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철의 복싱 인사이드-18] 추모, 이열우

  


토레스를 9회 TKO로 꺾고 WBC L플라이급 타이틀을 쟁취


지난 12월 9일, 한국 프로복싱은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씨(46)가 국내 복서 최초로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바로 다음날 '장정구의 후계자'로 불리던 전 두 체급 세계챔피언 이열우씨가 유명을 달리하여 수많은 권투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의 나이 겨우 42세. 고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이른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영원한 안식을 찾은 이열우 챔피언을 추모하며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통쾌했던 첫 세계타이틀 획득

장정구가 1988년 6월 오하시와의 15차 방어전을 끝으로 은퇴한 뒤 헤르만.토레스(멕시코)는 강순중과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장정구의 WBC L플라이급 타이틀을 물려받았다. 장정구에게 세 차례의 도전에서 모두 패하고 통산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토레스의 첫 방어전 상대는 이열우였다. 토레스가 노장이기는 해도 55승 중 45번의 KO승은 가히 경량급 최고의 위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1989년 3월 19일 대전 충무체육관에는 만원 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메웠다. 세계챔피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지 4년 만에 이열우가 월드 타이틀 도전자 자격을 얻어낸 것이다. 5회까지 접전을 펼치던 경기는 체력에서 앞선 도전자가 6회부터 강력한 원투 스트레이트를 히트시키며 균형을 허물기 시작했다. 8회에서 안면과 복부에 쉴 새 없는 연타를 허용한 챔피언은 완전히 그로기에 빠졌다. 그리고 9회, 도전자는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12년간 KO패가 없던 백전노장은 도전자의 러시에 링 줄에 기대 무너져버렸다. 베테랑 마틴.덴킨 주심이 2분 14초 만에 경기 종료를 선언한다. 통쾌한 KO승이었다. 선배 장정구의 타이틀을 이열우가 되찾아 오던 순간 링 사이드에 있던 어머니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만순 관장과의 운명적인 만남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육영수 여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이열우씨는 1967년 1월 25일 5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세계챔피언에 등극하기 한 달 전 타계한 큰형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 처음 권투글러브를 끼게 된 이열우는 옥천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복서의 길을 걷게 된다. 옥천고등학교 복싱부 시절 평범한 선수이던 그는 1학년 겨울 박만순 트레이너(현재 대전복싱클럽 관장)를 만나며 운명이 바뀐다. 당시 동균체육관을 운영하던 박만순 관장은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이열우에게 복싱 기술 이외에도 전반적인 삶의 지표와 목표의식을 일깨워주는 스승이 되었다.

박 관장을 만나 복싱에 눈을 뜬 이열우는 2학년이던 1983년 제4회 전국 회장배 대회에서 L플라이급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3학년 때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홍기호 등을 배출한 청주사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방황한다. 운동과 공부, 아마와 프로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것이다. 이 때 그를 잡아준 것은 박만순 관장이었다. 박관장은 이열우가 졸업하던 1985년 초 그와 함께 서울로 상경, 당시 '한국 프로복싱의 대부' 전호연 프로모터가 이끌던 극동중앙체육관으로 선수와 함께 이적한다. 이열우가 반드시 세계챔피언이 될 것으로 확신했던 박관장은 본인이 운영하던 체육관마저 뒤로한 채 트레이너로서 함께 고행 길을 태했던 것이다.

경제적 여유를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택한 박관장의 선택은 결국 옳았다. 이열우의 데뷔전부터 은퇴경기까지 트레이너로 한 배를 탔던 박만순 관장은 그가 은퇴 후에도 체육관 운영의 노하우 등을 전수하며 도움을 주었고 복싱의 스승에서 사회생활의 스승으로 또다시 이열우를 이끌어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실질적인 상주가 되어 마지막 가는 길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해준 것도 박관장이었다. 박만순이 없는 이열우는 생각할 수 없고, 이열우가 없는 박만순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 데뷔 이전부터 은퇴 이후까지도 이어진 두 사람의 팀워크는 수많은 권투인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두 체급 제패의 쾌거

WBC L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이열우의 첫 방어전 상대는 멕시코의 지명도전자 움베르토.곤잘레스였다. 불운이었다. 곤잘레스는 L플라이급을 거론한 때 현재까지도 장정구, 유명우와 더불어 역대 1, 2위를 다투는 명복서다. 도전 당시 전적은 25전승 21KO승이었다. 경량급으로서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멕시칸이다. 근소한 판정패로 타이틀을 내준 이열우는 5개월 후 한 체급을 올려 전 WBC 플라이급 챔피언 김용강과 WBA 플라이급 도전자 결정전을 치른다. 이열우의 진가는 여기서 빛을 발했다. 체급의 차이와 스피드의 차이를 들어 전문가들은 대부분 김용강의 우세를 점쳤지만 이열우는 근성과 체력에서 앞서 있었다. 결국 8라운드에 한 차례 다운을 빼앗은 이열우가 2-1 판정승으로 플라이급의 세계타이틀 도전 티켓을 따낸다. 이듬해 3월 10일, 이열우는 1년 전 세계타이틀을 따냈던 충무체육관에서 WBA 플라이급 챔피언 헤수스.로하스(베네수엘라)와 한 판 승부를 겨룬다. 헤수스.로하스는 1년 전 세계랭커 시절 내한하여 진윤언에게 판정패한 이외에는 패배가 없는 강타자였다. 진윤언과의 경기는 심각한 편파판정으로 빈축을 샀고, 그 때문에 한철희 주심은 제명, 부심들은 각각 1년과 6개월 간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한 바 있다.

출발은 조심스러웠다. 초반을 신중하게 탐색전으로 마친 이열우는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토레스 전과는 사뭇 다른 경기운영을 펼치고 기회를 엿봤다. 적절한 히트 앤드 클린치와 히트 앤드 런으로 챔피언의 진을 빼면서 착실하게 포인트를 쌓아 나갔다. 헤수스의 스타일 자체가 먼저 싸움을 걸기보다는 들어오는 상대를 요리하는데 능숙하기에 큰 스파크는 없었지만 도전자로서는 영리한 경기 운영이었다. 결과는 2-1 판정승. 김태식이 LA에서 억울하게 빼앗겼던 WBA 플라이급 타이틀을 10년 만에 되찾아 오는 순간이었다. 또한 홍수환, 최점환, 문성길에 이어 역대 4번째로 두 체급을 제패하는 쾌거였다.

은퇴, 그리고...

두 체급을 제패하고 4개월 뒤 일본에서 1차 방어에 실패한 이열우는 은퇴를 결심한다. 만 스물 셋의 어린 나이였으나 이미 복서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뤘기 때문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 이후 고향에 내려가 박만순 관장과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요식업 등을 겸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첫 번째 관심은 체육관이었고 나머지는 부수적이었다. 몇 해 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시합이 열렸을 때 이열우씨는 충청방송 중계석에서 박만순 관장과 함께 해설에 한창이었다. 쉬는 시간에 요즘 근황이 어떤지, 아쉬운 점은 없는지 그에게 잠시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쉽죠. 제가 여기서 두 번이나 세계챔피언이 되었었는데... 그 때는 충무체육관에서 권투하면 암표까지 팔릴 정도로 사람이 많았거든요. 근데 지금은... 보세요, 관중석이 텅 비었잖아요."

이것이 복싱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충청도 지역에서 경기가 개최되면 언제나 나타나 선수들을 성원해주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이제는 더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소주라도 한 잔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하늘에 별 따기보다도 어렵다는 세계챔피언벨트를 두 번이나 허리에 감았던 영웅을 이제는 기억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비록 그를 떠나보내는 길은 초라해도 챔피언 이열우가 쌓은 업적은 영원히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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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석봉

    위대한 챔피언!!!! 충북 옥천고의 자랑!!! ^^이열우!!! 나의 동창!! 너의 기록과 도전 정신은 영원히 세인의 기억속에 남으리라. 이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평안한 안식을 취하기를 빈다.

    2010-03-0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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