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사기의 종주 - 문노(文弩)

  

격검에 뛰어난 화랑의 수장


허인욱 박사

<화랑세기>라는 책을 보면, 신라 화랑의 검술과 관련해 한 인물이 여러 차례에 거론되고 있다. 바로 문노(文弩, 538~606)다. 그는 격검에 매우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의 우두머리인 8대 풍월주를 진평왕 즉위 초기인 579년부터 582년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 멸망에 큰 공을 세웠다.

15대 풍월주인 김유신(595~673)은 그를 두고 기운이 넘쳐흐르고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기세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라고 추앙할 정도였다. 김유신이 가야계임을 고려할 때 나라를 잃고 박해를 받는 같은 처지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노가 화랑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그러한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는 왕실의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포석사에 문노의 초상화를 안치하고, 신궁의 선단에서 그에 대한 대제를 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문노의 증조할아버지는 비지(比知), 할아버지는 호조(好助),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며,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라고 한다. 기록에 따라면 문화공주는 왜국으로 보이는 야국왕이 바친 여자라고 한다. 하지만 문노 스스로는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고 있다. 후에 검술 제자인 사다함이 가야를 칠 때 같이 갈 것을 청하자, “어머니의 아들로 외조의 백성들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거절한 것으로 보면,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공주는 가야계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신라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한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소태후는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부를 내치고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비조부는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지소태후가 실세로 떠오른 진흥왕(540~576) 집권 초기에 정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문노는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하였고, 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용맹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였다.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에게 귀의하는 이들은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명성을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 충성을 바치기를 원할 정도였다. 문노의 낭도들은 협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후 많은 전쟁에 참가하며 공을 세웠다. 17세 때인 554년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을 따라 백제를, 18세 때인 555년에는 북한(北漢)에 나가 고구려를, 20세 때인 557년에는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공격할 때 참가했다. 모든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보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부하 가운데에 한명이 불만을 표하자, 그는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을 그대들의 마음으로 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아마도 아버지 비조부가 정계에 밀려난 것이 아들인 문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와 <삼국유사>의 문노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역으로 열연하고 있는 정호빈


제대로 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6대 풍월주인 세종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다. 세종은 풍월주가 되자, 문노의 집으로 찾아와 신하로 삼을 수 없으니, 형이 되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이에 문노는 그를 섬기기로 하였다. 세종은 진흥제에게 문노가 여러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영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거나, 낭도 금천이 사사로이 사람을 죽여 벌을 받게 되자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변호하여 작위를 받게 하는 등 문노에게 최선을 다한다. 이로 인해 문노의 무리 또한 세종에게 귀의하였다고 한다.

문노 일파는 풍월주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도 공을 세웠는데 지위는 얻지 못하였다. 이에 7대 풍월주인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별도로 하나의 문파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설원랑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낭도들이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두 문파는 서로 경쟁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설원랑의 문파는 정통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높고 깨끗한 의논들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위아래를 다툰 것이다. 나라사람들은 문노의 무리를 나라를 지키는 신선이란 뜻을 가진 ‘호국선(護國仙)’이라 불렀다. 설원의 무리는 ‘속세를 떠나 유람하기를 즐겨한다’하여 구름 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운상인(雲上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설원의 무리는 골품이 있는 사람들 즉, 귀족계급들이 많이 따랐고, 초택인 민간인들은 문노의 무리를 많이 따랐다.

진흥대왕 사후 즉위한 진지왕은 지도부인을 총애하였다. 지도부인의 아버지 기오가 문노와 종형제간이어서 지도부인은 문노를 따랐다. 그로 인해, 그녀는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으로 임명하고, 후에 9대 풍월주가 되는 비보랑(秘宝郞)을 부제(副弟)로 삼게 하였다. 이후 설원이 문노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검술 제자로는 9대 풍월주가 되는 비보랑이 있으며, 5세 사다함도 12살 때부터 그에게 검술을 배워 격검에 능했다고 한다. 11세 풍월주가 되는 세종과 미실의 아들 하종(夏宗)도 문노에게 검술을 배워 그 정수를 얻었다고 한다. 14세 풍월주인 호림공도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봐서 그에게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보이며, 정예인 임종, 대세, 수일 등도 그에게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문노를 모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사다함의 낭도 중에 하나인 미실의 동생 미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노는 미생이 12살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말에 오르지 못하자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꾸짖은 적이 있었다. 미생을 야단치는 것을 본 사다함은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문노는 사다함의 태도 때문에 다시는 이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미생은 이 때문인지 검도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속으로 문노를 꺼리며 경의를 표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사다함은 매우 곤란해 했다. 이상은 화랑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정확한 사실여부는 조금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흠운(金歆運)전을 보면, 김흠운(?~655)이 어려서부터 화랑 ‘문노(文努)의 문’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기록은 문노가 60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김흠운을 직접 연계되었다기보다 문노의 뜻을 잇는 무리들의 문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여하튼, 화랑세기의 문노(文弩)와 삼국사기의 문노(文努)는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책은 모두 문노의 존재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는 문노를 허구의 인물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기록의 부재로 문노의 검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사진출처 : MBC)

* 허인욱의 무인이야기는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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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노

    그시대..즉 삼국시대의 검법수준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궁금합니다. 하긴 그때 검술이 훨씬 더 발달했을 걸로 압니다. 항상 칼 가지고 죽고 죽이고 하는 것을 밥먹듯 하였으니 진짜 실전 검술은 삼국시대 가장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궁금하군요. 우리나라 검도의 역사를 좀 꽤고 있는 분 계시면 답변 부탁드립다.

    2009-09-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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