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사랑방] 밥값내기와 갑(甲), 을(乙) 관계

  


이정규 사범

# 신발과 맨발의 문화차이

처음 미국에 와서 미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 겪었던 에피소드가 많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집이나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지 않는 일이다. 하루는 한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북적이는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했다.

서양식으로 음료수 하나 손에 들고 서서 짧은 영어에 행여 실수나 않을까 조심스러워 점잖을 떨고 있을 때였다. 나와 대화하던 사람 하나가 그런데 신발은 왜 안 신고 있냐고 물었다.

“뭐?”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얀 양말이 가지런한 내 발이 눈에 들어왔고 동시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황급히 시선을 문가로 돌리자 유리문에 코를 딱 대고 집안에 들어오고 싶어 끙끙거리는 강아지 마냥 문가에 붙어 나를 바라보는 신발 한 켤레가 보였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참아가며 조르륵 달려가 신고 들어오자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혼자 아파트 생활을 할 때도 아침마다 어젯밤 신고 들어온 신발을 찾지 못해 헤매는 일이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싶어 찾다가 마침내 포기하고 다른 신을 신고 나가보면 복도에 가지런히 신발이 놓여 있곤 했다.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푹신하고 깨끗한 카펫이 깔려 있으니 방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어선지 신을 문 밖에 벗고 들어온 탓이다. 그것이 이웃의 눈엔 얼마나 이상하게 비쳤을까? ‘쟤는 왜 항상 복도에 신을 벗어놓고 들어갈까?’

# 밥값내기의 문화차이

사실 이 정도야 웃어넘기면 그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고치기 힘든 껄끄러운 문화가 하나 남아있다. 처음 미국사람과 식사를 하고 났을 때였다. 같이 식사하자고 손잡아 끌기에 갔고, 먹고 싶은 것 시키래서 시켰더니 나갈 땐 벌떡 일어나 제 밥값만 계산하고 나갔다. 이게 뭔가 싶었다. ‘아니 먼저 밥 먹으러 가자며?’ 손님 불러 놓고 웬 행패인가 싶어 황당했다. 더치페이(Dutch pay)였다.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계산한다는 더치페이가 쿨 하기는커녕 얼마나 껄끄러운지.

그 뒤로도 미국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더치페이’가 쉽질 않았다. 웨이터의 손에 계산서가 들려오면 한 칼로 승부를 짓는 진검승부사보다 빠르게 한 손으론 공중에서 계산서를 낚아채고 다른 손으론 재빠르게 지갑을 뽑았다. 자기 것은 자기가 내겠다는 사람을 몸으로 밀쳐내며 계산서는 구경도 할 수 없도록 차단해 버리는 완벽수비! 전광석화와 같은 내 몸놀림에 감탄한 웨이터들이 “Hey, big boss!(당신이 대장이군!)”를 외치곤 했다.

내가 먼저 밥을 먹으러 가자면 당연히 내가 냈고, 미국 사람들이 먼저 가자고 해도 내가 계산 하곤 했다. 특히 수련생들과 밥을 먹고 나면 사범이 윗사람일진대 어찌 아랫사람에게 돈을 내게 하겠나 싶어 없는 살림에도 지갑을 털기가 일 수였다.

이러다보니 오래 알고지낸 미국사람들은 한국 사람과 식사를 하고 나서 계산을 하는 것은 도리어 실례가 되는 줄로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밥 먹을 때마다 지출이 은근히 부담이 되다보니 나도 모르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을 피하는 대인기피증(?)까지 생긴 것 같다.

그런데 밥값이 부담되면서도 왜 굳이 내가 내려 할까? 함께 밥을 먹고 내가 내지 않으면 마치 없어서 얻어먹은 듯한 기분이 들고, 왠지 없어 보이지 않을까 마음이 불편했다. 한마디로 돈을 지불함으로서 내가 갑(甲)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 밥값내기와 갑(甲), 을(乙)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과 만나 식사할 일이 많이 생긴다. 그런데 밥값을 내고도 기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굳이 내가 밥값을 내야 하나?’ 주저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짚어보자. 밥을 먹고 누가 밥값을 낼까? 돈이 많은 사람? 힘이 있는 사람? 윗사람? 아니다! 사실은 힘없는 사람, 기운이 달리는 사람, 아랫사람이 밥값을 낸다.

힘 있고 실력 있는 사람, 기운이 큰 윗사람은 밥값을 낼 틈이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대접하려 들기 때문이다. 밥값을 내도 좋으니 그저 시간만 내주고 대화만 나눠줘도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 따로 볼 시간을 얻기 힘드니 밥 먹는 시간이라도 할애 받고 싶어 식사를 대접하려는 것이다.

실력 있는 사람들은 삼시세끼 밥 먹는 스케줄로도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 있다. 이른 아침 조찬모임, 짬을 내어 먹는 런치(Lunch), 중요한 인사들을 만나는 디너파티, 그 뒤로 이어지는 뒤풀이 술자리까지.

이렇게 함께 밥을 먹고 나서 내가 밥값을 내주고 싶은 사람은 나보다 기운이 큰 사람이고 은연중에라도 뭔가 부탁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그가 갑(甲)이고 내가 을(乙)이다.

반대로 누군가 내 밥값을 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기운이 작은 사람이고 내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도움을 받을 일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을 알면 된다. 이 경우엔 내가 갑이고 그가 을이 된다.

그렇다면 직장 보스가 아랫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멋지게 밥값을 계산하는 것은 어떨까?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스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신용을 얻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다. 비록 지위는 높지만 아랫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다.

청춘남녀가 교제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밥값을 내고 싶다면 여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고 선택권도 여자에게 있다는 말이다. 여자가 갑이다. 만일 여자와 같이 밥을 먹고도 밥값을 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든다면 그 여자는 남자의 환심을 사지 못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 경우엔 남자가 갑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찾게 되어 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찾아가지 샘이 목마른 사람을 찾아가진 않는 것이 대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밥 먹자고 연락이 온다면 그 사람 역시 내게 필요한 일, 도움 받을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냥 심심해서 밥이나 먹자고 해도 마찬가지다. 심심함, 외로움을 풀기 위해 내가 필요한 것이다. 알든 모르든 먼저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는 사람들이 바로 목마른 사람이고 나보다 기운이 낮은 사람이니 이 관계에선 내가 기운이 높은 사람이고 갑임을 알면 상대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니 나를 돌아보라. 아직도 내가 남의 밥값을 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면 스스로 모자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추억 속의 선배

선후배 간의 수직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는 무도계에선 같이 밥을 먹고 나서 자리를 파할 때 선배가 밥값이든 술값이든 멋지게 계산하고 자리를 뜨는 것을 당연시 여기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이 자취나 하숙을 하던 어렵던 청춘시절 밥 한 끼, 술 한 잔 사는 것이 선배로서 품위였고 한 끼라도 얻어먹은 후배들은 없는 살림에도 흔쾌히 후배들을 대접하던 선배의 푸근한 사랑에 더욱 깍듯이 선배를 대하곤 했었다. 특히나 이런 훌륭한 선배들에겐 언제나 배울 것이 있었다. 말 한마디에도 기개가 넘쳤고 아무리 뛰어나도 후배가 따라갈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 때는 선배가 갑이었고 내가 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우린 더 이상 밥 한 끼가 아쉬워 선배를 찾아가던 하숙생이 아니다. 도리어 밥값을 내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 부탁할 것이 있는 아쉬운 사람임이 드러나는 시대다. 더 이상 밥 한 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 경쟁상대가 되는 후배

요즘 미국에서 만나는 젊은 후배사범들을 보면 기성세대 선배들이 평생을 걸려 습득한 전문지식도 단 3년이면 다 따라 잡을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온갖 신기술로 무장 한데다가 똑똑하고 그 관심의 범위도 넓어 아는 것이 많아 선배들이 따라가기에 벅찬 상대들이다.
이런 지경에 나이 좀 들었다고 ‘난 선배입네, 그런 것쯤은 다 아는데 뭘.’하며 배움을 갖추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한다면 쓸모없는 퇴물이 되어 평생경력이고 뭐고 후배들에게 무시당한 채 퇴출 지경에 이르고 만다.

이런 일은 미국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수 십 년 경력을 내세운 선배사범님들이 언제부턴가 어디서 건너 온지 모를 젊은 사범들이 여기저기에 도장을 열고 진공청소기로 물 빨아 들이듯 시장을 점령해 나가니 점차 밀리는 형세가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나 같이 세상흐름에 밝지 못한 사람은 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 후배사범들이 경륜이 짧아 도장을 못하느냐? 그렇지도 안다. 새로운 비즈니스 기법이며 멀티미디어를 통한 광고나 정보수집능력도 대단하다. 게다가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수업진행으로 인기몰이를 하니 선배들의 설 곳이 점차 좁아지고 점점 선후배 사이가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경쟁구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처럼 시합장에서 만나는 후배들이 마땅치 않다. 후배사범들 역시 나이 먹은 선배사범님들이 편할 리 없을 터이다. 어색한 인사가 오가고 나면 노인 관장님들 한 팀, 기성세대 선배사범님들 한 팀, 신세대 젊은 사범들 한 팀 이렇게 세대별로 어울리는 부류가 생긴다. 선배사범님들은 “요즘 젊은 사범들은 예의도, 위아래도 없어! 아무데나 막 치고 들어와!”라며 한탄을한다.

# 이끌어 주는 선배

선배도 아니고 후배도 아닌 중간자의 위치에 서다보니 선배들은 후배가 어려울 때 엄청 도움을 주었는데도 끝내 등을 돌렸다고 모진 소리를 하고, 후배는 후배대로 선배를 돕다가 고생만 하고 시간만 뺏겼다고 서운해 하는 소리를 자주 듣곤 한다.

그런데 도움은 받은 쪽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진정한 도움이지 혼자 도와주었다고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더욱이 밥으로 돕고, 돈으로 도왔다면 그건 참 도움이 아니다. 쓰고 나면 사라질 물질로는 진정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 마음을 주고 지식을 주고 지혜로 이끌어 주어 더 나은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만이 진정한 도움이 되는 법이다.

후배들은 경험이 부족해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닥칠지를 알지 못한다. 미처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닥쳐올 때 어떻게 뚫고 가야 할지 아직은 내공이 부족하다.

그러니 지금 시대의 선배라면 후배들이 따라 올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고, 그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의 방향을 잡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스스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운 것 중 잘못되었던 것은 바로 잡아주고 잘된 것은 그 노하우를 남겨 전해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얻는 후배들이 생겨나야 비로소존경받는 선배가 되고 갑이 되지 않겠는가?

# 다시 찾는 갑의 역할

예전처럼 나이만 먹었다고 선배 대접 받는 시대는 지났다. 후배들에게 진정 도움이 돼야 선배 대접도 받게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선후배 사이의 관계에서 언제나 갑이 되고 싶다면 무한경쟁시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후배들에게 이 어려운 시대를 능히 이겨낼 개벽(開闢)의 이념과 지혜를 꺼내 주어야 한다. 수많은 스포츠 레저 활동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가치를 태권도 안에서 창출해 전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며 이끌다보면 자연스럽게 태권도계의 어른으로 등극할 날도 올 것이다.

그러면 후배들에게 경쟁상대로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해 따를만한 존경스런 선배로 각인되어 비로소 한 평생을 다해 닦아 온 이 길이 보람 있고 즐거운 길이 될 것이다. 찬란한 부의 금자탑을 쌓기보다 뒤따라오는 이들에게서 마음을 담은 존경을 얻는 삶이야말로 무인(武人)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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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nak you for other great story and it gives me to thiinking about my next level.

    2015-04-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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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범

    공감이 와닿는 부분도 있지만 아닌 부분도 많네요.
    모든것에는 답이 없듯이 와 닿는 부분은 잘 세기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5-04-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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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범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2015-04-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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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범

    존경받는 삶!!! 그런 삶을 일궈야겠다 생각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04-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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