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지리산 청학동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46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안에 있는 이상향으로, 푸른 학이 깃들어 살고 있는 곳이라 하여 청학동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청학(靑鶴)이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한다.

옛날 경상남도 하동 시장에서 신선처럼 생긴 어느 도인(道人)이 소 한 마리를 사 가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몰래 뒤를 따라갔다. 한참을 따라 가다보니 폭포가 나오고, 동굴이 나왔다. 동굴을 지나 또 한참을 가니 청학(靑鶴)이 날아다니고 도화꽃 흐드러지게 핀 별천지(別天地) 선경(仙境)이 나왔다.

따라간 사람이 생각해 보니, 이 아름다운 무릉도원에서 자기 식구들과 함께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급히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식구들을 이끌고 다시 길을 나섰으나, 도중에 길을 잃고 어디가 어딘지 영영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백두산으로부터 맥이 뻗어 내려온 지리산(智異山)은 예로부터 선도(仙道) 수행자들이 많이 살았으며, 지혜를 간직한 이인(異人)들이 숨어 있는 산이라 해서 지리산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두류산(頭留山), 방장산(方丈山)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도가 세석평전에서 수행하였다고 하며,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역시 불일폭포 주변에서 은둔하며 노닌 흔적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하동의 화개동천에는 청학동과 동일 개념인 ‘삼신동(三神洞)’이라고 고운선생이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으며, 또 더러운 귀를 씻는다는 '세이암(洗耳岩)'이라고 새긴 바위도 있다. 그리고 그가 꽂아둔 지팡이가 움이 트고 계속 자라 천 년이 넘었다는 푸조나무도 있다. 그리고 또 불일계곡의 ‘환학대(喚鶴臺)’는 그가 청학을 불러 타고 노닐었던 바위라고 한다.

‘완폭대(翫瀑臺)’ 역시 그가 바위에 새긴 글씨로, 그 바위에 앉아 지리산을 감상하기 좋은 자리라고 한다. 광해군 10년(1618) 4월에 청학동을 유람하였다는 조위한(趙緯韓)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0여 명이 앉을 만한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고운이 직접 쓴 것이다. 우리 일행 다섯 사람은 완폭대 위에 둘러앉아 술잔을 씻어 술을 따랐다. 바위 앞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동안 다녀간 사람들이 껍질을 벗기고 이름을 새긴 것들이 많이 보였다.’

고운 선생이 선화(仙化)한 시기와 장소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919년 63세에 합천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는 설이며, 또 하나는 951년 95세에 지리산 불일폭포에 짚신을 벗어놓고 청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돌아갔다는 설이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시(詩) 〈청학동에 들어가서 최고운을 찾다〉는 당시 세상에서 회자되고 있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孤雲千載人고운 최치원은 천 년 전 사람
鍊形已騎鶴수련을 쌓아 학을 타고 다녔지.
雙溪空舊蹟쌍계에는 옛 자취만 허전하고
白雲迷洞壑흰구름은 골짜기에 아득하여라.

고려시대에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 1150∼1220)가 본격적으로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는 기록이 그의 문집 《파한집(破閑集)》에 보인다.

‘옛 노인들이 전하기를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하다. 그렇게 수십 리를 가면 비로소 드넓은 별천지가 나오는데, 양전옥토(良田沃土)라서 곡식을 심어 먹기에 알맞다. 그곳은 옛날에 은둔하던 이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허물어진 담과 구덩이가 가시덤불 속 빈 터에 남아 있다. 전에 나와 당형 최상국(崔相國)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할 뜻이 있어, 이 골짜기를 찾아 가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소 두세 마리에 살림을 싣고 청학동에 들어가 속세와 연락을 끊기로 했다. 드디어 화엄사를 지나 화개 신흥사에서 묵었는데, 지나는 곳곳마다 선경(仙境) 아닌 곳이 없었다.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솟아 있고,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 울타리의 띠집에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마치 인간세상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정작 찾아갔던 청학동은 끝내 찾지 못하고, 바위에 시(詩)만 한 수 새겨 놓고 돌아왔다.

두류산 아득히 저녁구름 깔렸는데
골짜기와 바위들은 회계산을 닮았구나.
지팡이 짚고 청학동을 찾으려 하니
숲속 저편에선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려오네.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기만 하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메뇨?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잎만 아득하여라.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두류록〉을 필두로 해서 지리산 여행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종직의 제자들인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그리고 남명 조식 등등 수십 명이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을 여행하였으며, 여행기를 남겼다.

이인로와 호가 똑같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지리산은 깊숙하고 그윽하여 신산(神山)이라 부르며, 그중에서도 청학동은 가장 기이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예부터 기록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살아있는 백과사전이었던 이규경(李圭景, 1788~?) 역시〈청학동 변증설〉이라는 글을 남겼다.

‘청학동은 동방의 한 작은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천하에 유명하다. 우리나라에 비경(秘境)으로 이름난 곳이 많지만, 청학동은 유독 세상에 이름났다. 청학동은 온 조선조에 회자되어 모르는 사람,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위 글로 미루어 보건데 조선시대 선비들은 지리산을 여행하고 청학동을 찾아보는 게, 그 시대의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청학동은 찾지 못하고 시(詩)만 한 수씩 남기고 돌아왔다. 전해오는 기록들을 정리하면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1. 청학동은 옛 노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2. 예부터 은둔생활을 하던 이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3. 지금도 은둔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이곳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청학동은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이미 널리 알려졌던 은둔처였음을 알 수 있다. 청학동은 지리산 중에서도 남쪽에 있으며, 하동 땅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디인가?

《정감록(鄭鑑錄)》에 이르기를 진주 서쪽 80리 하동 북쪽 60리 함양 남쪽 120리 되는 곳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뇌파석문(雷破石門)을 지나 물이 흐르는 계곡 몇 리를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드넓은 평지가 나오며, 식수와 농경이 가능한 석천(石泉)이 솟는다. 전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 10곳 중의 하나이며, 이곳에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으면 신선이 된다.

《옥룡비결》에서는 삼승지지에서 제일지가 청학동이라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진주에서 서쪽 147리 거리의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또 여러 비결서들도 주장하기를, 청학동은 지리산 남쪽 해발 900m의 깊은 산골로 주위가 수려하고, 청학이 살고 있는 신선마을이다. 그곳에는 내성문 외성문이 있으며, 좁은 계곡을 거슬러 폭포를 지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가 40여 리 갖추고 있으며, 백운삼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아도 서리나 눈이 늦게 내리며, 곡식 1되를 심으면 1섬을 소출한다. 제왕, 충신, 달사 등 빼어난 인재가 대대로 이어 나고, 누구나 부귀공명이 수를 헤아릴 수 없고, 가장 오래 사는 노인은 156세까지 살고, 36성(姓)이 들어와 사는 이상향이다.

위 비결들에서 말하는 조건에 해당되는 곳은 악양 청학골, 불일폭포 주변, 세석평전, 현재 청학동이라고 불리우는 학동마을 등이 있다.

1. 악양 청학골
일단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청학골’이다. 그리고 점필재 김종직이나 택리지를 쓴 이중환 등이 이곳을 청학동으로 알고 있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지리산을 여행할 때 안내를 해준 혜공스님이 악양 청학골을 가리키며 청학동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 당시에는 청학사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 도인 한유한과 점필재의 문인이었던 일두 정여창도 악양에서 은둔하였다.

다큐멘타리〈청학동을 찾아서〉를 찍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에서 지리산을 둘러본 MBC 김석창 PD는 “청학동이 존재한다면, 악양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2. 불일폭포 주변
고운 최치원이 불일폭포 주변에서 은둔하였으며,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과 남명 조식 등이 이곳을 청학동으로 여겼다. 김일손이 지리산을 여행할 때 불일암 스님이 안내를 해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매년 6월이면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는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아 내려와 물을 마시고 가는데, 바로 청학이라.”

불일폭포에서는 무학대사도 3년간 수도하였다고 하며, 불일암은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했던 장소라고 한다.

3. 세석평전
신라시대 화랑들이 수행한 터전이며, 조선시대 정걸방 도인도 이곳에서 거처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석문(石門)이 있고, 그 석문을 통과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드넓은 40리 초전이 있으며, 백운삼봉이 남쪽으로 정면으로 보이는 등 청학동이 구비해야 할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4. 현재의 청학동 마을
현재 청학동으로 불리는 마을은 예전에는 그냥 ‘학동마을’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감춰졌던 학동마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지리산을 등반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한 등산객의 발견에 의해서이다.

1970대 초면 벌써 바깥세상은 새마을 운동으로 옛날 전통은 거의 다 사라져버린 때이다. 그런데 지리산을 헤매던 한 문명인이 옛날 전통을 온전히 간직한 마을을 발견했으니, 그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어땠을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학동마을은 처음에는 왜정시대를 피해 들어간 사람들이 은둔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6,25 때 지리산 공비소탕으로 모두 없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6.25 직후인 1956년경 정감록을 신봉하는 유불선합일갱정유도인(儒佛仙合一更定儒道人)들이 이곳에 들어와 은둔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길 잃은 등산객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후 학동마을은 경상남도 관광지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공식적인 청학동으로 자리잡았다.

그 마을 주민들도 ‘청학동’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수시로 대화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필자는 1993년 청학동 마을에 여행 갔을 때, 그곳 주민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여기는 그냥 ‘학동마을’이라고만 불렀었다.”
“악양이 진짜 청학동이라데 ...”

어쨌거나 지리산 청학동은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남추(南趎) 선인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수광의《지봉유설(芝峰類說)》, 홍만종의 《해동이적》,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識)》등에 두루 실려 있는 남추 선인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조선 중종 때, 전라도 곡성 서계 땅에 살았던 남추는 본관이 고성(固城), 자는 계응(季應), 호는 서계(西溪) 또는 선은(仙隱)이며, 부친은 계신(繼身)이다.

남추(南趎, 1495~1525)는 인물이 준수하고 재주가 비상하여, 어려서 공부를 배우지 않고도 모든 것을 알았다. 부친이 책 읽기를 권하면 “저는 읽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남추는 중종 9년(1514년) 나이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집권대신 남곤(南袞)에게 퇴출당하였다. 그때 남곤을 비꼬아 지은 시〈촉영부(燭影賦)〉는 당시 선비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낙향하게 된 남추는 스스로 호를 선은(仙隱)이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 삼으며 선도(仙道) 수련을 하였다. 하루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가 개였는데, 남추가 바위 위에 앉아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있으므로 동리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 자기 집 하인에게 편지 한 통을 써 주며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노인 두 분이 마주앉아 있을 터이니, 전하고 오라.” 하였다.

하인이 분부대로 청학동을 찾아가 보니, 과연 산자수려한 골짜기 아름다운 동천 누각 위에서 용모가 아름다운 도인이 노승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소인은 곡성 서계에 사는 남진사댁 하인이온데, 진사께서 이 서찰을 주시면서 꼭 답장을 받아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올줄 이미 알고 있었다.”

도인은 웃으며 바둑을 마저 끝내고는, 답장과 함께 푸른 옥돌로 된 바둑알을 몇 개 주었다. 하인이 청학동에 올 때는 단풍 든 낙엽이 지고 가는 눈발이 날렸는데, 돌아올 때 보니 봄기운이 완연하고 파란 싹이 돋고 있었다. 그동안 배고픈 줄도 전혀 몰랐는데, 벌써 반년이 흘러 있었던 것이다.

아는 사람들이 말하길 그때 청학동에서 바둑을 두던 도인은 고운 최치원이요, 노승은 검단선사라고 하였다.

남추는 청학동 도인에게서 받은 푸른 옥돌을 소중하게 간직했는데, 그가 죽자 옥돌 또한 자취를 감추어 사라졌다고 한다.

남추는 30세에 선화(仙化)하였는데 입관한 관이 너무 가벼워 이상해서 열어보니, 안이 텅 빈 채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滄海難尋舟去跡아득한 넓은 바다는 배 지나간 자취 찾기 어렵고
靑山不見鶴飛痕깊은 청산엔 학이 날아간 흔적 보이지 않네.

남추가 죽던 날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울려 사람들이 올려다보니, 남추가 말을 타고 흰구름 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신선(神仙)이 되어 간 것이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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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범

    정원장님,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드립니다. 어렵게 10년만에 취득하신 학위라 하니, 그 소중함이 더욱 더 각별하시리라 여겨집니다. ^^

    2014-08-2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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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리비움

    이 정도의 글을 쓰시려면 관련 학문에 대한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각종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분류해 글쓰는 작업이 보통 힘든게 아닌데요..정말 부럽습니다^^..보다 드높은 경지로 나아가시길,,그리하여 우리같은 후학들을 지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3-10-2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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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고맙습니다, 자리비움님. 자리비움님께서 응원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덕분에 지금껏 씩씩하게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

    2013-10-2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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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리비움

    쉽없이 이어지는 연재가 결코 쉬운일이 아닌데..정원장님의 필력이 놀랍습니다..

    2013-10-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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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독자

    오랜만이십니다요, 자리비움님 ^^*

    2013-10-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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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리비움

    정원장님 좋은글 항상 감사합니다
    건승하십시요

    2013-09-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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