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비도술을 사용한 연개소문

  

흉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연개소문


정사라고 하는 역사서 등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개소문이 603년 5월 10일에 태어났다는 서술이 정사로 인정받기 어려운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조대기(朝代記)’에 기재되어 있다. 또한 시루메봉 밑에서 태어나 무예를 닦았다는 설화가 강화도 고려산(해발 436m)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강화도에는 이외에도 연개소문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치마대’와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5개의 연못인 ‘오련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연개소문의 가계에 대해서는 그의 장남 연남생(634~679)의 묘지명에 나타나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며 할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아울러 쥐고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천남생묘지).

연개소문의 집안은 연자유-연태조-연개금(연개소문)으로 이어졌다. 막리지나 대대로를 역임했을 정도로 고구려 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집안이었음을 보여준다. 가족관계는 천남생(泉男生)의 아들인 천헌성(泉獻誠) 묘지명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남생과 헌성의 성이 모두 ‘연(淵)’이 아니고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 고종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 같은 뜻을 가진 ‘천’으로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으로도 기재하고 있다. 황윤석(1729~1791)은 그의 시문집인 <이재유고>에서 ‘금’이 우리말로 ‘소(蘇)’ 즉, ‘쇠(蘇伊)’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유재고>를 좀 더 참고하면, 황윤석은 ‘개(蓋)’의 음을 ‘합(合)’으로 보면서, 희다는 뜻의 ‘백(白)’과 같은 글자로 보고 있다. 당시 백은 희(希)·해(諧)·하(何)로 불러, 서로 가깝다고 본 것이다. 이런 견해를 참조한다면, ‘개소문’은 ‘흰쇠’라는 우리말을 음차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을 듯하다. 연개소문 집안이 대대로 쇠를 잘 다루는 야금술에 뛰어났다면, 그러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갓쉰동전’을 바탕으로, ‘개소문’은 ‘갓쉰동’을 음차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연국혜라는 재상이 나이 50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상고사 외에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사실인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런 설이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참고로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며, 대중을 현혹시켰다. 그의 생김새는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동부(또는 서부) 대인인 그의 아버지 연태조가 대대로(大對盧)의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연개소문이 마땅히 그 직을 계승해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미워하여,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면서 그 관직을 임시로 맡기를 청하면서, 만약 옳지 못함이 생기면 비록 버려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 계승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여전히 흉악하고 잔인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몰래 그를 살해기로 의논을 모았는데, 그만 그 일이 누설되고 말았다. 개소문은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두 소집하여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여 술과 음식을 성의 남쪽에 성대히 차려놓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이르자 모두 죽이니 그 수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이고 조카 장(臧)을 왕(보장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다.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녀, 좌우에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매번 말을 타거나 내릴 때 항상 귀족의 장수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디뎠으며, 밖을 돌아다닐 때에는 반드시 군대를 풀어서 앞에 인도하는 자가 긴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도망칠 정도로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앞선 내용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 표현대로라면, 연개소문은 매우 음흉하고, 거칠 것 없으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은 󰡔구당서󰡕 등의 중국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문제가 있다. 중원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최대 적이었던 연개소문을 좋은 쪽으로 서술해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니는 뛰어난 무예인


막리지 대도비전에 기록되어 있는 연개소문에 대한 그림


반면, 앞서 언급한 환단고기에서 개소문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가 부하들에게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눠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여 부하들이 모두 감동하여 한 사람도 다른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신채호 또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천남생묘지명>을 보면, 연개소문이 활을 잘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무예 솜씨에 대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아들의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이므로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서울 명동에서 만난 노상운(盧象雲)이란 노인으로부터 <김해병서(金海兵書)>라는 책을 저술했다는 구전을 기록하고 있다. ‘김해’가 연개소문의 자(字)이며, 고려 때에도 병마절도사가 지역에 부임할 때 임금이 김해병서를 한 벌씩 하사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당의 장수 이정(李靖)이 그의 제자이며, 무경7서의 하나인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이 연개소문에게 배운 바를 정리하였지만 그 글에는 연개소문을 숭상한 구절이 많으므로, 당·송인들이 원본을 위조하여 현재 전해지는 책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김해병서의 존재는 <고려사>에도 보인다. 1036년(정종 2) 서북로병마사가 왕에게 이 병서가 무략(武略)의 요결이니 연변의 주(州)·진(鎭)에 한 책씩 하사하기를 아뢰어 왕이 이를 따랐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저술했다는 구전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구전대로라면, 여기에는 고구려 시대의 온갖 병법 외에 연개소문의 무예 세계도 포함되어 정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 인용하고 있는 갓쉰동전에도 그의 무예 수련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갓쉰동이 7세 되던 해에 어떤 도사가 나쁜 액운으로부터 아이를 구해 내기 위해서는, 부모와 15년 동안 서로 만나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 강원도 원주의 학성동에 버려졌다. 그 지역의 장자(長者) 유(柳)씨의 집에서 종으로 자란 갓쉰동은 그 곳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검술·병서·천문·지리 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연개소문이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어,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어떤 노인으로부터 검술을 배웠다는 갓쉰동전의 이야기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연개소문의 검술과 관련해서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독목관(獨木關)>·<분하만(汾河灣)>·<살사문(殺四門)>·<어니하(淤泥河)> 등의 경극과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에 북경에서 간행된<신간전상당 설인귀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 薛仁貴跨海征遼 故事, 이하 고사)>에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을 통해서 단편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경극의 이야기들은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이덕일·김병기,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2004, 41~56쪽 참조).

송·원 시기 구어 형식의 민간문학인 평화(平話)의 하나인 <설인귀정료사략(薛仁貴征遼事略)>에는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메고, 등에는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 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경극에서도 연개소문을 등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언월도를 들고 있는 용맹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치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의 원형처럼 보인다.

<막리지 대도비전>의 그림을 보면, 오른쪽 아래에서의 칼을 사용하여 당 태종 이세민을 공격하는 사람이 막리지 연개소문이고, 오른쪽 위쪽에 ‘천자’라고 쓰인 인물이 이세민이며, 연개소문과 이세민 사이의 중간 왼쪽에 연개소문이 던진 4자루의 칼에 신전(神箭)을 겨누고 있는 인물이 설인귀(薛仁貴, 613~682)이다. 설인귀는 철륵도행군총관(鐵勒道行軍摠管)이 되었을 때, 10여 만의 적병과 대치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 세 발을 쏘아서 적의 용맹한 기병 셋을 단번에 죽여, 적군의 사기를 꺾어 모두 항복을 받아냈다고 할 정도의 활쏘기 명수였다. 막리지대도비전은 연개소문이 칼로 당태종을 공격하자 주인공 설인귀가 활을 쏘아 구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고사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춘다.
화살이 날아가 비도와 대적하니 먼지가 일고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고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가지 보배가 대적하니
뛰어난 두 장수가 신통력을 겨룬다.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있다는 역사서의 기록들이 반영되어 5개의 비도를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그가 검술에 능했다는 점 또한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검을 던지는 연개소문의 검술을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飛刀術) 혹은 비검술(飛劍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사의 묘사와 막리지대도비전의 그림을 보면, 4개의 긴 칼이 연개소문의 손을 떠나 이세민을 향해 날아가자, 이를 설인귀가 신전을 쏴서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칼을 던져 마음대로 움직여 상대방을 해할 수 있는 단계는, 무협지 속에나 나올 법한 ‘이기어검(以氣御劍)’의 경지이다. 현실 속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연개소문이 칼을 쓰는데 있어, 상대방이 대적하기 힘들만큼 빨리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칼’이라는 의미의 비도 혹은 비검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진출처 : 네이버블로그)

* 허인욱의 무인이야기는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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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욱형

    사랑해

    2009-12-0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

    칼 다섯자루를 썼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 칼도 쉽게 박살날 정도의 파워풀한 검술을 구사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했는데 의외로 비도술을 썼다는 식의 기록이 더 많군요...;;

    2009-10-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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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혈독자`

    허인욱 씨의 글은 무술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만들어 주어 즐겨 읽고 있습니다.
    무술에 대한 시야가 넓어짐을 느낌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9-10-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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