지기 시작하더니 그 험상궂던 얼굴까지 점잖고 잘생긴 청년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빨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아내와 나누는 대화가 두서없긴 했지만 오가는 내용들이 워낙에 튀다보니 나름 듣는 재미가 있었다. 분위기가 점차 부드러워지자 나중엔 신기했던지 슬그머니 우리도장 청년들까지 하나씩 돌아앉아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차츰 두서를 찾아가는 대화 속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이 놀란 토끼눈으로 거울을 통해 버스 뒤 칸에서 벌어지는 급반전한 상황을 훔쳐보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대화를 마치고 우리가 내려야 할 곳에 도착하자 “너희들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과 다르다. 들을 귀가 있다. 좋은 사람들 같은데 여행 잘하라.”며 젊잖게 악수까지 해주어 다 같이 돌아가며 악수를 하고 내렸다.

앞 칸은 꽉 끼어 선 승객들로 만원이고 텅 빈 뒤 칸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사내 혼자 차지한 비대칭적인 인구분포의 버스가 떠나자 우리 여학생 하나가 갑작스레 자지러지게 웃었다.

처음엔 그 사내가 너무 무서워 숨도 못 쉬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아내의 당돌한 행동에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고. 그리곤 속으로만 ‘Oh, No, Please!(제발 그러지 마세요!)’를 연신 외쳤다고 했다.

아내는 이런 일에 늘 태연하다. 난 지금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지레 주먹 쓸 생각부터 하는데 아내는 늘 말로 풀어갈 생각을 먼저 한다. 그래선지 몸은 작지만 타고난 기운은 나보다 큰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는 미쳐 날뛰는 녀석에게 다가가 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마음을 내었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슴에 불(火)이 붙어 펄펄 뛰던 녀석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니 펄펄 끓던 솥 밑의 숯불을 치워버리고 그 위에 찬물을 부어 식혀 버리듯 화기(火氣)가 빠져 차분해졌던 것 같다.

말, 사람을 살리는 치유

말이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육체를 뚫고 들어가 마음 속 깊은 곳의 막힌 기운까지 뚫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말은 비록 형체가 없는 비물질이지만 그 기운이 매우 크기 때문에 죽을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말로 할퀴어 놓으면 멀쩡했던 사람도 죽고 싶고 죽고 싶도록 괴로운 사람의 마음도 말로 잘 어루만져 주면 다시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 내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말이 갖는 심리적 치료효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에는 분명한 물리적인 치료효과도 들어있다.

그래서 몸이 아파 병실에 누운 사람도 즐겁게 말을 나눌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빨리 그리고 쉽게 낫는다. 즐거운 대화를 통해 건강한 사람들의 기운을 듬뿍 받기 때문이다.

반대로 외로이 병실만 지키며 찾아오는 이 없이 꿍꿍 앓기만 하는 사람들은 회복이 매우 더디다. 아픈 몸에 약만 부어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이란 많이 아플 때 통증을 줄여주고 기운을 잠깐 돌려주는 보조제에 불과하다. 그래서 의사 중에 수준이 낮은 하의(下醫)는 환자를 약으로만 치료하려 들고 중의(中醫)는 재미있고 편안한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약은 조금만 주어 회복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최고의 수준의 상의(上醫)에 오르면 약 한 방울 주지 않고도 낫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정다감한 말로 환자의 마음을 열어 그 아픔이 온 원인을 찾아주고 희망에 찬 말로 그 기운을 소통시켜 스스로 치유되도록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몸이 아픈 환자들에겐 약보다도 희망에 찬 따뜻한 말로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는 이들의 간병이 절실한 것이다.

사범, 상담가의 역할

도장에서 지도자들의 역할은 단순히 무예기법을 전수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수련생들에게 신뢰를 얻을수록 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상담하기 위해 사범을 찾는다. 부모자식간의 소통문제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집단 따돌림, 학원폭력에서 성적저하에 이르기까지 그 주제도 다양하다.

특히, 내가 있는 미국서는 사범들의 상담능력이 더욱 절실하다. 다짜고짜로 이혼을 하고 싶은데 사범님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할 테니 판단 좀 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여학생이 아직 부모님께 말을 못했다고 찾아오기도 하고 우리 딸이 어떤 사내놈에게 빠져 있는데 좀 말려달라고 찾아오기도 한다. 돌 볼기 힘든 연로한 부모를 어찌해야 할 것 인지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는데 어째야 하느냐는 등 어떤 경우엔 딱히 답을 내 줄 수 없는 어려운 주제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간혹 ‘내가 심리상담가도 아니고 이런 문제를 어쩌라고 나를 찾아오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딱히 뭐라 해줄 말이 없으니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혼자 한참을 넋두리를 하다가 한 숨 푹 쉬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돌아서곤 한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그렇게 속 답답한 이야기를 몇 차례 들어주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에서 짐이 덜어지는지 조금씩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상담을 하고 나서 그 뒤로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는가를 몇 차례 묻다보면 어느 순간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고맙다고 사범님의 상담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쁜 얼굴로 대답하기도 한다. 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갈 길 몰라 헤매던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해 주고 희망이 담긴 말로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 스스로 힘도 솟고 눈도 밝아져 어려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찾는 것도 여러 번 보아왔다.

성공의 조건

무술기법만 뛰어나다고 해서 결코 성공한 도장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주위서도 보면 사람을 잘 다루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가족처럼 살가워질 때 더 많은 가족이 생기고 탄탄한 도장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무예 지도자로 살다보면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다양한 성격과 성향 그리고 처해진 서로 다른 상황들을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보고 듣는 경험 속에서 좋은 상담의 기법을 갖추어 가다보면 언제가 우리도 명의가 되어 내 앞에 온 사람을 살리고 나아가 병든 세상까지 고쳐 세상을 살리는 큰 인물로 성장하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좋은 말만큼 훌륭한 약도 없다. 그러니 좋은 말, 밝은 말, 희망에 찬 말을 가려 수련 전후의 시간에 수시로 처방할 줄 아는 사범이야말로 죽을 사람도 살려 낼 수 있는 뛰어난 명의(名醫)가 되는 것이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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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ist7

    언제나 읽어도 읽기 쉽고 재밌는 글!!! 사범님 화이팅!!!

    2019-06-14 01:29:09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설사범

    최고에요

    2015-11-0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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